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 문제

A Day in The Life 2023. 7. 12. 08:09

저출산이 어디 출산하면 집주고, 돈 좀 주면 해결되는 문제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왜 결혼을 하지 않는가?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결혼을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집과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하다. 그게 최소한이다. 그런데 집 값은 천정부지로 오른다. 이미 빚을 내어 집을 산 사람의 숫자가 어마어마하다. 이런 상황에서 집 값은 떨어져도 안 되고, 더 올라도 안된다. 지방과 농촌은 집 값이 싸다고 하는데, 그곳에는 일자리도 생활 인프라도 없다. 

더욱이 좋은 일자리도 없다. 대기업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수는 극소수다. 대기업에 들어가도 그 월급만 갖고 수도권에 집을 사는 것은 수 십년이 걸린다. 한국처럼 대기업, 중소기업의 임금격차가 큰 나라에서 중소기업에 들어간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젊은이들이 주식과 코인에 빠지는 이유이다. 

집을 살 수도 없고, 좋은 직장도 드물다. 결혼을 할 수가 없다. 

미래는 더욱 암울하다. 한국은 대학의 간판이 많은 것을 결정한다. 그런데 이미 소위 명문대 학생들의 대부분은 상류층의 자녀들이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계급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것이 '공부'였는데 그것도 이미 가진자들의 특권이 되어버렸다.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게 되는 이유이다. 나야 기왕 태어났으니 미래가 암울해도 살 수밖에 없지만. (그나마도 포기하고 자살하는 사람 비율도 한국이 1위다), 이 암울한 미래를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는 것이다. 심지어 교육비는 어마어마하게 들고, 그 교육을 위해서 부모들은 자신의 현재를 포기하게 된다. 부모가 행복하지 않은데 자식이 행복할 수 없다. 

좋은 미래를 물려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아이를 낳지 않게 된다. 

이런 사회 구조는 제조업 중심의 경제구조가 깨지면서 필연적이다. 선진국 경제의 중심은 금융, 첨단제조업, 콘텐츠 산업 등이고 우리나라도 점차 그렇게 가고 있다. 이런 경제 구조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전문성을 갖춘 인력들이다. 이런 인력은 대학 혹은 그 이상의 교육을 받아야 배출 가능하다. 예전 제조업 중심 사회에서는 중등교육만 받은 사람도 충분히 현장에 투입 되었지만 이제는 불가능하다. 아니 투입 되더라도 임금의 격차는 클 수밖에 없다. 

경제구조는 계속 변화하는데, 우리는 기존 사회 질서를 바꾸는 것에 소극적이다. 20세기 자본주의의 황금기에는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의 격차가 줄어들었지만, 이제 다시 그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자본수익이 훨씬 더 이익이 크다. 이것은 소득격차가 점차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 격차가 커지만 사회의 불안이 가중된다는 것이다. 그 격차가 어느 임계점을 넘으면 항상 커다란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것은 사회의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다. 

환경문제는 어떤가. 기상 이변은 벌써 일어나고 있다. 이제 40년을 조금 넘게 산 나도 기후의 변화를 체감 중이다. 다행이 나는 선진국 대열의 나라에 태어나 좋은 의료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날로 변화하는 지구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19 와 같은 팬대믹도 내 세대가 겪는 극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이다.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그런데 이 사회는 젊은이들의 이런 실패를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쉽게 돌려 버린다. 그러니 역대 최강의 스펙을 쌓은 젊은이들은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부족을 자책하고,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개인의 노력도 성공의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좌절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회의 실패다. 결국 저출산 문제는 한국 사회의 실패다. 

이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많은 대안들이 제시되었다. 소득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기본소득 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젊은 세대일 수록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위에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불평등한 젠더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페미니즘이 21세기 초반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물론 이중 그 무엇도 쉽게 받아드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강한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고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그것들이 다 옳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다만 논의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다른 대안들이 등장하지는 않을까? 

 

2022년 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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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변화와 공동체

Imagine 2022. 4. 22. 08:10

사회 변화와 공동체

공동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는 ‘운명이나 생활을 같이하는 조직체’이다. 크게는 지구 공동체, 인류공동체부터 작게는 마을 공동체까지 많은 단위의 공동체가 등장한다.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의 크기 혹은 내용에 따라 나서야 하는 공동체가 다를 수도 있다. 여기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마을공동체’이다.

농경사회에서 마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동체였다. 생활하는 공간이면서 일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을에서 태어나 살고, 마을 주변의 땅에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 ‘소농사회’가 형성하긴 했지만, 농사는 여전히 마을 전체의 힘을 필요로 했다. 마을은 그야말로 하나의 ‘공동운명체’였다. 좋던 싫던 이웃과는 평생을 함께 해야 했다. 자연히 끈끈한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산업사회에 접어들며 마을 공동체는 종언을 맞이한다.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이 분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부 자영업을 하는 사람과 일부러 직장을 집 가까이 잡거나, 직장 가까이로 이사를 간 사람이 아니면 일하는 곳과 사는 곳은 분리되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출퇴근이라는 개념도 산업화 이후의 개념이다. 직업공동체로서의 마을은 해체되었다.

그렇다고 마을공동체가 완전히 해체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기능은 교육이다. 마을 자체가 교육을 담당하진 않지만, 사는 곳을 기준으로 학교가 배정되는 현재의 시스템에서 마을은 교육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고 나누는 곳이다. 학군이 좋은 곳의 집값이 비싼 것은 이런 이유도 작용한다. 사는 곳과 교육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정한 성적을 올린 학생들을 모두 대학에 보내고 사는 곳을 기준으로 대학을 배정한다고 하면 관악구와 성북구, 서대문구의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다(그럴 일은 없을 것이지만).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공동체는 또 한 번 변화를 맞이한다. 소위 말하는 가족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산업화 사회까지는 –비록 농업사회 만큼은 아니지만 - 제조업 분야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부부가 2~5인까지 아이를 낳아도 이들은 모두 제조업 현장으로 흡수되었다. 정보화 사회는 다르다. 높은 기술을 필요로 하는 제조업은 점차 적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 스마트 팩토리화 되고 있고, 단순 가공을 하는 제조업은 제3세계로 ‘외주’를 준다. 일자리 자체가 줄어든다.

저성장 시대에는 이것이 가속화 된다. 저성장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세대는 혼자 벌어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하다. 둘이 벌어 둘이 사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둘이 벌어 셋을 부양하게 되는 것은 부담이 된다. 자연히 아이를 적게 낳기 시작한다. 결혼 자체도 꺼린다. 특히 여성들이 그렇다. 농경사회에서 정보화 사회까지 사회는 빠르게 변화해 왔지만, 문화는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인, 2인 가구가 늘어나는 것은 이러한 사회현상의 일환이다.

이렇게 마을공동체와 가족공동체는 점차 약화되어 왔지만, 인간은 여전히 다른 공동체에 속해 살고 있다. 직업 공동체인 직장은 여전히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공동체로 여겨진다. 취미활동을 위한 여러 모임들도 일종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학교도 일종의 공동체이다. 초·중·고등학교만이 아니라 대학교의 각 과들도 일종의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동아리는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은 공동체를 떠난 적이 없다. 속한 공동체가 바뀌었을 뿐이다.

코로나-19 이후로도 변화가 올까? 그럴 수도 있어 보인다. 학군 문제가 한 번에 풀리지는 않겠지만 온라인 교육이나 수업이 활성화 되면 학군의 중요성이 점차 낮아질 수 있다. 재택근무가 일상화 된다면,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이 다시 합쳐질 수도 있다(그것이 주거공동체와 직업 공동체가 일치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몰라도 사회적 거리두기, 생활방역 등이 일상화 되면 이전의 여러 오프라인 모임에도 변화가 올 수 있다.

문제는 제도가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저출산, 고령화는 4차 산업혁명이 되면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 저성장 기조가 유지되고, 일자리가 줄어드는 한, 단순한 캠페인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다. 아이를 많이 낳으면 분양을 유리하게 해주고, 출산 장려금을 주는 것은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 사회구조가 바뀌어서 생긴 일을 구조의 전환 없이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코로나-19가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다. 세상은 이미 변화하고 있었고 그것을 가속화 시켰을 뿐이다.

2020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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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이 ‘투자’에 나서는 이유와 저출산에 대한 짧은 생각.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진 사회 -

간단하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정당한 노동을 통해 버는 수입만으로는 좋은 일자리가 있는 서울에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한다. 심지어 ‘좋은 일자리’라는 것도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은 안정적이 되어야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에는 결혼, 출산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지금 많은 젊은이들이 계획을 세울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안정적인 교사와 공무원, 공사로 젊은이들이 몰리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직장에 취업할 수 있는 사람은 한계가 있다. 그러니 더 절망적이 된다. 결국 그들이 이제 그들이 계층을 이동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반전이 필요하다. 그것이 ‘비트코인’, ‘주식’에 투자하는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안정적인 직장이 없으니, 계획을 세울 수 없다. 결혼과 출산 등 인생의 큰 사건들은 계획 없이는 불가능하다. ‘저지르고 나면 해결된다.’는 사고방식은 고도성장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그것이다. 저성장 시대에 태어나 사는 젊은이들에게 계획 없이 저지르는 것은 그야 말로 인생을 건 도박일 수밖에 없다. 

출산은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아이를 낳아도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열심히 노동을 해서 구멍가계에서 건물주가 되었던 세대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내 자식에게도 지금 나의 삶을 물려줄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출산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 삶을 극복하고 더 나은 계층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바로 ‘투자’다. 

그러니, 젊은이들은 자신이 놓은 환경 속에서 정말 치열하게 본인들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는 입시에 시달리고, 대학에 들어가면 취업을 위해 영어는 물론 어학연수와 워킹홀리데이(이제는 힘들어졌지만), 자원봉사에 인턴까지 하는 그들의 삶에, 누군 노력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구조를 만든 것은 거대한 경제체제이고, 이미 세상을 더 많이 살아온 기성세대이다. 이 거대하고 오랜 기간 만들어진 구조가 단 번에 바뀌기도 어렵다. 이것을 바꾸는 일은 그것이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동안 사람들에게 바뀔 것이라는 믿음과, 조금씩이라도 바뀌어 가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면 최소한 지금처럼 절망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희망이 있으면 노력은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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