정치.

Imagine 2011. 9. 9. 11:00
근래 정치에 관심이 많아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많았지만 '더' 많아졌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을 듯 싶지만. 아침에 컴퓨터를 켜면 인터넷으로 서울시장 예비후보들의 지지율을 살펴보곤 한다. 그리고 밤새 또 어떤일이 터졌는지도 살펴본다. 스포츠, 연예 기사에 관한 관심은 그와 반비례 하여 많이 줄었다. 이는 아마 최근 몇 년 사이 정치가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깨닭은 결과일 것이다.(사실 스포츠의 결과나, 연예인 가쉽은 내 삶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근대 국민국가(혹은 민족국가)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사상은 '인민주권론'이다. 그전까지 주권이란 것은 군주에게, 혹은 몇몇 귀족들에게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이를 바꿨다. 프랑스 혁명의 주체였던 부르주아 계급은 민중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도움을 얻기위해 국가의 권력이 인민에게 있다는 사상을 만들어 냈다. 이로서 국가는 왕조의 국가도 아니고, 몇몇 귀족의 국가도 아닌 나의 국가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허울 좋은 관념에 불과했다. 실제로 그 이후 프랑스는 몇몇 부르주아의 국가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에서 출발하여 많은 제도들이 정비되었고, 그 제도 안에서 인민들은 힘을 갖을 수 있게되었다. 여전히 정치는 '정치가'라고 하는 몇몇 특별한 계급(적절한 표현은 아닌 것 같지만 일정의 계급성은 갖는 다고 생각한다)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들은 최소한 그들 나라의 시민(혹은 국민 혹은 인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인민주권론에서 시작된 민주주의의 상식에 따르면 주권을 가진 모든 사람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 같이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도 정치인이라면 '여러분 모두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포장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권력을 너희 '피지배층'도 같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전에 모 국회위원께서 '아무나 정치하려고 한다'라고 말해주셨다. 솔찍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정치는 보통 사람이 해서는 안되는, 몇몇이 독점해야 하는 그 무엇이라는 프랑스 혁명 당시 '부르주아'의 생각을 그대로 답습하고 계신 것이다. 그 솔찍함과 순수함에 감탄을 보낼 수밖에 없지만, 그가 말한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은 조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직접 민주주의의 정수라고 했던 페리클리스 시대의 아테네에서는 심지어 공직을 추첨으로 뽑았다. 모든 시민은 정치와 국가운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원칙을 그대로 지킨 것이다. 그럼 이때 그리스가 엉망이었냐? 그렇지도 않다. 페리클리스 시대의 아테네는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이런식의 정치야 아테네와 같은 폐쇠적인 시민국가이기 때문에 가능하긴 했지만, 민주주의라는 원칙에서 볼 때 사람의 의식이라는 것이 2000년이 지나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고, 몇몇 정치가들을 볼 때 더 세련되지 못해졌다는 데에는 약간의 허무함 마져 느낀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지만 군사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이던 노태우는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가 왔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지금 위대한 보통사람은 어디도 없다. 나도 겪고 있지만 보상도 제대로 못받고 쫒겨나고, (백번 양보해 그것이 불법이라 하더라도) 내 권리를 지키겠다고 버티다 공권력에 의해 불에 타 죽는 '보통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일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 당시 부르주아가 인민주권론을 이야기했다고, 20여년 전 노태우가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선언했다고 그것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있는 권리를 나에 이익에 맞게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사용할 때 비로서 얻을 수 있다. 가만히 앉아서 선거철에만 잠시 정치에 관심을 갖고 투표 몇 번 한다고 바뀌지 않는 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하고 정치가들에게 '내가 조금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하는 것은 감나무 밑에서 떨어지는 감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리는 것 보다 더 가능성이 적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심지어 선거마져!-이 선거는 무엇을 결정하는 '투표'와는 구별된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아마도 많은 사람이 최근 몇 년 사이 정치가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정치에 의해 세금이 결정되고, 집 값이 움직이고, 물가가 오르락 내리락 한다. 그것을 알았다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별게 아니다. 끊임 없이 관심을 갖고, (원칙 적으로는)나를 대신해 정치를 하고 있는 그들을 감시하며, 비판하고 요구 해야한다. 그래서 그들이 최소한 보다 많이 당신들의 눈치를 보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삶이 그렇게 '한가하지'않은 것도 안다. 하지만 그것도 하지 않으면 '각자'가 원하는 좋은 세상은 오지 않는다. '인민주권론'은 원칙으로만,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는 수사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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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

 

역사는 과거를 공부하는 학문이다. 동양의 전통적인 역사관은 ‘과거에 비추어 오늘을 경계한다.’이고, 이런 이유로 동아시아에서 역사학은 제왕학(帝王學)이었다. 동양에서 새로 개업한 왕조는 전(前)왕조의 역사를 편찬했으며, 왜 이전의 왕조가 흥했고, 망했는지를 거울삼았다.

또한 역사는 두려움의 학문이기도 했다.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은 서문 격인 백이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체 하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도척과 같은 놈들은 사람의 생간을 회쳐 먹으며 살고도 천수를 누렸고, 백이, 숙제와 같은 이들은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고 말았다. 하늘의 도는 반드시 의롭고 착한 사람 편이라는 말이 있지만, 백이 같은 인물은 왜 그처럼 불행해야 했는가? 또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났던 안회는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하게 살다가 일찍 죽었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하늘의 도의 섭리는 올바른 것일까? 혹시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그는 도척과 백이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라도 이들의 행적을 남기기를 결심한다. 즉 이들을 ‘역사의 심판’에 맡긴 것이다. 많은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실록(實錄)을 만든 것은 왕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사관(士官)들은 법의 보호를 받았으며, 폭군들도 자신의 악행이 역사에 남는 것은 두려워했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자신 사후에 실록 편찬에 기초가 되는 자료인 사초(史草)를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역사에는 이러한 의미 밖에 없는가?

한국은 세계 최강대국 가운데 둘인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다. 지리적 여건이 썩 좋다고 할 수 없다. 전근대시기에는 중국에 많은 부분 예속 당했으며, 근대에 들어서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한국은 중국과 일본을 무시하는 세계에서 몇 되지 않는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정부분 한국 국민이 갖는 역사적 기억에 근거한다.

 

기본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일본을 ‘한국이 문화를 전파해준 나라’로 인식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이 일본을 깔볼 근거는 전혀 되지 않는다. 한국 대부분의 전통문화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는 과거 중국 문화를 수입했다고 중국을 우러러보지 않는다.

일본은 전근대 한반도 국가에게는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건국 초기부터 신라를 공격하는 것은 왜(倭)이며, 신라가 최초로 만든 외교관련 부서는 왜전(倭典), 즉 일본에 관한 것이었다. 고려 말, 고려를 끈질기게 위협한 것도 일본이었으며, 7년간의 전쟁으로 조선을 초토화 시킨 것도 일본이었다.

일본을 무시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조선시대부터였을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 의해 일본을 무시하였고,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로 여기며 이러한 태도가 심화되었다. 그 결과는 우리가 또한 역사에서 배운 것과 같이 일본에 대한 식민지배였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까지 일본을 무시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을 생각해보자. 중국은 세계무대에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을 제외하고 항상 세계의 최강대국이었다. 한국의 많은 문화는 중국에서 수입했다. 4세기 이후부터 17세기까지 세계의 어느 문명도 중국만큼 풍요롭지 못했다. 한국 역사상 가장 강대국이라던 고구려는 결국 당에 의해 멸망당했고, 황제국을 칭하던 고려는 몽고에 속국이 되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에 진심으로 사대했으며, 명을 멸망시킨, 그래서 조선 사대부들이 그렇게 멸시하던 또 하나의 중국왕조인 청에게는 왕이 삼전도에서 아홉 번이나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중국을 무시하는가?

 

우리가 요새 중국을 ‘무시’하는 것은 현재 중국의 문화와 중국의 질 낮은 물건들이 주요 원인이 된다. 즉 근대 이후의 기억이 중국 무시의 원인이다. 반면 일본 무시는 앞서 언급했던 전근대시기에 ‘우리가 문화를 수출해줬다’는 기억이 근거가 된다. 즉 근대건 전근대이건 우리한테 유리한 쪽으로 기억하고 주변의 세계 최강국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은 근대 한국의 역사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 부분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국민국가는 근대 이후에 성립됐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전의 국가들은 왕조국가였다. 우리가 흔히 ‘이씨조선(李氏朝鮮)’은 잘못된 말인 것으로 알지만, 실제로 조선은 이씨 왕조의 나라였다. 왕씨가 왕이 아닌 고려가 있을 수 없듯이, 이씨의 왕통이 바뀌면 그것은 더 이상 조선일 수 없었다. 서양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근대의 국가에 시민이나 국민은 없었다. 근대는 이런 ‘시민’과 ‘국민’의 성장 혹은 탄생이기도 했다. 그리고 ‘국민’ 혹은 ‘신민’의 탄생에 일조한 것이 바로 역사였다.

 

전근대는 신분제 사회였다. 전근대의 신민(臣民)은 그 자체로 왕조에 예속된 존재였으며, 신분에 따라 상위 신분에 속박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 국가에 속한 인민들 모두가 동질성을 느낄 수는 없었다. 국민은 이렇게 동질성을 갖지 않았던 신민들 사이에 동질성을 부여하며 탄생했고, 그 도구로 활용된 것이 역사이다. ‘우리 국민은 동일한 역사를 갖고 있다.’고 가르치는 것만큼 동질성을 확보하는데 좋은 도구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는 국가에 의한 언어의 통일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쓴다.’라는..

 

한국의 역사 역시 이러한 ‘국민 만들기’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식민지를 겪었고, 일본에 의해서 왜곡된 한국의 역사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강조된 것이 바로 ‘민족’이었다. 전근대 중국, 근대 일본에게 ‘당한’ 역사로는 국민을 만들 수 없었다. 때문에 고조선이라는 오래전 역사가 강조되었으며(이는 사실 일제 초부터 있었던 움직임이다), 고구려는 민족의 ‘웅위(雄威)’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기억되었다. 해방이후 단기(檀紀)를 사용한 것은 이러한 민족주의적 국민 만들기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우리 민족’이 본래는 중국보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으며, 또한 엄청난 영토를 갖고 있었다는 <환단고기>류의 책이 주목 받은 것도 이런 흐름 가운데의 일이었다.

 

한국의 역사가 자랑스러우려면 주변국의 역사는 축소되어야 했다. 일본은 고대부터 문화와는 별개로 상당한 국력을 갖고 있었지만, 한국 역사책에서 이것이 언급된 일은 없었다. 실제로 신라는 실성왕 대에 당시 전성기였던 고구려와 함께 일본에 인질을 보낸다. 한편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항상 최강국이었다. ‘한민족’ 최고 강대국이었다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신라가 아니라 당이었으며, 원 간섭기의 고려는 원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 역시 한국 역사책에서 언급되지 않거나 축소되었다.

 

현재의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근대의 ‘근대 국민 만들기’를 위한 역사 교육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다.

 

이렇게 ‘근대 국민국가’에서 ‘역사’의 역할을 구구절절 이야기한 것은 역사가 단지 과거를 공부하는 것에 그치는 것만이 아닌, 지금 현재 우리의 인식의 단면을 살펴보기 위한 학문이기도 한 학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역사는 과거를 그대로 복원해내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의 고대사는 한국 고대의 일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라(사실 이건 가능하지도 않다)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싶은(혹은 인식하는) 고대사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학은 가장 현재적인 학문이며, 동양의 전통적인 사관에서와는 다른 의미에서 현재의 나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학문이다.

 

동북공정을 예로 들어보자. 동북공정은 중국이 고구려-발해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기 위한 작업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시작한 것에는 나름의 절박한 이유가 있다.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중국은 영토 내 모든 민족의 동질성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고, 그 때문에 영토 내의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반대로 이른바 ‘단일민족’인 한국은 예-맥-한(韓)족의 역사를 모두 ‘우리민족’의 역사로 보고 민족사를 서술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근대 일본은 만주를 중국·한반도와 모두 분리 할 필요가 있었고, 만주는 한반도·중국과 관련 없는 독자적인 역사였다는 ‘만선사관’을 창조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한국에게 고구려는 왜 중요할까? 사실 중국이 고구려가 한국(북한까지)의 역사라고 인정한다고 해도 고구려의 땅이 우리 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원나라가 모스크바까지 지배했다고 지금 그 영토가 몽고의 영토가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구려-발해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 국민(혹은 한민족)의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가 중국의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중국의 국민 만들기에서 동북지역의 역사 귀속이 중요하듯, 한국의 국민 만들기에서도 고구려-발해의 역사는 중요한 것이다.

 

한편 실질적인 문제도 있다. 북한이 붕괴했다고 가정해보자. 고구려-발해가 중국사로 편입된다면, 평양까지 고구려의 영토였기 때문에, 동북공정은 ‘북한 붕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북한을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킬 명분이 될 수도 있다.(앞서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가 된다고 고구려 땅이 우리 땅이 된다고 한 것과 모순된다고 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북한붕괴라는 특수한 상황을 가정한 것이다. 국제 관계에서 국가의 붕괴는 매우 특수한 상황에 속한다)

 

조금 중언부언 했다. 이제 결론을 맺어보자. 결론에서도 조금 중언부언 할 것이다.

역사는 국민국가 만들기에 매우 중요했다.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유효해야 하는 것이지, 앞으로도 유효해서는 안 된다. 근대에 국민과 민족이 생겨나며 국민과 민족이란 이름으로 엄청난 악행들이 행해졌고, 또 행해지고 있다. 국가에 이익이 되는 것이면 악행도 선행으로 포장된다.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권시절 국익을 위해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피를 흘렸으며, 또 그중 일부는 그곳에서 만행을 저질렀다. 노무현 정부도 국익이란 이름으로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병했다. 모두 국가의 이익이란 탈을 쓰고 이루어졌으며, 그것으로 모든 행위는 정당화 되었다. 사회보장제도가 가장 잘 갖춰지고, 노동자의 권리도 가장 철저하게 보호하는 북유럽의 국가와 다국적 기업들도, 그들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는 약소국의 독제, 약소국 국민의 착취는 용인한다. 이것이 근대 국민국가이고, 그 안에 사는 국민들이다. 세계 제2차 대전에서 독일의 나치에 동조한 독일인들은 국가에 대한 사랑, 즉 애국심으로 무장했다(우리는 정당성을 떠나 그들의 애국심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민족 간의 갈등을 조장하고, 민족 대학살이 일어 난 예는 굳이 들지 않아도 셀 수 없이 많다.

 

지금의 역사학이 할 일은 이러한 근대 국민의 환상을 역사로부터 깨는 것이다. 애초에 민족과 국민은 없었다고 말해야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민족이었는가? 이 삼국에게 한민족 운운하는 것 자체가 지금의 관점이다. 그들은 죽고 죽여야 할 적이었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백제군의 화살에 전사했으며, 백제의 개로왕과 성왕은 각각 고구려와 신라의 군사에게 목이 달아났다. 백제에게 신라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존재였으며, 신라에게 백제는 자신의 목줄을 죄고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적국이었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합한 후, 고려와 조선이라는 두 왕조가 1000년 가까이 통일 왕조를 이어 왔다. 그 긴 시간동안 일정한 동질성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평생 자신의 동네를 벗어날 수 없던 사람들이 대부분인 당시 상황에서 경상도의 백성이 함경도의 백성과 동질성을 느꼈다고 할 수 있을까? 거기에 신분의 벽이 엄연한 사회에서 혹시 생겼을 동질성이 지금의 ‘민족 동질성’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샤를마뉴, 카를로스 대제, 칼 대제. 모두 같은 사람이다. 제일 앞은 프랑스어, 다음은 영어, 그 다음은 독일어식 표현이다. 이 인물은 중세 프랑크 왕국의 왕인데, 이 사람의 역사는 직금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삼국이 공유한다. 이 인물을 현재 국민국가 중 어느 한 나라의 역사로 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유럽에서 동아시아와 같은 역사분쟁은 없다.

 

한반도의 역사가 중국 대륙과 무관한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중국 대륙의 역사가 그들이 말하는 북방민족(흉노, 거란, 몽고) 등과 잠시라도 무관한 적이 있었던가? 중국과 한반도의 문화 없이 지금의 일본 문화가 있을 수 있었는가? 인도 문명이 없이 한국의 불교문화가 가능했으며, 알렉산더 없이 인도의 간다라 미술이 생겨났겠는가?

 

이런 식으로 국가와 민족의 역사를 분해하고, 인류의 역사를 복원해야 한다. 과거의 역사는 지금 어느 한 나라의 것일 수 없다. 그렇게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결국 나와 남을 가르게 된다. 국민과 민족도 철저히 남을 의식하는 개념이다. 역사학은 최소한 역사로부터 이러한 편 가르기를 그치게 해야 한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도척을 심판하려 했고, 백이의 의로움을 알리려했다. 이를 통해 후세가 역사의 무서움을 알고 최소한 자신이 꿈꾸는 보다 이상적인 사회가 되기를 꿈꿨기 때문이다. 왕들이 제왕학으로 역사를 공부한 것도 과거를 통해 스스로를 경계하고, 그것으로 보다 나은 통치를 하고자하는 마음이었다.(물론 역사를 통해 자신 왕조의 정당성을 구축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지만..)

지금의 역사학도 마찬가지이다. 최소한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역사학은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과학기술, 사회과학이 사회에 필요하듯, 역사학도 사회에 필요한 학문이란 뜻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학문을 해야만 한다. 내가 역사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다소 거창하지만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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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말까지 정말 먹고 자는 시간 이외에는 씻을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될 정도로 책상 앞에만 앉아 있었다. 그 사이 46명의 젊은이들이 죽어갔고, 또 그를 구하기 위해 10명의 사람이 희생됐으며,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20대 젊은이 하나도 백혈병으로 죽었다. 뭐 하지만 죽음에도 값을 책정해 놓은 듯 앞의 죽음은 언론에서 각종 예능프로를 결방시키며 부각되었고, 그 다음의 죽음은 앞의 죽음에 종속되어 이야기 되었으며, 맨 마지막 죽음은 일부 언론에서만 보도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할 말이 많았지만, 사는게 바빠 할말도 제대로 못하고 오늘까지 왔다.

사실 이 세 사건의 죽음은 모두 사회적으로 일정한 메세지를 던진다. 천안함 사고는, 결국 군대에서 죽으면 개죽음이란 것을 다시한번 각인시켰다. 희생자 중에 소위 힘있고 빽있는 자들의 자제들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힘있고 빽도 있는 자들은 힘없는 자들의 죽음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숨겼다. 없다던 동영상이 나오고, 논리적 개연성은 별로 없지만 어뢰로 몰아갔고, 증거도 없지만 일단 '북'의 소행이라고 한다. 뭐 북이 그랬을 가능성도 있으니, 북의 연관성을 가능성의 하나로 검토하는 것은 얼마든 가능한 일이다. 다만 이놈의 땅은 북핵을 갖고도 6자가 모여서 회담을 해야하는 민감한 곳이기 때문에, 결정적 증거없이 함부로 '북'의 소행으로 단정짓는 것은 6자 전체의 외교 문제로 번질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이렇게 북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마도 6.2지방 선거에 대한 노림수라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한편 금양호 선원들의 죽음은, 국가가 개인을 동원해 놓고 그 죽음에는 별로 책임지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물론 언론도 마찬가지이고. 천안함의 희생자들은 그 죽음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들이 영웅은 아니다. 정말 영웅은 자신들에게 별로 이득될 것이 없지만 수색에 나갔다 명을 달리한 금양호 선원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천안함 사건에 종속된 죽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고, 국가도 언론도 그렇게 취급했다. 이것은 언젠가 우리가 국가에 동원이 되어, 혹은 자발적으로 국가를 위하다 죽음을 당해도, 우리의 죽음이 딱 이것만큼 취급될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 혹여 그 죽음이 어떤 정치적 특수성을 갖지 않은 한에서 아마도 이것이 최대치일 것이다.

다음으론 삼성전자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죽은 박지연씨 사건이다. 이건 언론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삼정전자에 특정 생산라인의 노동자들이 백혈병에 자주 걸렸고, 그중 한 사람인 박지연씨는 23살의 나이로 죽었다. 하지만 삼성도, 국가도 사회도 여기에는 모두 무심하다. 그런데 사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이것도 상당히 와 닿아야만 하는 사건이다. 우리 대부분이 노동을 팔고 월급을 받는 임노동자인 상황에서, 자본이 노동자를 취급하는 방식이 너무나 적날하게 들어났기 때문이다. 돈 주는 만큼 써 먹지만, 필요 없어지면 버린다. 이게 당연할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인간에 대한 배려는 눈꼽만큼도 없다. 최소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환경과 조건은 만들어 주고 노동을 팔게 해줘야 하는 것이 사용자들의 의무이고, 그 노동 현장의 문제로 노동자가 병이 걸렸으면 책임을 지는 것이 사용자의 의무이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는 이것을 무조건 '우리 책임이 아니다'라고 해도 용납되고, 언론도, 사회도 이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이 세가지 죽음 중 어디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훗날 내 자식이 군대를 간다면, 우리는 첫 번째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건강히 제대하는 그날까지 노심초사 해야하겠지. 내 주변에서 불의한 일이 생겼을 때, 난 얼만큼 정의로워 질 수 있는가? 혹은 내가 불의한 일을 당했을 때, 주변에 얼마나 나에게 도움을 줄 정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 죽음이 던지는 것은 이러한 메시지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일하는 동안, 난 얼마나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가? 사용자에 입장에서 난 인간이 아니라 돈 벌어주는 기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내 자식 대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마지막 죽음이 주는 메시지일 것이다.

사족을 붙인다. 물론 난 저러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자리에 앉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사소한 단어들과 씨름했고, 조선 전기의 노비제에서 종모법과 종부법 그리고 그것들과 보충군이 어떠한 관계 속에 있었는지에 대해 찾고 있었으며, 신라 경문왕의 가문과 성골의식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한성백제에 대한 자료를 조사했다. 앞선 고민은 그냥 언듯 언듯 머리를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사는게 바쁘다는 아주 현실적이고 직면한 문제는 훌륭한 변명꺼리였지만 말이다. 5월도 어느 덧 중순에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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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A Day in The Life 2010. 2. 17. 10:56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

제가 거의 25년간 사는 동네의 이름입니다. 예전에는 경기도 광주군 풍산리였습니다. 서울과 근접해 있지만 개발은 전혀되지 않은 동네로 케이블 티비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 동네를 조만간 떠나야 합니다. 보금자리 아파트가 들어선다는데, 우리 동네가 건립부지에 포함이 됐거든요. 다행히 저희는 '주택 소유자'라서 분양권이 나오기 때문에 다시 이 동네로 돌아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땐 이미 제가 25년을 살던 그 동네는 아니겠죠. 그게 너무 아쉽습니다. 갑자기 이게 아쉬워 지는건 얼마전 가족들끼리 개발이 끝날 때까지 이사가야 할 동네를 결정하는 회의를 했는데, 그제야 이 동네가 사라진다는 걸 조금이나마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난 김에 우리 동네에 관한 제 기억들을 글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기억나는 건 동네의 앞 산입니다. 거북이 등껍질 처럼 생겨서 거북산이라고 불렸는데,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산비탈에서 비료포대를 깔고 눈썰매를 타곤 했습니다. 비탈의 가장 아래에는 짚을 푹신하게 깔아 놓아 안전사고(!?)에 대비하기도 했습니다. 산 정상 쪽에는 방공호 비슷한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최근에 올라가선 찾지를 못했습니다. 분명한 기억이 있는데..). 그 안에는 박쥐들이 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둡고 박쥐까지 나와서인지, 철이 없어 겁도 없던 어린시절에도 그 방공호는 동네의 형, 동생, 친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또 기억나는건 우리가 '산'이라고 불렀던, 저희 집 바로 옆에 있으며 지금은 교회 주차장으로 쓰이는 조그만 구릉입니다. 말이 '산'이지 약간의 경사에 나무 몇 그루만 있었습니다. 지금 주차장으로 쓰일 만큼 꽤 넓은 공간도 있었구요. 때문에 '산'은 평소 우리의 놀이터 였습니다. 망까기, 구슬치기, '와리가리'부터 야구에 이르기까지 각종 놀이는 모두 그 '산'에서 이뤄졌습니다. 그 한쪽에선 잠시 양봉을 하기도 했는데, 야구하던 공이 양봉하는 곳에 굴러가 주으러 갔다가 귀 뒷쪽을 벌에 쏘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희 집 길 건너 골목은 또 다른 놀이의 장소였습니다. 아무래도 '산'은 경사 때문에 축구를 하기엔 좋치 않았거든요. 덕분에 골목은 동네의 축구장으로 한창 시끄러웠습니다. 당연히 골목 양 옆에 있는 집 아주머니들은 우리가 골목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죠. 그나마 축구만 하면 다행인데, 축구를 하다가 주먹야구 같은 걸로 게임이 바뀌면, 공은 담을 넘어 골목가의 집들로 들어가기 쉽상이었거든요. 그 공을 찾아오는 것도 우리에겐 상당히 스릴 넘치는 놀이였지만 말이죠.

그리고 논이 틈틈히 있었는데 그곳도 우리들의 놀이터였습니다. 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논 옆에 경사면 이런 곳도 있었고, 논으로 쓰이지 않는 땅도 있었는데, 비가 와서 그런 땅에 물이 고이면 배랍시고 스트로폼을 띄어놓고 놀던 것, 경사명에 어디서 주운 망가진 삽으로 땅을 파고 '본부'라고 하며 놀았던 것도 아련하게 기억납니다. 여름을 그렇게 보내고 겨울에 논이 비워지면, 우리는 '산'을 떠나 논에서 야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전 예나 지금이나 야구를 잘 못하는데 그때 사촌형이 저에게 준 일루수 글러브 덕에 전 항상 야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기억나는 건 그 시절을 함께 보낸 형, 동생 그리고 친구들입니다. 그 당시 우리동네에는 제 또래의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같이 야구, 농구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났고, 부모님 몰래 나쁜 짓도 많이 했습니다. 중학교 올라가서 첫 번째 '야동'을 본 것도 그들과 함께였고, 당시로는 꽤나 큰 점 30-50짜리 고스톱 치는 일탈을 감행한 것도 그들과 함께였습니다. 중학교 때 통닭(치킨이 아니라 통닭이라 표현해야 함!)이 먹고 싶어 거북산 밑 양계장에서 5000원 주고 방금 죽은 닭 한마리와 산 닭 두 마리를 산 다음, 차마 목을 비틀 수 없어서 비료포대에 넣고 때려서 잡았던 만행을 저지른 것도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함께했던 친구들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 하나 둘 사라졌습니다. 허름하나마 저희는 집을 갖고 있었고, 그들은 당시 집이 없었기 때문이죠. 다행이 부모님들이 열심히 돈을 벌어 집을 사서 이사간 친구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제가 위에 쓴 글만 봐도 우리동네는 부자동네는 아니었거든요. 대부분의 부모님은 동네에 몇 개있던 조그만 공장에 다녔는데, 그 공장들이 이사를 가면서 이사를 갈 수밖에 없던 것도 컸구요. 저희 부모님도 그 공장들에 음식을 해주면서 생계를 유지하셨죠. 아무튼 이러한 변화 속에 야구도 할 수 있었던 또래 친구들은 하나 둘 떠났고, 지금은 저를 포함해 세명 정도만 동네를 지키고 있고, 그나마도 이제 뿔뿔히 흩어져야할 처지 입니다.

우리 동네의 이러한 변화는 그동안의 시대 변화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값 싼 중국제품의 수입으로 인한 제조업의 쇠퇴, 대기업의 싹쓸이로 인한 중소기업의 몰락의 결과가 동네 작은 공장들이 지방으로 옮겨가거나, 망하게하는 결과를 초래했죠. 거기다 교육문제도 컸습니다. 저만해도 주소는 경기도였지만, 당시 하남에 마땅한 학교들이 없어 학군은 서울로 배정되는 특이한 세대여서 서울로 학교를 다녔습니다(비록 지역 우선 배정으로 인해 점점 멀리가긴 했지만). 하지만 저보다 4년 정도 어린 친구들은 하남으로 학군이 배정됐는데, 이것이 서울로 학교를 배정받고 싶어하던 부모님들에게 이 동네를 떠날 구실을 줬죠. 강동구만해도 그렇게 나쁜 학군들은 아니었으니까요. 덕분에 지금까지 10대 중반에서 20대까지의 사람들을 우리동네에서 찾긴 어렵습니다. 서울 바로 옆의 동네가 이러한 형편이니까, 그 20년 사이에 수도권 집중화, 서울 집중화가 얼마나 심해졌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지금 이 동네를 떠나야 하고, 이 글을 쓰는 것도 '보금자리 아파트' 국가 정책 때문이죠. 아! 저는 서민과 신혼부부들에게 '내 집마련의 기회'를 주는 이 정책 자체에는 전혀 반감이 없습니다. 저희도 집을 분양 받으면 집 값이 오를테니말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아쉬운 건 청년들이 없고 침체된 동네이긴 하지만, 몇 십년된, 그래서 정말 이웃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서울 근교에 시골의 풍취를 느낄 수 있었던 꽤 괜찮았던 마을 공동체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이죠. 이곳이 고향인 사람은 없지만, 집 값 오르지 않아도 이 동네를 떠나지 않고 싶어하는 분들도 많거든요. 아무튼 몇 십년 간 그린벨트로 묶여서 개발되지 않았고, 그래서 외형적으로나마 세월을 비껴갔던 우리동네도, 이제 그 외형마져 시대의 흐름을 타게 되었습니다. 만나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다는 말을 되세기지만, 25년간 든 정을 때어내기란 쉽지 않을 듯 합니다. 


P.S.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데, 기분이 참 묘~ 하네요. 담배를 필줄 알았다면, 한 대 피고 싶은 심정이 이런걸까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Posted by beatles for s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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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문제로 시끄럽다. 여야 갈등은 물론 여당 내 갈등도 심화되고 있다.
문제는 세종시를 원안대로 처리하느냐, 아니냐이다.

원안추진의 핵심내용은 행정부처의 이전이다.
참여정부는 국토균형발전을 목표로 행정수도 이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관습법’의 논리로 행정수도 이전은 좌절되었고,
그 대안으로 만들어진 것이 ‘행정복합도시(행복도시)’이다.

수정추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행복도시 세종시는 행정 비효율을 초래할 것이며,
자급기능이 부족하기 때문에 유령도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으로는 세종시가 참여정부에서 충청권 표를 얻기 위한 정책이었고,
때문에 시작부터 잘못되었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후술).

일단 저 논의에서 빠져나와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현재 서울은 많은 특권을 가진 도시이다.
한국에서 가장 비싼 땅은 서울에 있고,
고위공무원과 부자들의 대부분도 서울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즉 공간적으로도 계급적으로도 서울은 이미 하나의 특권이다.
(물론 서울 안에서도 강남, 강북 등으로 나뉘는 등 복잡한 양상을 띠기는 한다)

현재 뿐만 아니라 서울은 계속 특권의 도시였다. 최근에 읽은 한 책의 내용을 인용해보자.

그러나 조선시대 이 땅에서는 서울 외에 성장의 ‘증거’를 확보한 도시를 찾아볼 수 없다. 조선 후기에 ‘소도시’로 성장할 가능성을 포구나 장시가 없지는 않았지만, 옛 도시는 평양이든 개성이든 대체로 정체되어 있었다. 유독 서울만이 천도 후의 급팽창에 이어 17세기 이후 새로운 도시적 활기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중략) 지방도시는 사실상 자체의 배후지를 갖지 못한 채, 서울의 촉수로서만 기능했다. 그리하여 서울은 조선 후기의 생산력 발전의 성과를 독점적으로 향유했다. 19세기 경화사족(京華士族)과 왈짜패들이 흥청망청 근대적 소비문화의 싹을 틔우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 민란의 시대도 함께 열렸다(전우용 <<서울은 깊다>>, 돌베게, 27-28쪽).

‘서울은 조선 후기의 생산력 발전의 성과를 독점적으로 향유했다’라는 말에서
‘조선 후기’를 ‘산업화에 따른’으로 고친다면
이것이 조선 후기를 이야기 하는 것인지 현재를 이야기 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이렇듯 서울은 오랜 기간 특권을 향유한 도시였다.
그리고 세종시 문제의 핵심은 이 특권을 나누자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가 않다.
앞서 언급했듯 서울은 공간적, 계급적으로 이미 특권의 도시이다.
이것은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울에 있어야 하며,
서울의 특권이 유지 되어야 계급적 특권도 유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서울에는 명문고, 명문 입시학원 등은 물론 명문 초등학교까지 밀집되어 있다.
한국에서 계급적 특권은
명문고 - 명문대 - 대기업(혹은 전문직)으로 이어져야 유지가 가능한데,
명문 초,중,고와 학원이 몰려있는 서울은 공간적으로 특권의 도시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많은 서울 주민과 수도권 주민은
서울 내에서도 특히 특화된 공간(8학군으로 대표되는)으로의 편입을 욕망한다.
이 예는 단지 교육에 국한된 것이지만 정치, 경제 등 모든 면에서
강남으로 대표되는 서울로의 진출은 성공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종의 특권계급인 공무원(고위 공무원)에게
특권의 땅을 떠나라고 한다면, 반발이 있음은 당연할 것이다.
또한 특권으로의 편입을 욕망하는 많은 서울 및 수도권 시민들 역시,
반발까지는 아니더라고 탐탁치 않아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세종시 수정론도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수정론의 내용은 간단하다.
‘서울에서는 하나도 못 내려간다. 대신 다른 것을 해주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서울대 이전 안도 서울대의 정원을 늘려 서울의 특권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었고,
지금 나오는 과학비지니스벨트 역시 서울에는 해당 없는 이야기였다.
기업의 유치도 서울의 대기업이 내려간다는 이야기 보다는
다른 지방도시로 갈 기업이 세종시로 옮긴다는 이야기가 많았다(삼성전기 처럼).

서울을 특권의 도시로 만들고 그것을 독점하며 사는 특권 계급은
그 특권의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서울시장 출신이었고, 서울의 정서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리고 그러한 정서를 자극해 서울과 수도권의 지지에 힘입어 당선 된,
이명박 대통령이 이것을 모를리 없다.
아마 지방의 반대가 있을지언정, 수도권은 자신을 지지해 줄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대통령보다도 인기가 많으며 지지층도 견고한
박근혜 전대표와 야당의 강력한 반발,
그리고 세종시 문제의 대리자로 내세웠던 정운찬 총리의 예상외의 부진으로,
수도권 여론마저 얻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그래도 수정추진 여론은 ‘생각보다’ 높다).

더욱이 중요한 문제는 대통령이 뚜렷한 비전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서울의 특권과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도 포함)
수정추진론자들은 세종시가 충청권 표를 얻으려고 추진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모든 정치인의 정책은 표를 얻기 위한 정책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747, 반값 등록금 역시 표를 위한 정책이었다.
정치인이 표를 얻기 위한 정책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공익과 일치하느냐’이다.

나는 정치학을 배운 적이 없어 잘 모르지만 가장 좋은 정책이란
‘공익과 일치하면서 국민 개인의 이익(혹은 욕망)을 동시에 만족시켜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공익의 개념은 누구나 다르기 때문에 이것을 갖고 옳다 그르다 하긴 어렵다.
참여정부에서 세종시를 ‘공익과 일치하고 표도 얻을 수 있다’고 추진했다면,
이번 정부에서는 반대로 ‘공익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세종시를 ‘공익과 일치하고 표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공익과 표를 동시에 추구하겠다는 전략이지만,
‘공익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세종시 원안 추진을 이야기한 것은
명백한 ‘국민에 대한 기만’ 즉 거짓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내놓은 대안은 ‘서울의 특권은 나눌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과연 서울의 특권(경제, 교육, 정치, 행정) 중 하나라도 지방에 이전하지 않고서
국토 균형발전을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대기업과, 상위권 대학, 정치기구(국회), 행정기구가 서울에 있는 한,
기업 몇 개 내려가고, 의료 단지 몇 개 지방에 만든다고 해서
국토 균형발전이 될 리 만무하다.

즉 가장 큰 문제는 현 대통령과 집권여당은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문제의식도 희미하고,
대안도 없고, 의지도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공간적 계급적으로 특권층에 속하거나, 그 특권과 이해관계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있는가?
솔직히 비판은 했지만, 내가 뛰어난 행정가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고,
도시공학이나 행정학을 전공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추상적이라도 한 가지 원칙은 제시할 수 있을 듯하다.

서울의 특권을 나누는 쪽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울이 독점하는 경제적, 교육적, 행정적 특권을
지방에 나누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시 원안에는 행정부처 이전만이 제시되어 있지만,
대기업도, 교육기관도 지방으로 많이 이전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세종시만이 아니라 다른 지방 혁신도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특권층만이 아닌 특권을 욕망하는 서울시민들을 설득해야한다.
요원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사실 특권층으로의 편입을 욕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 대통령의 실정으로
특권층으로의 편입의 욕망이 얼마나 힘든지도 알게 된 듯하다.

생각해보면 내가 특권층으로 편입되는 것보다,
우리 모두가 조금 더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다.

내가, 내 자녀가 명문대를 나와서 대기업을 갈 가능성과
그저 그런 대학을 나와 중소기업에 취업할 가능성을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명문대를 나오면 대박나는 시스템과,
그저그런 지방대를 나와도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는 시스템 중
어느 것이 효과적인지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글이 다소 산만해졌지만
결국 세종시 문제는 서울의 특권에 관한 것이며,
그 특권에 편입하기 위한 욕망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결의 방안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있다.
Posted by beatles for s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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