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4.03.14 어머니의 수술 1
  2. 2020.09.03 어머니의 방문 1
  3. 2019.07.24 어머니의 가게
  4. 2018.07.24 어머니의 가게.

어머니가 어깨 수술을 받았다. 2017년에 오른쪽 어깨 수술을 받고 7년 만에 왼쪽 어깨 수술을 받은 것이다. 

어머니는 오랜 시간 식당을 하셨는데, 그때부터 어깨가 망가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식당을 하던 시절에는 쿠팡 같은 것이 없었다. 경기도 하남시에 살던 시절 어머니는 새벽부터 가락시장에 나가 장을 직접 봤다. 물론 운전도 직접 했다. 주변에 공사가 있을 때는 공사 현장에 음식을 납품하기도 했고, 저녁에는 동네 공장 노동자들을 상대로 술과 안주를 팔았다. 그야말로 새벽부터 저녁까지 계속되는 노동이었다. 이것을 수십년을 하다보니 어깨 근육이 망가진 것이다. 

어깨뿐이 아니다. 무릎과 허리는 오래전부터 안 좋았다. 그래도 젊은 시절에는 젊음으로 버텼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70대 중반의 나이는 - 아무리 100세 시대라고 해도 - 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언제나 걸음이 빨랐던 어머니는 이제 오래 걷는 것 조차 힘들어하신다.  거기에 여전히 동생의 쌍둥이 자녀들을 봐주고 있고, 집안일을 하다보니 예전 같은 강도 높은 노동이 아니라도 몸이 버틸 제간이 없다.  그 결과가 7년을 두고 받은 양쪽 어깨 수술이다. 

큰 수술도 위험한 수술도 아닌 것을 알지만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실 때 어딘가 모르게 아픈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수술을 받고 나와 회복 중이지만, 수면 마취가 덜 깨서 인지 힘들어 보이고, 난 그만큼 마음이 아프다. 어제 저녁부터 물도 마시지 못하는 금식 중이었기에, 배도 고프실테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오히려 나의 식사를 챙기는 모습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다. 이런 사랑은 어머니가 아니면 받을 수 없다는 생각뿐이다. 

병원에 있으면 아픈 사람도 많이 보지만, 나이 든 사람도 많이 보게 된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그 나이 든 사람들 중에 속하고, 그 중에서도 적지 않은 나이임을 느낀다. 가는 시간을 잡을 수도 없고, 그것이 순리라고 하지만 이런 날은 시간이 원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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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20년 9월 2일) 어머니가 노구를 이끌고 불고기와 두부조림, 오징어채무침을 해서 지하철을 타고 나에게 전해주고 갔다.

그냥 전화해서 가져가라고 하면 간단했을 것이다.

아니 동생이 가져다 준다고 했는데 거부하고 본인이 오신 것이다.

 

감사하다고 하면서도, 그냥 전화하지 그러셨냐고 한 마디 했다.

어머니는 비도 오는데 차로 오고가면 나나 동생이 차로 오면

오가는 동안 걱정을 할 것인데 그러느니 '안전한' 지하철을 타고 왔다고 했다.

 

누가 나를 이렇게까지 걱정할까 생각하면,

그리고 나를 생각해서 저 음식을 만들었을 정성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뿐이다.

오랜만에 불고기에 좋아하는 반찬들과 밥을 맛있게 먹었다.

요새 통 소화가 안 되서 밥을 많이 안 먹었는데, 밥도 두 그릇이나 먹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잘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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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부모님은 조그만 구멍가게와 식당을 같이 했다. 말이 같이 한 것이지, 그냥 같은 공간에서 과자와 음료를 팔고, 식당도 하고 그랬다. 물론 사는 집도 붙어 있었다. 방은 하나 혹은 두 개 뿐이었다. 아직 가난이 가난인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파는 음식도 다양했다. 붕장어(아나고), 산낙지, 족발, 심지어 개고기까지 어머니가 해보지 않은 음식은 없었다. 기본적인 안주도 물론 다했다. 물론 점심과 저녁에 밥을 주변 공장이나 공사현장에 납품하는 것이 컸지만, 밤에 소주 한잔 하려고 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우리집이 있던 곳은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 서울 강동구와 경계인 곳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아직 소규모 제조업이 살아 있던 시절이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젊은 공장 노동자들과 동네 아저씨들이 주로 손님이었다. 그들은 몇몇이서 오기도 했고, 혼자 오기도 했다. 결혼을 한 사람도 있었고, 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혼자 온 사람들은 주로 ‘누님’ 혹은 ‘누나’로 부르는 우리 어머니와 대화를 했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하기도 했다. 그들은 어머니가 바쁘면 그냥 혼자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다 취하면 ‘누님’ 혹은 ‘누나’인 우리 어머니에게 혼이 났다. 보통은 그냥 싫은 소리 몇 마디 듣는 것이었지만, 가끔은 정말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호되게 야단을 치기도 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그리 혼나고도 또 오는 그들이었다. 어린 나에게 자기돈 내고 욕먹어가며 다시 찾아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늘 문득 이유 없이 그때가 생각났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누나에게 혼나고 싶어 왔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지에서 서울로 올라와 기댈 곳 없는 낮선 곳에서 이야기 들어주고, 주정하면 혼내는 어머니는 그들에게 정말 누나 같은 그리운 존재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술을 마시던 그들은 지금의 나보다 대부분 어리거나 내 또래 정도였다. 지금은 가난을 알아 그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단호히 거부하겠지만, 문득 그 시절 작은 구멍가게와 함께 있던 식당 풍경이 떠오른다.

덧. 어머니가 이것을 어떻게 기억할지는 알지 못한다. 이것은 그냥 나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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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부모님은 조그만 구멍가게와 식당을 같이 했다. 말이 같이 한 것이지, 그냥 같은 공간에서 과자와 음료를 팔고, 식당도 하고 그랬다. 물론 사는 집도 붙어 있었다. 방은 하나 혹은 두 개 뿐이었다. 아직 가난이 가난인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파는 음식도 다양했다. 붕장어(아나고), 산낙지, 족발, 심지어 개고기까지 어머니가 해보지 않은 음식은 없었다. 기본적인 안주도 물론 다했다. 물론 점심과 저녁에 밥을 주변 공장이나 공사현장에 납품하는 것이 컸지만, 밤에 소주 한잔 하려고 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우리집이 있던 곳은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 서울 강동구와 경계인 곳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아직 소규모 제조업이 살아 있던 시절이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젊은 공장 노동자들과 동네 아저씨들이 주로 손님이었다. 그들은 몇몇이서 오기도 했고, 혼자 오기도 했다. 결혼을 한 사람도 있었고, 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혼자 온 사람들은 주로 누님혹은 누나로 부르는 우리 어머니와 대화를 했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하기도 했다. 그들은 어머니가 바쁘면 그냥 혼자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다 취하면 누님혹은 누나인 우리 어머니에게 혼이 났다. 보통은 그냥 싫은 소리 몇 마디 듣는 것이었지만, 가끔은 정말 저래도 되나싶을 정도로 호되게 야단을 치기도 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그리 혼나고도 또 오는 그들이었다. 어린 나에게 자기돈 내고 욕먹어가며 다시 찾아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늘 문득 이유 없이 그때가 생각났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누나에게 혼나고 싶어 왔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지에서 서울로 올라와 기댈 곳 없는 낮선 곳에서 이야기 들어주고, 주정하면 혼내는 어머니는 그들에게 정말 누나 같은 그리운 존재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술을 마시던 그들은 지금의 나보다 대부분 어리거나 내 또래 정도였다. 지금은 가난을 알아 그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단호히 거부하겠지만, 문득 그 시절 작은 구멍가게와 함께 있던 식당 풍경이 떠오른다.

 

. 어머니가 이것을 어떻게 기억할지는 알지 못한다. 이것은 그냥 나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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