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변화와 공동체
공동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는 ‘운명이나 생활을 같이하는 조직체’이다. 크게는 지구 공동체, 인류공동체부터 작게는 마을 공동체까지 많은 단위의 공동체가 등장한다.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의 크기 혹은 내용에 따라 나서야 하는 공동체가 다를 수도 있다. 여기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마을공동체’이다.
농경사회에서 마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동체였다. 생활하는 공간이면서 일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을에서 태어나 살고, 마을 주변의 땅에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 ‘소농사회’가 형성하긴 했지만, 농사는 여전히 마을 전체의 힘을 필요로 했다. 마을은 그야말로 하나의 ‘공동운명체’였다. 좋던 싫던 이웃과는 평생을 함께 해야 했다. 자연히 끈끈한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산업사회에 접어들며 마을 공동체는 종언을 맞이한다.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이 분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부 자영업을 하는 사람과 일부러 직장을 집 가까이 잡거나, 직장 가까이로 이사를 간 사람이 아니면 일하는 곳과 사는 곳은 분리되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출퇴근이라는 개념도 산업화 이후의 개념이다. 직업공동체로서의 마을은 해체되었다.
그렇다고 마을공동체가 완전히 해체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기능은 교육이다. 마을 자체가 교육을 담당하진 않지만, 사는 곳을 기준으로 학교가 배정되는 현재의 시스템에서 마을은 교육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고 나누는 곳이다. 학군이 좋은 곳의 집값이 비싼 것은 이런 이유도 작용한다. 사는 곳과 교육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정한 성적을 올린 학생들을 모두 대학에 보내고 사는 곳을 기준으로 대학을 배정한다고 하면 관악구와 성북구, 서대문구의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다(그럴 일은 없을 것이지만).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공동체는 또 한 번 변화를 맞이한다. 소위 말하는 가족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산업화 사회까지는 –비록 농업사회 만큼은 아니지만 - 제조업 분야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부부가 2~5인까지 아이를 낳아도 이들은 모두 제조업 현장으로 흡수되었다. 정보화 사회는 다르다. 높은 기술을 필요로 하는 제조업은 점차 적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 스마트 팩토리화 되고 있고, 단순 가공을 하는 제조업은 제3세계로 ‘외주’를 준다. 일자리 자체가 줄어든다.
저성장 시대에는 이것이 가속화 된다. 저성장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세대는 혼자 벌어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하다. 둘이 벌어 둘이 사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둘이 벌어 셋을 부양하게 되는 것은 부담이 된다. 자연히 아이를 적게 낳기 시작한다. 결혼 자체도 꺼린다. 특히 여성들이 그렇다. 농경사회에서 정보화 사회까지 사회는 빠르게 변화해 왔지만, 문화는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인, 2인 가구가 늘어나는 것은 이러한 사회현상의 일환이다.
이렇게 마을공동체와 가족공동체는 점차 약화되어 왔지만, 인간은 여전히 다른 공동체에 속해 살고 있다. 직업 공동체인 직장은 여전히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공동체로 여겨진다. 취미활동을 위한 여러 모임들도 일종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학교도 일종의 공동체이다. 초·중·고등학교만이 아니라 대학교의 각 과들도 일종의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동아리는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은 공동체를 떠난 적이 없다. 속한 공동체가 바뀌었을 뿐이다.
코로나-19 이후로도 변화가 올까? 그럴 수도 있어 보인다. 학군 문제가 한 번에 풀리지는 않겠지만 온라인 교육이나 수업이 활성화 되면 학군의 중요성이 점차 낮아질 수 있다. 재택근무가 일상화 된다면,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이 다시 합쳐질 수도 있다(그것이 주거공동체와 직업 공동체가 일치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몰라도 사회적 거리두기, 생활방역 등이 일상화 되면 이전의 여러 오프라인 모임에도 변화가 올 수 있다.
문제는 제도가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저출산, 고령화는 4차 산업혁명이 되면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 저성장 기조가 유지되고, 일자리가 줄어드는 한, 단순한 캠페인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다. 아이를 많이 낳으면 분양을 유리하게 해주고, 출산 장려금을 주는 것은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 사회구조가 바뀌어서 생긴 일을 구조의 전환 없이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코로나-19가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다. 세상은 이미 변화하고 있었고 그것을 가속화 시켰을 뿐이다.
2020년 4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