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나의 사적인 예술가〉의 평들을 찾아보니 보니 젊은 예술가들의 꺼드럭거림에 대한 조롱(?), 그리고 ‘홍대병’이 치료됐다는 반응이 많다.
그런데 40대 중반을 지나다 보니 그런 조롱보다는 주인공이 느꼈을 당황스러움에 대한 동감과, 젊은 시절에나 부릴 수 있는 객기와 허세에 대한 일종의 부러움(?)이 느껴진다.
‘나도 저랬는데’라는 민망함과 ‘그래도 저럴 수 있을 때가 좋았지’라는 그리움 같은 것이랄까.
젊은이들에게는 아직 만들어가는 중인 ‘나의 세계’가 있다. 그래서 그것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싶어 한다. 반면 에드에게는 정직하게 살아온 세월이 이미 만들어놓은 ‘나의 세계’가 있다.
나이 들어 뜻밖에 찾아온 작은 명성. 잠시 그 인정에 도취되고 혼란스러워하지만, 에드는 결국 자신을 다시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결국 남는 것은 정직하게 살아온 세월이 만든 자기만의 세계이고, 어쩌면 예술은 그 삶 속에 남겨진 흔적이 아닐까.
나는 아직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 같고.
그러고 보니 이제는 조롱보다 연민을 더 많이 느끼는 나이가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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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역사 연구자의 정체성을 갖고 써보는 글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전번역원을 통합·이전한다는 안이 발표됐다. 성격과 역할이 다른 세 기관을 통합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점은 이미 여러 사람이 지적한 바 있다. '행정의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성격이 다른 기관을 한데 묶어 관리하는 것이 과연 '효율적'인지 모르겠다. 오히려 각 기관의 특성이 점차 사라지고, 그에 따라 전문성도 희미해질 가능성이 크다.
요새 하도 K-어쩌고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학'은 중요하다. 한국문화가 세계에서 이제 막 주목받고 있고 한국에 관한 관심도 높아지는 시점에, '한국학'이야말로 그 관심을 학문적으로 흡수하고 확장할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 그 탄생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 이미 수행하고 있는 해외 한국학 연구·교육 지원 기능을 더욱 확대해 전 세계 한국학의 거점 기관으로 기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어떤가. 한중일 삼국의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뭔가 같은 것 같지만 나는 미묘하게 다르다고 생각한다)는 날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역사는 정치의 도구가 아니지만, 역사가 국가 간 분쟁의 도구가 되는 것까지 피할 수는 없다. 한편으로는 정체성의 문제이고(동북공정 등), 한편으로는 근대 국민국가의 주권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독도 문제 등). 이런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서로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기관이다. 이 기관 역시 통합 과정에서 고유 기능이 축소되거나 우선순위에서 밀릴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고전번역원이 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한문을 'AI 딸깍'으로 번역하면 된다는 헛소리는 빼자. 일제강점기 이전의 문헌 대부분은 한문으로 되어 있다. 한글로 쓰인 문헌 역시 현대어와 다른 표기법과 어휘·문법 때문에 제대로 읽고 해석하려면 별도의 전문성이 필요하다. 그 많은 문헌을 제대로 번역하지 않고 그 시대를 연구하자는 것은 역사학뿐 아니라 문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어불성설이다. 갈수록 한문에 대한 관심이 줄고 전문 번역가도 귀해지는 시점에 지방 이전에 통합 논의까지 하고 있으니 한심할 따름이다.
효율은 그 가치를 지킬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다. 다이어트를 한다면 뱃살을 줄여야 하는데, 팔다리를 다 잘라내고 몸무게가 줄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몸무게를 줄이는 것 자체가 목표였다면 성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하려는 일이 그런 것인가.
한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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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길고양이를 둘러싼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시작은 생태계에 관한 문제였다. 길고양이가 야생조류를 포식하고 있으며, 특히 섬과 같은 고립된 생태계에서는 멸종위기종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유튜브 채널 ‘새덕후’는 마라도의 뿔쇠오리 사례 등을 근거로 현재의 길고양이 관리 정책이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했고, 논쟁은 중성화 후 방사(TNR)의 실효성, 길고양이 급식 제한, 나아가 적극적인 개체 수 조절과 살처분의 문제로까지 확대됐다. 실제로 새덕후는 최근 길고양이 문제가 마라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국가 차원의 보다 강한 개체 수 관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나는 생태학자가 아니다. 그래서 길고양이가 우리 생태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TNR이 효과적인지, 살처분이 필요한지를 논문 몇 편을 가져와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전문분야가 아닌 문제에서 몇 편의 연구를 골라 자신의 확신을 뒷받침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의 발언은 인상적이었다. 그는 길고양이가 새 개체 수 감소의 원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국내 연구가 충분하지 않으며, 다른 나라에서 나온 연구 결과를 한국 생태계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덕후로부터 직접 연락을 받고도 곧바로 의견을 내놓지 않았던 이유 역시 충분한 연구 없이 답을 단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새덕후는 연락한 적이 없다고 하고, 최재천 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지어낼 이유가 없으니 아마도 사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말을 ‘새덕후가 틀렸다’는 근거로 삼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반대다. 평생 생태학을 연구한 학자도 판단을 유보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왜 이렇게 빨리 확신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그다음이다. 우리는 그 확신을 가지고 토론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상대방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길고양이 문제도 그렇게 흘러갔다. 처음 질문은 비교적 분명했다. 길고양이가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현재의 개체 수 관리 정책은 효과가 있는가. 시민이 임의로 먹이를 주는 행위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 야생동물 보호와 동물복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나같이 쉽지 않은 질문들이다. 지역에 따라 조건도 다르고, 생태학뿐만 아니라 동물복지, 행정, 주민 생활권과 예산 문제까지 얽혀 있다. 그러니 당연히 여러 분야의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질문이 달라졌다. ‘어떤 정책이 더 효과적인가’가 아니라 ‘너는 어느 편인가’가 되었다.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들은 ‘캣맘’이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묶였다. 원래 길고양이를 돌보는 사람을 가리키던 말에는 어느새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며,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 자기만 선한 사람인 척한다는 이미지까지 따라붙었다. 개별적인 급식 행위의 적절성을 비판하는 것과 그 행위를 하는 사람 전체를 하나의 인간형으로 규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반대편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길고양이의 생태적 영향을 강조하고 적극적인 개체 수 관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느새 ‘고양이 혐오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새덕후 역시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이고 개인이 임의로 고양이를 해치는 행위를 주장한 것도 아니지만, 논쟁이 격화되면서 그 자신이 ‘고양이 혐오’의 상징처럼 취급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양쪽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주장에 대한 비판이 사람에 대한 평가로 바뀌고, 사람에 대한 평가는 다시 집단에 대한 혐오로 확장된다. 이 과정에서 논쟁의 대상은 점점 사라진다. 더 이상 TNR의 효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생태적으로 민감한 섬과 서울의 주택가를 같은 기준으로 관리해야 하는지도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중요한 것은 ‘캣맘이 문제인가’, ‘고양이 혐오자가 문제인가’이다. 복잡한 정책 문제가 인간에 대한 도덕적 판정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이번 논란과 함께 등장한 두 개의 국민동의청원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길고양이 급식 제한과 관리체계 강화를 요구하는 청원과 이에 반대하며 TNR 중심의 인도적 관리를 요구하는 청원이 모두 국회 심사 요건인 5만 명 이상의 동의를 받았다. 반대 청원에는 9만 명 가까이가 참여했다.
물론 청원은 시민의 정당한 정치 참여 방법이다. 그러나 두 개의 정반대 청원이 동시에 대규모 동의를 얻은 풍경에서 나는 숙론보다는 동원의 모습을 본다. ‘우리 쪽에는 이만큼의 사람이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우리 편의 숫자를 확인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새덕후가 울산에서 열리는 생태 관련 행사에 강연자로 초청됐다가 일부 동물보호 커뮤니티의 집단 민원 이후 강연이 취소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캣맘의 횡포’라며 다시 공격이 시작됐다. 초청 취소를 둘러싸고 또다시 양쪽의 여론전이 벌어졌다.
여기까지 오면 흥미로운 역설이 생긴다. 새덕후는 강연 취소 이후 “과학과 생태의 문제는 단순한 민원 숫자로 결론지을 사안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처음의 길고양이 문제 역시 숫자의 경쟁이나 강한 표현보다 더 긴 토론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물론 새덕후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도 온당하지 않다. 길고양이를 둘러싼 혐오는 그가 만든 것이 아니다. ‘캣맘’, 심지어 ‘털바퀴’ 같은 멸칭은 이미 오래전부터 온라인 공간에 존재했다. 그는 생태적 문제를 제기했고, 상당수 문제 제기에는 우리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내용도 있을 것이다.
다만 영향력 있는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에는 그 언어가 사회에서 어떻게 소비될 것인지에 대한 책임도 따른다. ‘고양이, 이젠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제목이나 ‘고양이만 소중한 캣맘’과 같은 표현은 복잡한 생태학적 문제를 설명하는 언어라기보다 사람을 어느 한쪽에 세우는 언어에 가깝다. 실제 의도가 혐오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미 길고양이를 둘러싼 감정적 갈등이 극심한 상황에서는 그런 표현이 기존의 혐오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소비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그의 최근 영상 이후 논쟁은 유튜브를 넘어 SNS와 국민청원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를 ‘고양이 혐오자’라고 규정하고 발언할 기회 자체를 막아버린다면 그것 역시 정확히 같은 방식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 혐오에 반대한다면서 상대방을 혐오의 대상으로 만드는 모순이다. 어쩌면 이 길고양이 논쟁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고양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보다는 우리 사회가 복잡한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에 관심이 간다. 복잡한 문제에는 대개 명쾌한 답이 없다. 서로 다른 가치가 충돌하고, 연구 결과도 일치하지 않으며, 지역과 상황에 따라 다른 해법이 필요하다. 그래서 토론에는 시간이 걸린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때로는 자신의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반면 혐오는 간단하다. 문제의 원인을 특정 집단에게 돌리면 된다. 길고양이 문제가 복잡하다면 ‘캣맘 때문’이라고 하면 된다. 살처분 논쟁이 불편하다면 ‘고양이 혐오자 때문’이라고 하면 된다. 순간적으로 세상은 이해하기 쉬워진다. 나와 상대가 나뉘고, 선과 악이 분명해진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고, 그 책임을 특정한 사람들에게 돌리고, 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은 뒤 도덕적으로 열등한 사람들로 규정하는 것.' 나는 이것이 혐오가 만들어지는 익숙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길고양이 논쟁이 낯설지 않다. 우리는 정치에서도, 세대 문제에서도, 젠더 문제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을 반복해서 본다. 구조와 제도와 이해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지만 특정 세대, 특정 성별, 특정 지역, 특정 정치집단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쉽다. 그러면 해결해야 할 문제보다 미워해야 할 사람이 먼저 보인다. 그 순간부터 논쟁은 필요 없어지기 시작한다. 상대는 설득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이겨야 할 사람이 되고, 그의 말에서 타당한 부분을 찾는 행위조차 우리 편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진다. 상대의 가장 극단적인 말을 가져와 전체 집단을 설명하고, 우리 편의 극단적인 행동은 일부의 일탈이라고 설명한다.
공론장은 그렇게 점점 좁아진다. 그래서 나는 이번 논쟁에서 누가 최종적으로 옳은지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길고양이가 한국 생태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 충분히 연구해야 한다. 생태적으로 특별히 민감한 지역에서는 그에 맞는 관리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시의 길고양이 문제 역시 주민의 생활권과 동물복지, 개체 수 관리가 함께 고려돼야 한다. 어느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지는 전문가와 행정, 시민사회가 근거를 가지고 논의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논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갈등이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이해와 가치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갈등은 당연하다. 오히려 민주사회에 필요한 능력은 갈등을 없애는 능력이 아니라 갈등을 견디면서 논쟁하는 능력일 것이다. 나는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상대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확신할 만한 근거가 아직 없다면 판단을 잠시 보류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태도인지도 모른다.
길고양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더 논쟁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서로를 혐오하기 시작한다면, 남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혐오뿐이라는 사실이다.
논쟁은 상대를 없애기 위한 과정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사회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우리가 건너뛰어서는 안 되는 것은 바로 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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