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풀니스

(한스 로슬링이 올라 로슬링과 안나 로슬링 뢴룬드와 함께 지음, 이창신 옮김 2019, 김영사)

 

우리는 세상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책은 세상에 대한 13가지 물음으로 시작한다. 나도 풀었는데, 2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맞추지 못했다. 그 대부분은 저자의 지적대로 내가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뒤이어 이에 대한 위안(?)을 줬는데, 대부분의 선진국사람들이 나와 같다는 것이었다. 저자인 한스 로슬링은 이 책에서 사람들이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추적하는 동시에, 세계에 대한 오해를 풀어간다.

 

저자는 인간들이 세상을 잘못 이해하는 이유를 10가지 본능instinct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간극 본능, 부정 본능, 직선 본능, 공포 본능, 크기 본능, 일반화 본능, 운명 본능, 단일 관점 본능, 비난 본능, 다급한 본능이 그것이다(읽어 보면 알겠지만 여기서의 본능은 타고난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것이다). 이것은 각 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여기에 사실충실성 실현하기가 포함되어 총11개장으로 목차가 구성된다.

 

간극 본능에서는 인간 세상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하 개도국)으로 나뉘었을 것이라는, 이렇게 세상에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하는 잘못된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구분법은 30~50년 전에는 유효했을지 모르지만, 현재는 전혀 유요하지 않다는 것을 저자는 여러 데이터를 통해 보여준다. 대신에 세계를 4단계 소득집단으로 구분하는데, 이것은 국가별 집단이 아니라 국가와 관련 없이 개인(혹은 가계)의 소득으로 구분한 것이다. 저자는 국가가 다르더라도 소득 수준이 같은 사람끼리는 비슷한 생활을 하는 것을 지적했다. 특히 평균의 함정, 극단의 비교에 대해 매우 경계한다.

 

부정 본능에서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별적 보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좋은 소식은 뉴스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뉴스만 보면 세상은 온갖 나쁜 일로 가득하지만 사실 좋은 일이 더 많다. 다만 보도 되지 않을 뿐이다. 심지어 점진적인 개선 역시 뉴스가 되기 힘들다. 때문에 사람들은 보다 부정적인 보도만 접하게 된다. 거기에 점점 개선되는 상황이라도 현 시점에서 나쁠 수도 있다. 이런 모든 사례들이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직선 본능에서는 보여주는 그래프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류는 18세기 이후 급격하게 성장해 왔지만, 앞으로도 그런 추세대로 성장할 가능성은 적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현재까지의 추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성장 및 하강 그래프는 직선뿐만 아니라 S, 낙타 혹, 미끄럼틀, 2배 증가 곡선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래프의 어느 부분을 보느냐에 따라서 S자 곡선이 직선으로 보이기도 한다. 저자는 세상을 보다 폭넓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포 본능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공포를 느끼는 현상에 대한 분석이다. 저자가 대표적인 것으로 꼽은 것이 DDT이다. 초기 해충을 죽이기 위해 개발되어 획기적으로 유행했던 DDT는 이후 일부 확인되지 않은 부작용이 인간에게까지 미치고 있다고 믿게 되었고, 결국 DDT의 사용은 금지됐다. 하지만 2006년 세계보건기구의 발표에 따르면 DDT미약하게 해로운물질로 분리됐다. 테러도 마찬가지다. 테러로 죽는 사람은 극히 일부이지만, 그 공포는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공포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판단을 유도한다.

 

크기 본능은 숫자가 왜곡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니세프에 따르면 2016460만 명이 1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엄청난 숫자이다. 이것만 보면 세상은 너무 끔찍하다. 하지만 1950년도에는 1440만 명이 1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66년 동안 1000만 명이 덜 죽게 된 것이다. 440만 명이라는 숫자는 앞으로도 더 줄어야 하지만, 추세로 본다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심지어 1950년도와 2016년의 인구를 비교해 보면 1세 이하 인구의 사망률은 극적으로 줄어든 것이다. 단순히 숫자의 크기만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은 오류를 초례 할 수 있다. 저자는 숫자를 비교하고, 나눠보기를 추천한다.

 

일반화의 본능은 인류가 가장 쉽게 범하는 오류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범주화하고 일반화 한다. 이것은 유용하기도 하지만, 세상을 왜곡하기도 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일반화는 아프리카에서 찾을 수 있다. 아프리카는 54개국 10억 명이 사는 거대한 대륙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프리카의 문제를 단일한 것으로 본다. 동남아시아의 문제를 한국이나 일본의 문제, 혹은 카자흐스탄의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 저자는 집단 안의 차이, 집단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 등을 면밀하게 살필 때만이 일반화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운명 본능은 사람, 국가, 종교, 문화가 각각 특성이 있고, 그것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믿음이다. 무슬림들은 출산율이 높을 것이라는 믿음, 아프리카는 서구 사회를 경제적으로 따라 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 등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잘못됐음을 수치를 통해 보여준다. 이슬람 국가에서도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고, 아프리카는 서구사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당장 할아버지와 손주들이 생각하는 상대의 운명은 다르다. 이런 특정한 문화와 종교 등에 대한 편견은 세상을 보는 시아를 한정할 것이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단일관점 본능은 전문가에 대한 경고처럼 보인다. 전문가는 어느 특정 분야를 통해 세상을 보고, 그 분야에 대해 존중받아야 하지만 다른 모든 분야를 그 관점에서 해석하려 할 때는 문제가 생긴다는 점을 경고한다. 시장 경제의 발전, 인권 문제, 민주주의의 적용 여부 가운데 어느 하나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는 것은 비단 저자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매우 위험해 보인다.

 

비난 본능은 어떤 문제에 대해 비난의 대상을 찾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저자는 수업의 사례를 든다. 수업에서 저자가 거대 제약회사가 말라리아, 수면병과 같은 가나난 사람만 공격하는 질병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다고 하자, 한 학생은 이들 제약회사를 비판한다. 하지만 비판의 대상을 끝까지 찾아가면 비판의 대상은 (그 학생의 조부모일지도 모르는) 스웨덴의 은퇴자들이다. 끝까지 정확하게 원인을 밝혀서 비판하자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다. 비판이던 칭찬이던 시스템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저자는 지적한다. 사실 누군가를 악당으로 만든다고 나쁜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급한 본능은 어떤 문제를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긴 시간동안 파생된 문제는 보통 짧은 기간 동안 해결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활동하는 시간, 혹은 내 당대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행위는 자칫 세계관을 왜곡할 수 있다. 어떤 문제가 급박하다고 여겨질 때에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정확한 데이터를 찾아서 살펴보고 함부로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을 피하라고 저자는 충고한다.

 

마지막 장은 사실충실성 실천하기이다. 저자는 정확한 사실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여러 가지를 제안하는데, 특히 강조한 것은 겸손과 호기심이다. 겸손은 본능으로 사실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것이고, 지식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호기심이란 새로운 정보를 마다하지 않고 적극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한다. 세상은 넓으니 당연히 내가 모르는 지식이 있고, 또 알던 지식도 바뀔 수 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사실충실성 실천이다.

 

의도한 바이겠지만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보다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겸손과 호기심의 부족이라고 이야기한 샘이다. 왜곡되거나 잘못된 데이터 표본, 과장된 공포, 상대에 대한 편견, 내가 가진 지식의 한계(나는 인지하지 못하지만), 조급함 등은 가장 뛰어난 지식인들조차 세상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힘은 정확하게 세상을 바라볼 때 생긴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바로 여기 있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이 책을 읽으면서 반성을 많이 했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는 데이터에 기반한 것도, 대단한 철학을 기반으로 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편견과 조급함, 편협한 지식에 사로잡혀 세상을 해석하려 했던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 이 책에 감사한 부분도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고 했지, 지금 세상이 만족할만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책을 완전히 마무리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책은 그의 아들 부부에 의해 마무리 되었다. 이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도 남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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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많이 듣는 소리가 있다. 요새 젊은이들은 자기 부모들보다 못 사는 최초의 세대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경제는 언젠가부터 항상 어렵다. 경제성장률은 점점 줄어들어서 이제 2%정도에 머물고 있다. 호황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기억은 초등학교 무렵쯤이었던 것 같다. 가끔 대기업에서 엄청난 영업이익을 내서 성과급 잔치를 했다는 뉴스를 보지만 남의 이야기다. 20~30대는 취업에 목숨을 건다. 안정된 직장인 공무원, 교사가 가장 인기 직종이 된 지 오래다. 자살률은 OECD에서 항상 최상위권을 유지한다. 90년대 이후 정권은 계속 바뀌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까지 비교적 보수적인 정권과 진보적인 정권이 번갈아 들어섰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경제문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이쯤 되면 새로운 문제제기와 해답이 필요하다. 수축사회의 저자 홍성국은 이 원인을 ‘수축사회’에서 찾는다.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장경덕 외 옮김, 2014, 글항아리)에서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이례적인 성장이 이제 끝났음을 지적했다. 저자 역시 지난 500년의 성장은 이제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구가 줄면 수요가 줄고, 수요가 줄면 기업의 생산량도 같이 줄어야 하며, 일자리는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은 이런 추세를 가중 시킬 수도 있다. 소위 스마트 팩토리는 효율성을 극대화 하면서도, 인력을 사용은 최소화한다.. 인류 전체의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지금까지 벌어졌던 플러스섬게임의 시대는 끝나고 제로섬게임의 시대가 왔다. 플러스섬게임 시대에는 승자는 많은 것을, 패자도 약간의 이익을 가져갈 수 있었지만, 제로섬게임의 시대에는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간다. 국가, 기업, 개인 모두 극단적인 이기주의 체제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트럼프의 미국우선주의 역시 수축사회 진입의 신호로 본다. 적과 아군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약간 남아 있는 팽창지역에 모든 것이 몰리는 집중화 현상도 일어난다. 한국의 강남, 미국의 캘리포니아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니 인간은 불안에 하고 우울증 등 각종 정신질환에 시달린다.

 

미국, 유럽, 중국 등은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양적완화, 저금리, 적자를 감수한 경기부양책 등을 사용했다. 팽창사회였으면 충분히 효과를 봤을 이런 정책은 기축통화국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에서는 큰 효과가 없었다. 아직도 경제성장률이 높은 후발개도국은 사회적 신뢰, 도덕적 가치의 붕괴 등 사회적 자본의 부족으로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중국과 인도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많은 인구는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사회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마냥 좋다고만 할 수도 없다. 요컨대 전세계가 수축사회에 접어든 것이다. 다 같이 성장할 때에는 중산층도 같이 성장할 수 있었지만, 성장이 멈추면 자본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부가 집중된다. 양극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한국도 피해갈 수 없다. 요새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즉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는 행동)은 계층 이동이라는 희망의 사다리가 사라진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세계는 수축사회로 접어들었지만, 팽창사회에 살았던 사람들의 해법은 여전히 팽창사회적임을 저자는 지적하며, 그것으로는 수축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저자는 수축사회의 충격은 있을 수밖에 없고, 가능하다면 이것을 연착륙 시키는 것이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한다. 원칙적이며 투명한 사회 넓은 시야를 갖고 멀리 보며, 미래에 집중 선택과 집중을 통한 창의성 개발 반대 트렌드를 읽고, 독점을 피하는 등 남다른 무기 보유 새로운 조직문화와 미래형 리더의 발굴이다. 언 듯 보면 너무나 당연한 교과서적인 해법이지만 항상 답은 교과서 안에 있었다. 문제는 교과서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일 뿐.

 

세계가 저성장 구조로 들어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저금리, 저성장, 저물가를 뉴노멀(New normal), 즉 새로운 경제적 표준이라고 이야기하게 된 것은 이미 2008년의 일이다(단어 자체는 2000년경에 등장했다). 빚으로 만들어진 경제에서 아무도 고금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2008년 금융위기는 저자에 의하면 수축사회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서브프라임모기지라는 빚잔치의 위험함을 몸소 보여줌과 동시에, 금리 인상이 빚으로 세워진 금융(더 나아가 경제)에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사회의 권력을 잡고 있는 50대 이상(더 넓게 잡으면 40대 이상)은 팽창사회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평생 살아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부동산 불패 신화도 여기서 기인한다(물론 저자는 서울 등 특정 지역의 집중화로 인한 집값 상승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빨리 이 신화에서 깨어나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문득 어제 읽은 90년생이 온다(임홍택, 2018, 웨일북)의 90년(대)생은 태어나서 기억이 생긴 그 이후부터 단 한 번도 팽창사회에 살아보지 못한 세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80()생과도 다른 또 다른 문화를 갖게 된 것은 아닐까. 팽창사회의 해법으로는 90년생은 물론 00년생, 10년생에게도 희망을 주는 것에 실패할지도 모른다. 사회의 패러다임은 가랑비에 옷이 젖듯, 낮의 길이가 계절에 따라 알 수 없을 만큼 조금씩 바뀌듯 바뀌어 바뀌는 그 순간에는 알 수 없을지 모르나, 알게 된 그 순간에는 이미 많이 늦어서 감기에 걸릴 수도, 너무 어두워져 있을 수도 있다. 새로운 시대를 모두가 준비할 필요도 없고, 젊은이들에게는 특히 그럴 여유가 없다. 누구 말대로 세상을 망칠 기회조차 갖지 못한 것이 지금의 젊은이들이다. 이들이 살아갈 새로운 세상에 대한 준비야 말로 기성세대의 책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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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생이다. 90년생과는 딱 10년 차이가 난다. 물론 이 책에서 이야기 하는 90년생은 정확히 말하면 ‘90년대 생이니, 주인공들은 나와 10~20살 정도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다. 82년생인 저자는 80() 생과 90() 생을 각각 웹(web)세대와 앱(app)세대로 구분한다. 이 구분에는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에 처음 접근 가능했던 나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사용 시기 등이 고려됐다. 사실 이런 세대 구분은 모호한 경우가 많다. 80년대 생도, 이 책에 등장하는 90년대 생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고, 90년대 생 가운데서도 70년대 생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작은 직장이지만 직장에서, 그리고 강의하면서 만났던 90년생들(2000년생이 입학한다!!)이 나와 다르다는 생각은 많이 해봤고, 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고자 이 책을 선 듯 집어 들어 계산했다.

 

책은 읽기 쉽다. (최소한 내 생각에는)정독을 요하는 책은 아니다. 나는 끝까지 읽는데 세 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책은 90년생에 대해 여러 가지로 분석한다. 이들은 다양한 줄임말을 사용하고, 긴 글을 참지 못하는 간단함을 지향하며, 기성세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병맛드립을 즐기는 등 재미있음을 추구하며, 입시, 취업 등 다양한 경쟁에 노출되어 있는 만큼 과정의 정직(integrity)을 요구한다.

 

이들은 직장에서도 자신의 권리를 요구한다. 9시에 근무가 시작이면 9시까지면 나오면 된다는 생각이다. 10분 먼저 나온다고 10분 먼저 보내주는 것도 아니며, 자신은 근로계약서에 9~18시로 노동 시간을 계약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칼퇴라는 말도 부정적이다. ‘칼퇴라는 용어 자체가 존재하면 안 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충성의 대상은 기업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다. 처음부터 평생직장은 꿈꾸지 않기 때문에, 기업에 충성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고, 기업과 자신이 같이 성장한다는 믿음도 없다(기업이 그런 믿음을 개인에게 주지 못했다). 당연히 강한 강제와 통제로는 이들을 통제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들을 배제할 수도 없다. 이들이 미래이기 때문이다. 알리바바의 창립자 마윈은 젊은 세대를 믿으라라고 말했고 실제로 회사 임원의 97%70~80년 생으로 임명했다. 기업과 사회는 90년생 인재를 유혹하고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90년생은 소비의 패턴도 다르다. 이들은 호갱(호구 고객)’이 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국내 기업들이 외국보다 자국에서 더 과도한 이익을 챙기는 것을 참지 못한다. 이것이 나타난 것이 직구현상이다. 이들은 제품이나 회사에 대한 불만을 제조회사에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SNS에 올린다. 이제 기업은 고객이 접수하는 불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불만까지 찾아가서 들어야 한다. 간단하고 직관적이며, 정직한(소비자를 속이지 않는) 제품을 찾는다. 이런 의미에서 소비에서도 90년생은 새로운 세대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고, 가지 않는 부분도 있다. 90년생의 직장생활은 내가 회사에서 느끼는 그대로이기에 많이 공감하고, 반성도 했다. 하지만 소비 패턴 분석에 들어오면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이것은 90년생의 특징이 아니라 80년생 이후라면 모두 지향하고 있는 소비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터넷과 그를 통한 새로운 네트워크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편이 옳다. 물론 90년생이 이것들을 가장 잘 활용하겠지만..

 

마지막으로 아쉬운 것은 사회전반의 변화와 맞물려 90년생을 설명하면 좋았을 것이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이를 잠깐 언급하기는 하지만, 90년생이 저자가 말하는 특성을 갖게 된 것은 사회경제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수축사회(홍성국, 2018, 메디치북스), 21세기 자본(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2014, 글항아리) 등에서 지적하듯, 90년생이야 말로 인류의 이례적 성장이 끝나고, 다시 저성장 사회로 들어온 사회를 정면으로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분석이 너무 길면 재미가 없겠지만, 최소한 이들이 왜 이렇게 생각하는 지에 대한 분석은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생이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심지어 90년생을 대상으로 어떤 마케팅이 효과가 있을지, 이들에게 매력적인 직장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등 자세하진 않아도 일종의 대안까지 제시한다. 언제나 기성세대는 새로운 세대를 이해하지 못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그것은 변한 적이 없다. 그런데 권력은 항상 기성세대가 갖고 있고, 갈등은 그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항상 새로운 세대가 이겼다. 그들이 미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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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야기

Imagine 2019. 9. 5. 08:42

꿈이야기.

전쟁이났다. 
난 주의 사람들과 함께 근처 학교로 피신해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에게는 총이 주어져있었는데, 
더 이유는 알 수 없게 총알은 주어지지 않았다.

학교 창 밖으로 포격 소리가 들리고 총알이 교실로 날아 들었다.
난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포복으로 총알을 구하러 상황실을 찾아 나갔다.

가다가 한 미군을 만나 총알을 달라고 하려 했는데,
총알이 영어로 뭔지 기억이 안났다(이런 쓸때 없는 디테일이란..).

그 미군은 총의 '공이'를 분해 하는 방법을 나에게 설명해줬는데,
불행이도 난 꿈 속에서(아니 어쩌면 현실에서도) 공이 분해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녕을 하고 어찌 어찌 학교 밖 운동장에 있는 상황실을 찾았다.

상황실에 거의 다달았는데 하늘에서 이상한 것이 보였다.
박격포탄 같은 것이었다(실제포 날아오는 포탄이 보이는 지는 모른다). 
난 상황실로 뛰어가는 걸음을 필사적으로 돌려 반대로 뛰었다.

그리고 곧 상황실로 포탄이 떨어졌다.
상황실은 아비 규환이 됐고, 난 포탄 파편을 다리에 맞은 듯했다.

더더욱 총알이 간절했다. 
상황실로 들어가니 시체와 무전기가 널부러져 있었다. 
난 어찌어찌 시체들에서 탄창을 챙겨 다시 기어서 교실로 돌아왔다.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은 끝났다.
난 사람들과 버스에 올라타 집으로 돌아가는데, 
한 공무원이 말했다. 
"내일 민방위 훈련 나오셔야 합니다."

난 화가 나 말했다.
"민방위라는게 전쟁을 대비한 훈련인데, 오늘 전쟁 겪은 사람에게 또 훈련을 나오라고요? 면제는 못해줄 망정?"
버스 안 사람들은 내 말에 환호로 답했고, 
공무원은 머쓱하게 '한 번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그렇다. 난 예비군도 아니고 민방위였는데 손에 총을 쥐고 총알을 구하러 다녔던 것이다.

잠에서 깼다. 
민방위가 되서도 이런 꿈을 꿔야 하는 분단된 나라에 사는 것이 문든 불행하게 느껴졌다. 내 무의식엔 항상 이런 불안감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게, 꿈에서 파편에 맞은 왼쪽 허벅지가 찢어질 듯 아팠다. 
오늘 새벽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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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저녁

Imagine 2019. 8. 27. 22:10

이상한 저녁이었다.

평소보다 이른 운동응 했다.
누군가 끼니를 거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웃는 낯이던 누군가가
최근 나에게 힘들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른 운동을 나가니 해가 단번에 짧아졌음을 느꼈다.
여름내내 길던 해가 오늘 갑자기 짧아졌다

집에와서 씻고 누웠은데 그제야 운동 갈 시간이다
잠은 오지 않는다
그리고 글을 쓰고 싶어졌다.

습관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뭐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저녁이다.

2019.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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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천상륙작전’이 개봉했다. 그리고 논란이 됐다. 좌편향 된 평론가들이 낮은 평점을 주었다는 것이 이유이다. 여기에는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된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이야기에 어떻게 낮은 점수를 줄 수 있느냐는 인식이 담겨 있다. 이는 만화가 윤서인의 작품에도 나오는데, 그의 작품을 보면 ‘인천상륙작전 없었으면 장군님 영화나 보면서 눈물 흘렸을 님들’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그럼 과연 좌편향 된 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편파적으로 해석했을까? 일단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영화평을 보면 영화 자체에 대한 해석만 있을 뿐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사건에 대한 가치판단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시나리오의 개연성 없음을 지적하며 그 때문에 배우들이 본인이 가진 연기력보다 못한 연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연출력 부족으로 서스펜스와 스팩타클이 중요한 영화에 딱 그 부분들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 평론 어디에도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는 없다. 오히려 그는 1/5000이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가능성을 성공으로 만든 이 작전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음을 아쉬워 했다.

올 초, 귀향이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문제를 다룬 이 영화는 제작과정부터 화제가 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이 영화를 보러갔다. 그리고 난 이 영화가 영화로서 아주 별로라는 평가를 내렸다. 연출도 부족했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개연성도 부족했다. ‘굿(특히 씻김 굿)이라는 장치는 연출력 부족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페이스북에 귀향에 대한 영화평을 ’눈물이 나는 역사, 헛웃음이 나는 연출‘이라고 썼다. 일본군 위안부(성노예)문제에 분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희생자의 삶이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문제를 다룬 영화의 연출이 형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상품이다. 역사적 사실로의 인천상륙작전과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별개이다. 상품이 만듬새가 별로면 별로라고 이야기 할 권리는 소비자의 것이다. ‘한국전쟁’, ‘일본군 위안부’, ‘독립운동’ 등을 소재로 다루면 무조건 비판도 없이 봐야 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심지어 이들 소재의 영화 중 잘 만든 영화도 있다.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암살’은 영화적으로도 훌륭했다.

영화적 재미도 없는데 영화를 재미있다고 평가하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폭력적이며 정치적이다.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 중 ‘고지전’ ‘태극기 휘날리며’ 등도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소재를, 훌륭한 연출로 만든 영화는 수도 없이 많다.

영화 평론가가 연출, 연기, 시나리오 등을 갖고 영화를 평가하지 못한다면, 아니 특정 사건에 대한 영화평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것이야 말로 역사적 사건과 영화도 구분 못하는 행위이다. 논란을 만든 것은 평론가들이 아니라, 사건과 영화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다.

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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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Imagine 2019. 6. 21. 15:17

요 몇년 1학년 강의를 주로 하게 됐는데,

이번 학기 마지막 쯤에 쉬는 시간에 한 학생이 와서..

"교수님 학창시절에는 정말 선생님들이 따귀도 때리고, 몽둥이로도 때리고 그랬어요?"
라고 물었다.(전 일개 시간강사입니다만..)

그때 생각했다.
'아! 요새 학생들은 맞지 않는구나!'

기분이 좋기는 했지만, 제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 체벌이 너무 당연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나름 충격을 받았다. 
(난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까지 초중고를 다녔다)

아무튼 대답은 했다.
"네. 저는 아니지만 대체로 많이 맞았어요. 근데 학생은 그게 왜 갑자기 궁금했나요?"

학생이 답했다. 
"요새 2000년대 초반 영화를 보는데 거기 보면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막 때리는데, 그게 사실인가 싶어서요"

내가 다시 답했다.
"두사부일체 같은 영화 봤나봐요. 뭐 현실이 더 한 경우도 있었을꺼에요"

학생이 답했다.
"그 영화 맞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때리는데 저항하지 않았나요?"

다시 조금 놀랐다. 
부당하게 맞으면 저항했어야 하지 않았냐고 나에게 되물었으니까.

잠시 생각 후 내가 답했다.
"그러게요. 저는 맞던 학생이 아니어서 제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그때는 별 생각이 없던 것 같아요."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그래도 누군가 그것이 부당하다고 말했으니 바뀐 게 아닐까요?"

말하면서도 궁색했다. 내가 저항하거나 한 것은 아니니까.

답이 부끄럽고 궁색했지만, 이제 학생들에게 체벌이 사라졌다는 것이 기쁘고,
나에게 이런 질문들을 해서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 줘서 그 학생에게 고맙기도 했다.

'그땐 다 그랬고 난 어렸다'는 말로는 내 비겁함과 생각 없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피해서도 안 되고.

얻은 것이 많은 학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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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봉준호 영화를 좋아한다.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등은 매우 재밌게 본 영화다. 특히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더 할 수 없는 명작이다.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잘못된 구조의 사회에서 약자들끼리 어떻게 증오하고 미워하고 싸우는 것인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스템 안의 인간은 시스템을 바꾸기 전까지는 시스템에 순응하는 수밖에 없고, 거부하면 바보가 되거나 낙오자가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시스템을 바꾼다? 그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기생충>이 기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스템 안의 인간들은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그것은 어떤 순간에는 '노력'으로 비춰지지만, 어떤 순간에는 '범죄'로 비춰진다. 일종의 부조리인 샘이다.

영화에 어떤 방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재미를 추구하는 영화도, 의미를 추구하는 영화도, 영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영화도, 일상의 찌질함을 찬양하는 영화도, 인간의 추악함을 드러내는 영화도 모두 필요하다. 그래도 결국 우리가 최근에 보듯, 영화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럼에도 봉준호와 같은 감독이 하나의 문제의식을 갖고 간다는 것은 매우 즐겁고 축복 같다.

덧. 
더욱이 이번에 그는 영화의 문제의식을 넘어 삶의 현장인 촬영 현장에서도 너무나 당연하지만, 영화판에서 그러지 못했던 '표준근로계약서'를 모든 스텝과 작성하고 규정을 지켜가며 영화를 찍었다. 언론은 "제작비가 150억이 든 이유"라는 타이틀의 기사를 달아, 표준근로계약서 사용을 비판하는 듯했지만, 그는 인터뷰에서 '아주 좋았다'고 말했다. 시스템과 세상은 이렇게 조금씩 바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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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Imagine 2019. 5. 20. 09:25

뜨거운 태양볕을 기꺼이 받아
어두운 밤을 차갑게 밝힌다.

그렇게 숨바꼭질 하면서도 기어이 밝아, 
끝내 빛나지 못할 날 비춘다.

 

201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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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여성인권운동에 앞장 서 온 판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줄여서 R.B.G.)에 대한 다큐멘터리 형태의 영화입니다. 

그 스스로가 차별과 맞서가며 연방대법관까지 오른 R.B.G.은 70년대 여성을 차별하는 법의 폐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80이 넘은 지금도 보수화 된 연방대법원에서 보수적이거나 잘못된 판결에 대한 반대의견을 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의 반대 의견은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고, 그 덕에 그녀에게는 Notorious R.B.G.라는 별명까지 갖게 됩니다. 

그녀가 대표적으로 판결한 소송 중에는 남성만 갈 수 있던 버지니아 군사학교에 여성의 입학을 허락한 것(단 남성기준의 동일한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규정을 뒀던 것 같습니다), 

동일한 노동을 하는 여성이 더 적은 임금을 받는 것에 대한 금지 등이 있습니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사회자가 "지금도 가장 이상적인 대법관의 성비가 0:9(남성 : 여성)라고 생각하나요?"라고 묻자

"네"라고 대답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981년까지 모든 대법관이 남성이었는데, 그것을 이상하다고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 R.B.G.이지만 자신과 완전히 성향이 다른 극우 대법관과의 우정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볼 수도 있겠지만, 영화가 그리고 R.B.G.가 싸우는 대상은 '부당한차별'입니다. 

R.B.G.가 초기 변호사로서 소송에 참여할 때 흑인 민권운동과 같은 전략을 취했다는 것은 R.B.G.가 반대한 것이 다름 아닌 "부당한 차별" 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R.B.G.의 동반자인 남편 마틴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R.B.G.가 순회재판소 판사가 되자 뉴욕에서 잘 나가던 변호사 사무실을 그만두고 워싱턴으로 옮겨옵니다. 

R.B.G.를 연방대법관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 것, 바쁜 R.B.G.를 위해 집안일을 담당한 것도 모두 마틴이었습니다. 

여성이 남성을 위해 희생해야 하며, 집안일은 당연히 여성의 일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참고로 R.B.G.는 1933년생입니다)

 

 

보다가 살짝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도 했습니다. 

관객의 대부분이 여성이어서 살짝 놀라기도 했고요.

 

 

부당한 차별에 맞선 한 사람의 삶이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을 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요새 건강이 좋지 않다는데, 얼른 건강을 회복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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