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 이민진, 문학사상, 2018 -
1.
많은 사람들은 그저 주어진 상황에 맞춰 열심히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상황’들을 조정한다. 제국주의, 식민지, 전쟁 등 수많은 ‘상황’들은 역사적 필연일 수도 있지만, 분명히 그것들을 결정하고 실행한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들 역시 주어진 상황에 맞춰 열심히 살아간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만든 상황이야 말로 인간사에서 말하는 ‘우연’일지도 모른다.
2.
이민진의 『파친코』를 읽은 것은 애플TV에 공개된 드라마를 먼저 본 이후였다. ‘1주일 무료’라서 구독하기 시작한 애플TV에는 총 8부작 중 3부까지만 공개되어 있었는데, 3부를 보고 난 후 그 이후의 일이 궁금해졌다. 책을 산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드라마가 잘 만들어져서일 수도 있겠지만 원작에 대한 호평 역시 일찍부터 들었고, 책을 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이 들었다. 전자책으로 살까 했는데, 전차책으로는 출판되지 않은 것 같아 종이 책으로 샀다.
3.
부산에서 태어나 자란 훈이와 영진, 그 딸인 선자, 고한수와 이삭, 선자의 아들인 노아와 모자수, 모자수의 아들인 솔로몬, 책은 이 4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대한제국 말기에 태어나 평생을 가난하게 산 장애를 가진 훈이와 가난한 집 딸 영진은, 어렵게 낳은 딸 선자를 사랑으로 키운다. 선자가 강인하게 큰 것은,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운명에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던 것은 그 사랑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선자가 마주해야 할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4.
선자는 오사카에서 크게 성공한 생선 중계인 한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아이를 갖는다. 하지만 한수는 결혼할 수 없는 유부남이었다. 돈이 많던 한수는 선자에게 풍족하게 살게 해줄 것을 제안하지만 선자는 이를 거부한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이삭이다. 목사인 이삭은 오사카로 가던 도중 죽을 고비를 넘긴다. 평생을 병약하게 살아왔고 때문에 결혼까지 거부해오던 그는, 이 과정에서 선자의 상황을 알게 되는데 이를 신의 뜻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진 선자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5.
이후의 이야기는 선자와 이삭이 오사카로 이주한 후의 이야기이다. 본격적으로 재일교포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선자와 이삭이 자리 잡은 것은 이삭의 형 요셉과 그의 아내 경희가 사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수많은 차별이라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조선인이라 제대로 집을 구입할 수 없고, 좋은 곳에 취업할 수도 없으며, 취업해도 일본인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임금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그 사이에 노아가, 그리고 선자와 이삭의 아들인 모자수가 태어났다.
6.
부목사로 생계를 유지하던 이삭은 담임목사와 교회에서 일하던 후와 함께 ‘불령선인’으로 일본 경찰에 잡혀간다. 그리고 2년 넘게 옥고를 치르고 와서 얼마 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한다. 요셉은 관리직으로 취업을 하고 있지만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 있어 경희와 동생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부족하다. 결국 선자는 김치 장사를 시작하고, 경희가 이를 돕는다. 그리고 그들의 김치 장사는 입소문을 타서 결국은 꽤 많은 보수를 받고 큰 음식점에 납품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의 생계는 그렇게 지켜졌다.
7.
하지만 생계를 지켜준 사람은 선자와 경희가 아니라 한수였다. 오사카에서 크게 성공한 한수는 식당 사장을 통해 선자와 경희, 그리고 자신의 아들 노아의 생계를 책임진 것이었다. 차별이 심한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자는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지켰다고 생각했지만 일본에서 조선인이 처한 상황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결국 선자의 가족이 1944년 이후 계속된 미국의 공습을 피해 안정적인 삶을 유지했던 것도 모두 한수가 미리 알려준 정보, 그리고 경제력 때문이었다.
8.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차별은 계속 됐다. 노아와 모자수는 학교에서 계속 차별을 받았다. 똑똑한 노아는 한수의 도움으로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고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었지만, 공부에 관심이 없던 모자수가 할 수 있던 것은 파친코의 일이었다. 당시(그리고 지금까지도) 파친코는 ‘정상적인’ 취업이 어려운 재일조선인들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업이었고, 종종 야쿠자들과 연계되었기에 인식도 좋지 않았다. 사실 그 덕분에 재일조선인의 몫으로 남아 있었을지 모른다.
9.
노아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가 이삭이 아니라 한수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한수가 야쿠자와 연계되어 큰돈을 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나고야로 떠난다. ‘진짜 일본인’이 되고 싶었으나 될 수 없음을 알았던 노아는 성실한 아버지 이삭의 아들로 살고자 했지만 결국 그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성실했던 모자수는 캘리포니아를 가고 싶어 했던 유미를 만나 결혼해 아들 솔로몬을 낳았다. 그리고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파친코 사업자로 성공을 거둔다.
10.
떠난 노아를 찾은 것은 15년이 훨씬 넘어서였다. 노아는 나고야에서 철저한 일본인으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고 있었다. 노아를 찾은 것은 한수였고, 한수는 선자와 함께 노아를 찾아갔다. 노아를 만난 것은 선자뿐이었다. 노아는 선자와 헤어지며 곧 오사카로 찾아가겠다고 말했지만 그날 저녁 자살한다. 결국 일본인으로는 살 수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공한 사업가 모자수는 사고로 유미를 잃었지만, 아들 솔로몬을 미국 대학에 보내고, 영국계 은행에 취업시키는 것에 성공한다.
11.
솔로몬은 미국에서 남한계 미국인 피비를 만난다. 그리고 일본으로 온다. 그곳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살고 있으면서도 일본인들을 욕하는 피비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닌, 좋은 상사일 줄 알았던 사람들에 의해 이용당하고 버림받는다. 재일조선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피비와도 헤어진다. 역시 재일조선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본에서도 차별 받았지만 남한 사람과도 어울릴 수 없었으며, 미국인인 피비 역시 재일조선인들과 일본에서 살 수 없었다. 결국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솔로몬이 선택한 것은 아버지의 사업 파친코를 이어 받는 것이었다. 이것이 운명에 순응하는 것인지, 운명에 맞서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12.
결국 모든 것은 상황이었다. 어떤 사람은 꿋꿋하게 살아남았고, 어떤 사람은 좌절을 했다. 여전히 재일조선인은 차별 받는 존재다. 『파친코』는 150년이 넘는 재일조선인의 이야기이자, 한국의 근대사이며, 이민자의 이야기이고 소수자의 생존기이다. 그리고 오늘, 모두가 맞이한 어떤 ‘상황’ 즉, 운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이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끝을 관통하는 선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선자야 말로 이 모든 운명을 굳게 견뎠다. 그 모든 것은 아버지 훈과 어머니 영진의 사랑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3.
어제 저녁에 책을 받아, 두 권을 단숨에 읽고 글을 쓴다. 번역된 책이지만 간결한 문체가 인상적이다. 재일조선인의 삶을 묘사한 저자의 취재가 치열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민자(그중에서도 재일조선인), 장애인이라는 차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두가 공감할 수 있게 쓴 능력 역시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남에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