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율령제라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는 도중 생각이 막힌 적이 있다(자주 있는 일이다). 그러다 문득 현대 민주주의를 율령제와 비교해 보기로 하자고 생각했다. 매우 추상적인 민주주의는 민주정이라는 형태로 실현되는데, 그 민주정이 실현되는 형태는 다양하다. 동시대로(횡적으로) 보면 영국, 미국, 대한민국, 일본, 캐나다,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이 민주주의를 추구하며 민주정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 형태는 모두 다르다. 입헌군주제의 형태를 띄기도 하고, 양원제를 택하기도 하며, 일부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종적으로 봐도 민주정의 형태는 다르다. 내가 사는 대한민국만 봐도 1공화국부터 현재의 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헌법이 개정되었고, 그 법에 따라 민주정의 내용도 달랐다. 부통령이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비록 군사정권 이긴 했지만) 행정부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기도 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민주정을 이루는 헌법 역시 개헌의 논의가 – 비록 지금은 조금 시들해 지긴 했지만 – 진행 중이다. 

이렇게보면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는 이데올로기이며 이 이데올로기를 이루기 위한 정부의 형태로서의 민주정은 각 사회의 상황에 맞게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뿐, 어떤 완성된 형태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율령제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완성된 형태의 율령제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율령에 의한 통치라는 하나의 이상을 실행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 생각을 얼마 전 한 선배와 이야기 했더니, 학계에서는 이미 이렇게들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김민철, 2023, 창비)를 본 것은 이러한 고민을 하던 때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민주주의는 사실 정체(政體)라고 사용되기에 민주정(民主政)에 가까우며, 내용상으로는 인민이 통치를 한다는 의미에서 민치정(民治政)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의 역사는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움직임의 계속 발전해온 승리의 역사가 아니라, 엄청 혐오 받고, 경계 받으며, 배척되던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정치체제가 되었는가를 이야기 한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전에 민주정이 배척 받은 이유와 그것이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 가를 세심하게 추적하는 글은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엘리트들의 인민 다수의 덕성에 대한 불신,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최소한의 경제적인 평등(혹은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거대한 생각에 변화 속에서도 쉽게 바뀌지 않았던 여성에 대한 인식 등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시사점을 준다. 더욱이 저자는 마지막에 현재 많은 ‘민주정’ 국가들이 과연 ‘민주주의’을 실현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중요 직책들과 입법권자들은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선거로 뽑지만, 법관, 대부분의 고위관료가 시험에 의해 선발되는 형태가 과연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옳은 정체(政體)인가는 계속해서 많은 국가들이 고민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물론 저자도 말미에 썼듯, 완벽한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도 언급 했듯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민주정도 하나의 형태가 있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실현은 완성 불가능한, 그렇기 때문에 계속 노력해야하는 과제이다. 어쩌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가장 큰 적은 지금의 현실과 제도에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안주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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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이 한창 뜰 때 블록체인 기술을 살펴본 적이 있다. 여전히 이 기술에 대하 잘 알지는 못하지만 P2P방식을 기반으로 데이터를 소규모 데이터 '블록'에 나누어 저장하는 데이터 위변조 방지 기술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 기술의 사용 범위가 무궁무진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당장 내가 사용하는 질병관리청 쿠브 어플도 블로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위변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시중 은행 등 보안을 중시하는 곳에서는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고 들었다. 

가상화폐 중 상당수는 이런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탈중앙화'를 외치는 이들의 주장과 도전은 일부 정당해 보이기도 하고,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기반으로 한 가상화폐는 언듯 안전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난 처음부터 여기에 의문이 있었다. 

화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속이다. '금화'와 '은화'. '동전'을 사용할 때에도 그만큼의 금, 은, 동이 사회적으로 가치를 인정 받아야 한다. 예를 들어 금이 전혀 사회적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많은 양의 금화는 가치를 갖지 못한다. 심지어 금이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경우에도 재난이 벌어져 사회적으로 실물이 더 중요해 졌을 경우에도 역시 금은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한다. 

현대 화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있다. 지폐는 그야 말로 국가가 보장하는 종이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폐를 발행하는 국가는 지폐의 위조를 엄격하게 처벌하며, 방지를 어렵게 만든다. 국가의 신뢰도에 따라 각 국 화폐의 가치와 안정성도 달라진다. 이것이 소위 기축통화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이 어려운 시기에도 달러가 강세인 이유이다. 

가상화폐는 아직 어느 것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위변조가 거의 불가능하고, 때문에 사용가 간의 동의가 있으면 화폐의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가상화폐를 정말 화폐로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목적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화폐로 다시 바꿔서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것이다. 더욱이 가상화폐는 국가처럼 그 가치를 보장해주는 국가도 없다. 탈중앙화를 외치긴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치를 보장해주는 '중앙(국가)'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국가가 발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가 보장해 줄 수도 없다. 등락폭이 커도 통제할 중앙이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20세기 후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국경이 무너질 것이라 예측을 했지만, 21세기 중반으로 가는 지금 국경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으며, 국민국가체제 역시 흔들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애국주의와 국가주의는 몇몇 국가를 중심으로 더 확대되고 있다. 가상화폐라는 국경 없는 화폐의 실험이 내 예측을 비웃고 성공할 수 있지만, 지금으로서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2022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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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하경은 친구 진솔과 경주로 여행을 간다.  두 번. 한 번은 수학여행으로, 한 번은 둘이. 
두 번째 간 여행이 둘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그리고 혼자 온 경주. 거기서 하경은 20년만에 어린시절의 진솔을 만난다. 
진솔이 묻는다. “잘 지냈고?” 
하경이 답한다. “응, 잘 지내” 
그렇게 둘의 세 번째 여행이 시작된다. 
여행에 끝에 하경은 진솔에게 “또 보자”고 말하며 헤어진다.



나도 한 친구와 두 번 경주로 여행을 갔다. 
한 번은 24년 전 과 답사로, 
한 번은 21년 전 5명이 소규모로. 
그것이 그 친구와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혹, 혼자 하경처럼 경주로 여행을 간다면, 그래서 꿈 속에서라도 만난다면 되려 내가 묻고 싶다. 
“용담아 잘 지냈고?“ 
그러면 “응, 잘 지내”라는 답을 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잘 지내니까.


이제 우리 사진은 24년전 경주 남산에서 찍은 빛 바랜 사진뿐이다.


박하경 여행기가 주는 매력은 여기에 있다. 
여행에 대한 기억, 잃어 버렸던 것에 대한 향수, 
그러면서도 느낄 수 있는 현재의 소중함.


문든 현실이 싫어져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지만,
지금 내가 발붙이고 있는 현실이 없다면, 여행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짧지만, 즐겁고 정겨운 여행을 떠나는 시간. 

 

이 사진은 거의 25년 전 경주 남산에서 용담이와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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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니 지금도 가끔 두렵고 궁금한 질문이 있다. 하나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이다. 이 책의 저자인 룰루 밀러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인생의 의미를 물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들을 답은 뜻밖이었다. “의미는 없어” 그녀의 아버지는 신도, 계획도 내세도 운명도 없으며, 심지어 우주에서 인간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존재임을 역설한다. 그리곤 “그러니 너 좋을 대로 살아”라고 결론을 내린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우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나, 혹은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오늘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우주는 물론 우리 사회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저자는 그럼에도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 과정에서 사랑도 하고 이별도 했다. 그리고 이별의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다 찾아낸 사람이 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학자였다. 저자는 그의 자서전을 발견하고는 그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한다. 그는 스탠퍼드의 초대 학장이었고, 지금까지 알려진 어류의 1/5을 ‘발견한’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연구와 노력이 집약된 연구 샘플이 화재와 지진으로 두 번이나 크게 상실의 위기에 쳐했을 때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실을 표본에 직접 꿰매는 방법을 고안해 내기까지 했다.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그의 자세는 저자에게 큰 감명과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더 알아가는 순간 저자는 다시 혼란에 빠진다. 그는 우생학의 신봉자였다. 단순히 그가 우생학의 신봉자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과학자인 그가, 그가 그토록 신봉하며 따르던 과학의 근거들에 의지하지 않고, ‘믿음’에 근거하여 우생학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더 존귀한 생명체가 있으며, 인간 역시 더 귀한 존재가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믿음은, 그가 과학적으로 의지하던 다윈의 학설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결국 그의 이러한 믿음은 미국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결국 20세기 초반 미국은 다양한 방법으로 임신중절을 강요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러한 법은 지금도 완전히 사장되지 않고 남아 미국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오히려 다시 희망을 발견한다. 그에 의해 만들어진 정책의 희생자가 결국은 이 사회의 일원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리고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놓치는 일’이라는 다윈의 관점을 상기한다. 그러면서 세상의 다양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의미 없는’ 존재일 수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중요한 존재’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저자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사실은 학자로서 큰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후에도 그의 연구를 따라가며 친구인 캐럴 계숙 윤을 통해 또하나의 놀라운 사실과 마주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생물학적으로 볼 때 ‘어류’란 굉장히 모호한 관점이며, 하나로 묶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유럽인들이 아라비아반도,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의 여러 지역, 코카서스지역,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아시아인’으로 묶는 것, 혹은 모든 아프리카 대륙에 사는 사람들을 ‘아프리카인’으로 묶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물론 책에서는 어류와 관련해서 보다 과학적인 설명들을 제시한다). 기존의 분류(즉 비늘이 있고 척추가 있어 물속을 헤엄치는 동물을 어류로 묶는)는 직관의 영역일 수 있지만, 그것은 편리에 의한 것일뿐 과학적 사실은 아니라는 것 역시 이야기한다.

그러면 어류를 포기해서 얻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은 또 다른 세계이다. 어류라는 하나의 단위로 모든 물고기를 묶었을 때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들. 그리고 우리가 ‘물고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또 알지 못하는 것들은 무엇일까라는 지식에 대한 겸손 같은 것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이런 지적 호기심을 채워 주는 것 이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흥미로웠음을 밝힌다. 이 책은 저자인 룰루 밀러의 자서전이기도 하며, 데이비드 스터 조던이라는 사람의 평전이다. 동시에 과학교양서이자, 현재의 배우자와 가족에게 바치는 연애편지이다. 각주를 제외하면 28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에 이 모든 내용을 매우 흥미롭고 밀도 있게 담고 있다는 것은 저자의 놀라운 필력과 구성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추천.

#물고기는존재하지않는다 #whyfishdonotexist  #룰루밀러 #데이비트스타조던 #LuluMiller #DavidStarrJor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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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속, 비굴했던 나.

Imagine 2022. 12. 5. 01:04

완전 찝찝한 꿈이야기.

어떤 후보의 유세장에 갔던 것 같다. 어느 버스 앞을 지나가는데, 핸드폰이 떨어져있었다. 같이 갔던 사람(누군지 기억이 안난다)이 나에게 그냥 가다가 경찰한테 맡기고 가자고 했는데, 난 분명히 버스에 탄 사람 중 한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해서 버스에 올랐다.

버스 내부는 그야말로 럭셔리했다. 테이블이 곳곳에 놓여있고, 그곳을 둘러 의자가 놓여져 있는 버스였다. 내가 타서 핸드폰 주인 계신가요? 라고 묻자, 어떤 사람이 나를 제지하면서 핸드폰을 빼았았다. 그러더니 핸드폰 주인을 확인했다. 그러던 와중에 내 앞에 있는 어떤 여자가, '기사 출발하세요~'라고 말했다. 난 '잠시만요? 저 내려야 하는데요?'라고 하자 그 여자는 다시 '그냥 가세요'라고 말했다. 내부 분위기에 왜인지 모르게 위축된 나는 그냥 버스를 타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내부를 살펴보니, 앞에 서 뒤쪽을 바라보던 내 시아에서 보면 바로 앞에 뒤를 보고 앉아 있던 기사에게 출발을 하자고 했던 여자가 있었고, 그 테이블에는 딸로 보이는 여자도 있었다. 그 다음 테이블에는 역시 뒤쪽을 보고 앉아 있는 남자가 있었고, 20대로 보이는 예쁜 여자들이 5명정도 앉아 있었다.

버스가 한참을 가자, 집에 갈 생각에 불안해진 나는 다시 내려야겠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기사에게 출발하자고 말했던 여자가, '이 의원(솔찍이 이 의원은 이름까지 기억나는데 여기선 생략) 이 분에게 사례금 좀 주세요.'라고 말했다. 난 일단 사양했다. 핸드폰 주워준 것 갖고 무슨 사례냐고 하면서 여기가 어딘지 모르니 정 돈을 주시겠다면 택시비만 달라고 했다. 그 때 그 의원이 나를 보고 일어서며-이때 그 이름과 얼굴이 정확히 일치했다- 돈봉투를 건냈다. 얼핏봐더 두툼한 봉투였다.

난 잠시 갈등했다. 꿈이라 그래서일까,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는데도, 수표와 현금이 새 돈으로 두둑하게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얼핏봐도 1000만원 이상 된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20대 여자 5명, 그 여자의 딸, 내게 핸드폰을 빼앗았던 사람, 그 의원까지. 오직 그 여자만은 나를 처다보지 않았다. 솔찍히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의 시선 때문이었을까 난 다시 사양했다. '무슨 핸드폰인지는 몰라도, 그 핸드폰 찾아 준 것으로 이런 돈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이야기 했다. 그 의원이 다시 말했다. '그냥 받으세요! 정말로 안 받으실겁니까?' 난 다시 갈등했다. 갑자기 돈을 받아야할 모든 이유가 떠오르며 합리화가 시작됐다. 예를 들면 '이 돈이면 어머니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던 성지순례도 보내드릴 수 있다' 따위의..

결국 난 집에서 점점 멀어져간다는 궁색하고 비참한 이유를 대면서 돈을 받았다. 아마 그때 나를 보던 사람들은 '그럼 그렇치'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여자는 얼굴을 끝까지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돈을 받자 버스가 섰고, 나를 내려줬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왔는데, 결국 온 곳은 경기도 광주의 외각 쯤이었다. 광주는 여전히 나에게 낮선 곳이고, 난 그곳에서 택시를 잡으려 했다. 손에 봉투를 꼭 쥐고. 그러면서 다시 갈등이 생겼다. '내가 고작 이거 밖에 안되나? 그 의원실을 찾아가 돌려주자.'와 '이 돈으로 효도나 하자.'란 갈등. 그 와중에 택시는 잡히지 않았고, 난 여전히 봉투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 이후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갈등을 계속했던 느낌만 있다. 꿈에서 깨었을 때, 내 손에 역시나 봉투 따윈 들려있지 않았다.

꿈에서 깨어나 생각해보니, 무슨 비리를 덥어준 것도, 못볼 것을 본 것도 아니었는데, 그들은 왜 나에게 그리 큰 돈을 주었으며, 나는 그 돈 받는 것을 왜이리 부끄러워 하며 받으려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돈을 받을 때 사람들의 '그럼 그렇치'하는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201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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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작가가 쓴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었다.

빨갱이. 나는 이 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지만, 어린 시절 이 말을 들으면 왜인지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곤 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아이도, 저 단어를 내뱉는 사람들이 가진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저 적의에 가득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모른 체 두려움에 떨며 동조하며, 저 적의를 내재화했다. 저들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나도 '빨갱이'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 단어를 평생 꼬리표처럼 달고 살아온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삶은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이데올로기는 - 그것이 무엇이라고 -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도 쉽지 않았다. 조금 모자라고, 가끔은 찌질하고, 종종 우스워지고, 때로는 한심한 것이 우리들의 삶이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저런 모자람과 찌질함과 우스움과 한심함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미워도 하지만 끝내 서로와 부딪히며 산다. 평소라면 그것이 심해지면 '얼굴 안 보고 살면 그만'이었을 것이지만 어떤 시대에는 서로를 증오해서 죽이고야 말기도 했다. 그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수많은 '배신'을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한 사람이 겪어온 삶은, 적의에 가득 찬 '빨갱이' 딱지를 달면서도 그 신념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의 깨우침인지, 타협인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모를 무언가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들까지 고스란히 자신의 짐을 함께 져야 했기에, 그 마음의 짐을 또 스스로 지고 가야 했던 사람이 아니면, 저 생각을 단순히 '천성'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중 아버지는 죽음으로 해방되었다. 유물론자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는 없으니, 먼지에서 태어나 먼지로 돌아간 그에게 그사이의 삶이란 선택하지 않았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여러 관계와 선택을 강요 받는 감옥과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수많은 관계에서 때로는 싸우고, 때론 순응하지만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삶 말이다.

죽어서야 해방되었던 작중 '빨갱이' 아버지와 그를 둘러싼 여러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묘한 위로를 준다. 그는 '빨갱이'였지만 평범한 아버지였고, 남편이었고, 이웃이었으며, 형이었고, 삼촌이었다. 그런 그의 특수하지만 평범한 삶은, 죽음이라는 누구나 맞이하지만 아무도 경험담을 이야기할 수 없는 그 두려움의 세계가 모두에게 공평하며, 그곳에 도달하기까지의 삶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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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 선생님이 쓴 독립운동 열전을 모두 읽었다. 최근 굉장히 바빴는데, 책을 손에 쥔 후에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에서 손을 놓기 어려웠다. 결국은 쉬는 시간을 독서시간으로 삼았다. 


책의 내용 중 눈보다 마음에 들어온 것은 연구자가 가진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다. ‘잊힌 사건’과 ‘잊힌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결국 모두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일제강점기라는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어떤 고민을 했는지, 그 고민의 결과 그들의 행동이 어땠는지를 책은 생생하게 묘사한다. 마치 그 사람을 옆에서 보는 것 같다. 


소설이 아니기에 이런 묘사를 위해서는 수많은 사료가 기초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그 방대한 사료를 보고 정리한 것을 어떤 식으로 서술하여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은 필수적일 것인데, 그 고민은 대상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의 서술은 인물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객관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니 얼마나 많은 고민이 담겨 있는 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것 같다. 


10여 년 전 비오는 날 연구실에서 선생님과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당시 선생님은 그리스 비극과 희극을 읽고 계신다고 했다. 비극은 질 것을 알면서도 신에 맞서는 인간, 희극은 권력에 대한 풍자라고 말씀하시며, 독립운동가를 비극으로, 친일파 등을 희극으로 써 보고 싶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 책에는 그런 선생님의 고민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를 인문학이라고 한다. 결국 인간의 이야기이다. 다만 그 인간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살았던 사회경제적 조건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그들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 시대에 대한 연구자들의 고민과 문제의식도 분명해야 한다. 문제의식이 불분명하면, 이야기 하려는 바를 알기 어렵다. 사료에 대한 이해는 역사학의 기초이지만, 늘 어려운 과제이다. 그래서 가끔 스스로도 공부를 하다보면 길을 잃는다. 어떤 순간에는 사료를 놓치고, 어떤 순간에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망각하고, 그러다보면 인간을 빼먹는다. 


선생님의 『독립운동 열전』은 쉬운 문체로 재밌게 읽을 수 있지만, 그 무엇 하나 빠져있지 않았다. 문체는 쉽지만 생각할 거리는 많아, 여운도 깊게 남았다. 늘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책을 읽으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낀다. 그리고 책 속의 인물들의 고민과 행동을 곱씹으며 이 시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인 이유를 역시 이 책을 보며 새삼 느꼈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좋은 역사책이 주는 긴장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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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를 잃어버렸다(물론 꿈이다).

나는 다급히 문 밖으로 나갔는데, 집 밖으로 나가니 지금 사는 집이 아니라 전에 살던 집의 풍경이 펼쳐졌다. 그곳에 살 때 마리는 잠시 나와서 계단 밑에 숨은 적이 있어 그곳부터 찾아봤는데 없었다. 뭔가 조금 절망스러워 건물 밖으로 나갔는데, 엄청난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일단 주변을 살펴보는데 엄청 큰 동물들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처음보는 동물들이었다. 어떤 검은 동물은 등에 새끼 네 마리를 태우고 있었는데, 조금 귀엽게 생겨서 가까이서 보려고 하니 새끼들이 어미의 등 속으로 '뽕'하고 사라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마리를 찾기는 너무 힘들어 보였다. 그리고 멀리서는 호랑이 같은 맹수도 나에게 다가 오고 있었다. 

'마리가 잡아 먹혔을 수도 있겠다'라고 슬퍼하는 와중에 '나도 잡아 먹힐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도망갈 궁리를 하는데 집채만한 털복숭이 동물이 내 옆을 지나갔다. 털은 마치 드로드록스(일명 레게머리)를 한 것처럼 꼬여 있었는데, 나는 그 털을 붙잡고 그 동물에 바짝 붙어 그곳을 벗어났다. 

잠시 한숨을 돌리고, 하늘을 나는 동물과 이야기를 한 후(응?), 그 동물을 타고 하늘을 날으며 마리를 찾아 다녔는데, 역시 하늘에서 작은 마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 나는 하늘에서 내려와서 킵차크 반도 윗쪽 땅(거기는 왜..)에 내렸는데, 누군가 나에게 막 화를 냈다. 이 땅을 보호하기 위해 커다란 천을 반드시 덮어 두었는데, 내가 와서 흐트러졌다는 것이다. 나는 사과를 하는 와중에도 마리를 찾을 수 있냐고 물어봤는데, 그는 툴툴거리더니 이 천을 다시 피는 것을 도와 주면 자신도 찾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천을 펴다가 힘들어서 잠에서 깼는데, 마리가 옆에서 자고 있다. 허탈하기도 하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천을 같이 피던 사람이 정말 마리를 찾게 도와주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잠에서 아직 덜 깨서 조금 더 잠을 청하려는데, 마리가 간만에 뽀뽀를 한다. 꿈에서 고생해서 고맙다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프니 밥을 달라는 신호이다. 일어나지 않자 '야옹'거리기 시작한다. "내가 꿈이지만 너 때문에 무슨 모험을 했는 줄 알아?"라고 말해봤지만 소용이 없다.  

 

동그라미 친 곳이 저 땅을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가 천을 폈던 곳이고, 내가 흐트러트렸다고 혼나고 같이 다시 천을 폈던 땅이다. 아무리 꿈이라도 힘들만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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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변화와 공동체

Imagine 2022. 4. 22. 08:10

사회 변화와 공동체

공동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는 ‘운명이나 생활을 같이하는 조직체’이다. 크게는 지구 공동체, 인류공동체부터 작게는 마을 공동체까지 많은 단위의 공동체가 등장한다.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의 크기 혹은 내용에 따라 나서야 하는 공동체가 다를 수도 있다. 여기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마을공동체’이다.

농경사회에서 마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동체였다. 생활하는 공간이면서 일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을에서 태어나 살고, 마을 주변의 땅에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 ‘소농사회’가 형성하긴 했지만, 농사는 여전히 마을 전체의 힘을 필요로 했다. 마을은 그야말로 하나의 ‘공동운명체’였다. 좋던 싫던 이웃과는 평생을 함께 해야 했다. 자연히 끈끈한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산업사회에 접어들며 마을 공동체는 종언을 맞이한다.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이 분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부 자영업을 하는 사람과 일부러 직장을 집 가까이 잡거나, 직장 가까이로 이사를 간 사람이 아니면 일하는 곳과 사는 곳은 분리되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출퇴근이라는 개념도 산업화 이후의 개념이다. 직업공동체로서의 마을은 해체되었다.

그렇다고 마을공동체가 완전히 해체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기능은 교육이다. 마을 자체가 교육을 담당하진 않지만, 사는 곳을 기준으로 학교가 배정되는 현재의 시스템에서 마을은 교육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고 나누는 곳이다. 학군이 좋은 곳의 집값이 비싼 것은 이런 이유도 작용한다. 사는 곳과 교육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정한 성적을 올린 학생들을 모두 대학에 보내고 사는 곳을 기준으로 대학을 배정한다고 하면 관악구와 성북구, 서대문구의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다(그럴 일은 없을 것이지만).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공동체는 또 한 번 변화를 맞이한다. 소위 말하는 가족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산업화 사회까지는 –비록 농업사회 만큼은 아니지만 - 제조업 분야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부부가 2~5인까지 아이를 낳아도 이들은 모두 제조업 현장으로 흡수되었다. 정보화 사회는 다르다. 높은 기술을 필요로 하는 제조업은 점차 적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 스마트 팩토리화 되고 있고, 단순 가공을 하는 제조업은 제3세계로 ‘외주’를 준다. 일자리 자체가 줄어든다.

저성장 시대에는 이것이 가속화 된다. 저성장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세대는 혼자 벌어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하다. 둘이 벌어 둘이 사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둘이 벌어 셋을 부양하게 되는 것은 부담이 된다. 자연히 아이를 적게 낳기 시작한다. 결혼 자체도 꺼린다. 특히 여성들이 그렇다. 농경사회에서 정보화 사회까지 사회는 빠르게 변화해 왔지만, 문화는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인, 2인 가구가 늘어나는 것은 이러한 사회현상의 일환이다.

이렇게 마을공동체와 가족공동체는 점차 약화되어 왔지만, 인간은 여전히 다른 공동체에 속해 살고 있다. 직업 공동체인 직장은 여전히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공동체로 여겨진다. 취미활동을 위한 여러 모임들도 일종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학교도 일종의 공동체이다. 초·중·고등학교만이 아니라 대학교의 각 과들도 일종의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동아리는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은 공동체를 떠난 적이 없다. 속한 공동체가 바뀌었을 뿐이다.

코로나-19 이후로도 변화가 올까? 그럴 수도 있어 보인다. 학군 문제가 한 번에 풀리지는 않겠지만 온라인 교육이나 수업이 활성화 되면 학군의 중요성이 점차 낮아질 수 있다. 재택근무가 일상화 된다면,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이 다시 합쳐질 수도 있다(그것이 주거공동체와 직업 공동체가 일치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몰라도 사회적 거리두기, 생활방역 등이 일상화 되면 이전의 여러 오프라인 모임에도 변화가 올 수 있다.

문제는 제도가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저출산, 고령화는 4차 산업혁명이 되면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 저성장 기조가 유지되고, 일자리가 줄어드는 한, 단순한 캠페인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다. 아이를 많이 낳으면 분양을 유리하게 해주고, 출산 장려금을 주는 것은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 사회구조가 바뀌어서 생긴 일을 구조의 전환 없이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코로나-19가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다. 세상은 이미 변화하고 있었고 그것을 가속화 시켰을 뿐이다.

2020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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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파친코

Imagine 2022. 3. 31. 11:39

파친코
- 이민진, 문학사상, 2018 - 

1. 
많은 사람들은 그저 주어진 상황에 맞춰 열심히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상황’들을 조정한다. 제국주의, 식민지, 전쟁 등 수많은 ‘상황’들은 역사적 필연일 수도 있지만, 분명히 그것들을 결정하고 실행한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들 역시 주어진 상황에 맞춰 열심히 살아간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만든 상황이야 말로 인간사에서 말하는 ‘우연’일지도 모른다. 

2. 
이민진의 『파친코』를 읽은 것은 애플TV에 공개된 드라마를 먼저 본 이후였다. ‘1주일 무료’라서 구독하기 시작한 애플TV에는 총 8부작 중 3부까지만 공개되어 있었는데, 3부를 보고 난 후 그 이후의 일이 궁금해졌다. 책을 산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드라마가 잘 만들어져서일 수도 있겠지만 원작에 대한 호평 역시 일찍부터 들었고, 책을 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이 들었다. 전자책으로 살까 했는데, 전차책으로는 출판되지 않은 것 같아 종이 책으로 샀다.

3. 
부산에서 태어나 자란 훈이와 영진, 그 딸인 선자, 고한수와 이삭, 선자의 아들인 노아와 모자수, 모자수의 아들인 솔로몬, 책은 이 4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대한제국 말기에 태어나 평생을 가난하게 산 장애를 가진 훈이와 가난한 집 딸 영진은, 어렵게 낳은 딸 선자를 사랑으로 키운다. 선자가 강인하게 큰 것은,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운명에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던 것은 그 사랑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선자가 마주해야 할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4. 
선자는 오사카에서 크게 성공한 생선 중계인 한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아이를 갖는다. 하지만 한수는 결혼할 수 없는 유부남이었다. 돈이 많던 한수는 선자에게 풍족하게 살게 해줄 것을 제안하지만 선자는 이를 거부한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이삭이다. 목사인 이삭은 오사카로 가던 도중 죽을 고비를 넘긴다. 평생을 병약하게 살아왔고 때문에 결혼까지 거부해오던 그는, 이 과정에서 선자의 상황을 알게 되는데 이를 신의 뜻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진 선자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5.   
이후의 이야기는 선자와 이삭이 오사카로 이주한 후의 이야기이다. 본격적으로 재일교포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선자와 이삭이 자리 잡은 것은 이삭의 형 요셉과 그의 아내 경희가 사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수많은 차별이라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조선인이라 제대로 집을 구입할 수 없고, 좋은 곳에 취업할 수도 없으며, 취업해도 일본인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임금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그 사이에 노아가, 그리고 선자와 이삭의 아들인 모자수가 태어났다. 

6. 
부목사로 생계를 유지하던 이삭은 담임목사와 교회에서 일하던 후와 함께 ‘불령선인’으로 일본 경찰에 잡혀간다. 그리고 2년 넘게 옥고를 치르고 와서 얼마 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한다. 요셉은 관리직으로 취업을 하고 있지만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 있어 경희와 동생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부족하다. 결국 선자는 김치 장사를 시작하고, 경희가 이를 돕는다. 그리고 그들의 김치 장사는 입소문을 타서 결국은 꽤 많은 보수를 받고 큰 음식점에 납품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의 생계는 그렇게 지켜졌다. 

7.
하지만 생계를 지켜준 사람은 선자와 경희가 아니라 한수였다. 오사카에서 크게 성공한 한수는 식당 사장을 통해 선자와 경희, 그리고 자신의 아들 노아의 생계를 책임진 것이었다. 차별이 심한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자는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지켰다고 생각했지만 일본에서 조선인이 처한 상황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결국 선자의 가족이 1944년 이후 계속된 미국의 공습을 피해 안정적인 삶을 유지했던 것도 모두 한수가 미리 알려준 정보, 그리고 경제력 때문이었다. 

8.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차별은 계속 됐다. 노아와 모자수는 학교에서 계속 차별을 받았다. 똑똑한 노아는 한수의 도움으로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고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었지만, 공부에 관심이 없던 모자수가 할 수 있던 것은 파친코의 일이었다. 당시(그리고 지금까지도) 파친코는 ‘정상적인’ 취업이 어려운 재일조선인들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업이었고, 종종 야쿠자들과 연계되었기에 인식도 좋지 않았다. 사실 그 덕분에 재일조선인의 몫으로 남아 있었을지 모른다. 

9. 
노아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가 이삭이 아니라 한수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한수가 야쿠자와 연계되어 큰돈을 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나고야로 떠난다. ‘진짜 일본인’이 되고 싶었으나 될 수 없음을 알았던 노아는 성실한 아버지 이삭의 아들로 살고자 했지만 결국 그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성실했던 모자수는 캘리포니아를 가고 싶어 했던 유미를 만나 결혼해 아들 솔로몬을 낳았다. 그리고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파친코 사업자로 성공을 거둔다. 

10. 
떠난 노아를 찾은 것은 15년이 훨씬 넘어서였다. 노아는 나고야에서 철저한 일본인으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고 있었다. 노아를 찾은 것은 한수였고, 한수는 선자와 함께 노아를 찾아갔다. 노아를 만난 것은 선자뿐이었다. 노아는 선자와 헤어지며 곧 오사카로 찾아가겠다고 말했지만 그날 저녁 자살한다. 결국 일본인으로는 살 수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공한 사업가 모자수는 사고로 유미를 잃었지만, 아들 솔로몬을 미국 대학에 보내고, 영국계 은행에 취업시키는 것에 성공한다. 

11. 
솔로몬은 미국에서 남한계 미국인 피비를 만난다. 그리고 일본으로 온다. 그곳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살고 있으면서도 일본인들을 욕하는 피비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닌, 좋은 상사일 줄 알았던 사람들에 의해 이용당하고 버림받는다. 재일조선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피비와도 헤어진다. 역시 재일조선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본에서도 차별 받았지만 남한 사람과도 어울릴 수 없었으며, 미국인인 피비 역시 재일조선인들과 일본에서 살 수 없었다. 결국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솔로몬이 선택한 것은 아버지의 사업 파친코를 이어 받는 것이었다. 이것이 운명에 순응하는 것인지, 운명에 맞서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12. 
결국 모든 것은 상황이었다. 어떤 사람은 꿋꿋하게 살아남았고, 어떤 사람은 좌절을 했다. 여전히 재일조선인은 차별 받는 존재다. 『파친코』는 150년이 넘는 재일조선인의 이야기이자, 한국의 근대사이며, 이민자의 이야기이고 소수자의 생존기이다. 그리고 오늘, 모두가 맞이한 어떤 ‘상황’ 즉, 운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이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끝을 관통하는 선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선자야 말로 이 모든 운명을 굳게 견뎠다. 그 모든 것은 아버지 훈과 어머니 영진의 사랑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3.
어제 저녁에 책을 받아, 두 권을 단숨에 읽고 글을 쓴다. 번역된 책이지만 간결한 문체가 인상적이다. 재일조선인의 삶을 묘사한 저자의 취재가 치열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민자(그중에서도 재일조선인), 장애인이라는 차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두가 공감할 수 있게 쓴 능력 역시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남에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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