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에 무슨 일이냐고 하겠지만, 주말 내내 학술회의에서 발표할 글을 쓰는 중이었다. 처음부터 슬픔이 차오르고, 눈물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화가 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150명 넘는 사람이 압사를 당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아무런 안전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슬픔은 잠시 후에 찾아왔다. 보고 싶지 않았는데, SNS에서 모자이크 처리되지 않은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길에 늘어져 누워 있었고, 사고를 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급하게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끔찍한 것은 그렇게 심폐소생술을 해도 꼼짝도 하지 않던 사고 피해자들이었다. 얼른 영상을 껐지만, 영상은 내내 뇌리에 남았고, 조금 더 일찍 끄지 못한 내 자신을 자책했다. 그리고 슬픔이 밀려왔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20대였다고 한다. 한창 젊음을 발산할 나이다. 술도 마시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객기도 한 번쯤 부려볼 시절이다. 돌아보면 나의 20대도 그러했다. 할로윈과 같은 축제는 없었지만, 대학 동기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도 많이 마시고 객기도 좀 부리고 그랬다. 지금도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그때 조금 더 놀지 못한 것이다. 이제는 그 시절처럼 놀 수 없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고, 이태원에 나간 젊은이들도 그 때를 즐기러 나갔을 뿐이다. 거기서 그런 사고를 당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친구를 잃고 생존한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보고 들었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저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저 상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저 슬픔은 또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 이런 걱정이 앞섰고, 죽은 이들의 젊음과 죽기 직전의 고통과 두려움에 마음이 저렸다. 가족들의 슬픔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150명 모두 누군가의 친구고 가족이었을 것이다. 각자 모두 꿈을 갖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 생명들이 어처구니없이 죽었다. 애도는 이런 죽음에 적당한 말이다.

하지만 진정한 애도가 되려면, 어처구니없는 이 일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하고 지저분할 수밖에 없다. 벌써 책임 있는 위치의 사람들은 서로 본인의 책임이 아니라고 회피한다. 잘못은 젊음을 발산하러 나온 젊은 사람들 몫이라도 떠드는 목소리도 들린다. 외국의 축제인 할로윈을 철없이 즐기러 나온 개념 없는 젊은이들 탓이라는 것이다. 이런 목소리에서 피해자도 그들인데, 가해자도 그들이 된다. 애도는 하지만 잘못은 그들에게 있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원인을 밝히는 일이 어디 쉽고 깨끗하겠는가. 책임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지만 모두 한 마디씩 위로의 말은 전한다. 위로가 될 리 없다. 위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임질 사람이 책임을 지고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때, 조금이나마 피해자들은 위로 받을 수 있다. 이런 분위기이면 잘못한 사람을 ‘색출’해서 ‘처벌’하는 것으로 끝내려 할 것 같다. 아무도 위로 받을 수 없는 방법이다. 세월호가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형인 이유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곳에도 ‘색출’과 ‘처벌’만 있을 뿐이었다.

이런 큰 사건에서 위로는 모두에게 필요하다. 이 상처는 피해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견뎌야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아마 잘 해나갈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이번 참사를 여러 방식으로 기억하며 추모할 것이다. 상처는 차츰 시간이 흐르며 그렇게 치유되어 갈 것이다. 이 치유에 방해가 되는 것은 잘못을 회피하려는 저 권력들뿐이다. 혹자들은 이 사고를 정치화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 말 자체가 정치적이다. 세상에 정치가 아닌 것은 없다. 정치는 정치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모든 것에서 일어난다. 인간관계도 일종의 정치가 아니던가. 더욱이 행정부와 입법부는 정치의 작용인 선거로 선출되고, 선출된 사람들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 그 결정에 의해 우리는 이익을 얻기도 하고 피해를 당하기도 한다. 행정의 부재는 정치의 문제이고, 이 사건의 책임은 결국 정치적인 책임이다. 그렇게 책임을 져야 진심어린 애도가 되고, 위로가 된다. 154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상자도 많다. 그 가족과 친구들까지 생각하면 수많은 사람의 일상이 무너져 내렸다. ‘놀러가서 죽은 사람들의 장례를 국가가 왜 지원해주고, 왜 애도해야 하냐’는 댓글을 봤다. 이번 참사는 이런 무책임한 생각이 만든 일이다.

친구와 친구, 가족과 가족 사이에서 애도와 위로는 말로도 충분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말로 밖에 전할 수 없다. 하지만 국가의 애도와 위로는 말로 끝날 수 없다. 색출과 처벌이 아닌, 반성과 사과를 통한 애도와 위로가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기원하며, 그러기 위해 끝까지 사건의 원인을 따져 보기를 모든 정치인들과 언론에 간곡하게 부탁한다. 다시 한 번 모든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애도를 표하며, 부상자들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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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천상륙작전’이 개봉했다. 그리고 논란이 됐다. 좌편향 된 평론가들이 낮은 평점을 주었다는 것이 이유이다. 여기에는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된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이야기에 어떻게 낮은 점수를 줄 수 있느냐는 인식이 담겨 있다. 이는 만화가 윤서인의 작품에도 나오는데, 그의 작품을 보면 ‘인천상륙작전 없었으면 장군님 영화나 보면서 눈물 흘렸을 님들’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그럼 과연 좌편향 된 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편파적으로 해석했을까? 일단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영화평을 보면 영화 자체에 대한 해석만 있을 뿐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사건에 대한 가치판단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시나리오의 개연성 없음을 지적하며 그 때문에 배우들이 본인이 가진 연기력보다 못한 연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연출력 부족으로 서스펜스와 스팩타클이 중요한 영화에 딱 그 부분들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 평론 어디에도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는 없다. 오히려 그는 1/5000이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가능성을 성공으로 만든 이 작전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음을 아쉬워 했다.

올 초, 귀향이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문제를 다룬 이 영화는 제작과정부터 화제가 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이 영화를 보러갔다. 그리고 난 이 영화가 영화로서 아주 별로라는 평가를 내렸다. 연출도 부족했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개연성도 부족했다. ‘굿(특히 씻김 굿)이라는 장치는 연출력 부족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페이스북에 귀향에 대한 영화평을 ’눈물이 나는 역사, 헛웃음이 나는 연출‘이라고 썼다. 일본군 위안부(성노예)문제에 분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희생자의 삶이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문제를 다룬 영화의 연출이 형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상품이다. 역사적 사실로의 인천상륙작전과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별개이다. 상품이 만듬새가 별로면 별로라고 이야기 할 권리는 소비자의 것이다. ‘한국전쟁’, ‘일본군 위안부’, ‘독립운동’ 등을 소재로 다루면 무조건 비판도 없이 봐야 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심지어 이들 소재의 영화 중 잘 만든 영화도 있다.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암살’은 영화적으로도 훌륭했다.

영화적 재미도 없는데 영화를 재미있다고 평가하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폭력적이며 정치적이다.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 중 ‘고지전’ ‘태극기 휘날리며’ 등도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소재를, 훌륭한 연출로 만든 영화는 수도 없이 많다.

영화 평론가가 연출, 연기, 시나리오 등을 갖고 영화를 평가하지 못한다면, 아니 특정 사건에 대한 영화평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것이야 말로 역사적 사건과 영화도 구분 못하는 행위이다. 논란을 만든 것은 평론가들이 아니라, 사건과 영화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다.

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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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TV만 틀면 온통 정치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비단 한국 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세계 최강대국이라는(어느 쪽이건 이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미국에서는 민주당원이고 흑인이며, 현직 대통령이기도 한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했다.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붕괴된 후 다시 세계의 중심 국가 가운데 하나가 된 중국은 10년 만에 최고 권력자가 바뀐다. 최근 세계 제2의 경제 대국 자리를 중국에게 내어주긴 했으나, 여전히 경제 대국인 일본의 노다 내각은 사상 최악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으며, 조만간 국회를 해산하고 총선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리고 우리도 곧 대통령을 뽑는다.

미국의 대통령제와 프랑스의 대통령제가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겠고, 영국의 상하원제와 미국 상하원제의 차이도 잘 모르지만,  이 나라에서 30년 넘게 살아 오며 느낀 것은 최소한 한국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온갖 이슈에도 불구하고 모든 미디어를 정치가 장악한 이유이기도 하다(이점은 전직 대통령을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은 흔히 누가 해도 고만고만 하다 하지만, 노무현의 5년과 이명박의 5년의 차이는 컸다. 노무현 지지자에게 지난 5년은 악몽이었고, 이명박 지지자에게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잃어버린 10년이었다. 누가 되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조금 달라진다. 오세훈의 서울시와 박원순의 서울시가 다른 것도 몸소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정권에서도 별로 나아지지 않은 것도 있다. IMF구제 금융 이후로 노동의 안정성은 고용의 유연성과 대치된다는 이유로 폐기되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시절에는 그래도 열심히 일하면 (최소한 경제적으로는) 돈을 벌어 집도 사고, 개천에서 용도 나는 시절이었지만, 이제 개천에서 용은 나지 않는다. 구멍가게를 하며 자식을 대학에 보냈던 시대는 끝났다(아마 이것이 박정희 향수의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공이 군사정권의 공이라고 말할 순 없다. 이 시기는 세계 경제의 호황기이기도 했다). 민주정부라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친 기업적 분위기에서 노동자의 권리는 저 바닥 어딘가로 떨어졌고, 노동자란 그 말은 마치 예전에 백정과 같이 취급 받기에 이르렀다. 이명박 정권에서는 이것이 그냥 노골적이 되었다는 것 정도가 차이일 것이다.

민주정부의 비민주적인 행태도 계속 되었다. 국가의 개발과 계획에서 국민들은 소외되었다. 국익이란 이름 아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 따위는, 그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집단 이기주위’정도로 포장되어 정권에게 선동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이 15년 간을, 아니 김영삼 정부까지 포함해 20년 간을 지켜보면, 한국의 대통령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지만, 많은 것을 바꾸지 않는(혹은 못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난 그래서 이번 대선을 기대하지만 기대하지 않는다. 만약 정권이 바뀐다면 아마 현 야권지지자들은 지난 5년간 느꼈던 지옥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가 된다면 여권 지지자들은 지난 5년간 느꼈던 행복을 5년간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단은 그것이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확신한다. 4대강 사업은 야권입장에서도, 내 입장에서도, 그리고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대부분의 한국인에게도 그냥 삽질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나라가 망하진 않았다. G20정상 회담과 원전 수출로 한국 경제가 회생할 것 처럼 떠들었지만, 그 무엇도 우리 삶에 당장의 변화를 가져오진 않았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지금 나오는 모둔 대선후보의 공약이 선의에서 출발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의 임기 5년간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안철수가 말한대로 ‘큰 방향을 잡는 정도’까지만 간다고 해도 다행일 것이다. 그러니 최소한 나는 내가 찍는 후보가 나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믿음은 버리고자 한다. 그래야 그의 임기를 보다 덤덤하게 긴 시각에서 지켜볼 수 있고, 그 역시 조급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세상은 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번 대선의 화두 중 하나가 ‘경제 민주화’이다. 줄푸세를 외치던 박근혜가 불과 5년만에 김종인을 영입하며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나와 같은 우리 때문이었다. 모두가 그것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리고 그것을 요구할 때, 그때에 세상은 비로소 바뀔 준비를 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대선후보가 아니라 바로 나와 같은 평범한 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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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Imagine 2011. 9. 9. 11:00
근래 정치에 관심이 많아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많았지만 '더' 많아졌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을 듯 싶지만. 아침에 컴퓨터를 켜면 인터넷으로 서울시장 예비후보들의 지지율을 살펴보곤 한다. 그리고 밤새 또 어떤일이 터졌는지도 살펴본다. 스포츠, 연예 기사에 관한 관심은 그와 반비례 하여 많이 줄었다. 이는 아마 최근 몇 년 사이 정치가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깨닭은 결과일 것이다.(사실 스포츠의 결과나, 연예인 가쉽은 내 삶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근대 국민국가(혹은 민족국가)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사상은 '인민주권론'이다. 그전까지 주권이란 것은 군주에게, 혹은 몇몇 귀족들에게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이를 바꿨다. 프랑스 혁명의 주체였던 부르주아 계급은 민중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도움을 얻기위해 국가의 권력이 인민에게 있다는 사상을 만들어 냈다. 이로서 국가는 왕조의 국가도 아니고, 몇몇 귀족의 국가도 아닌 나의 국가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허울 좋은 관념에 불과했다. 실제로 그 이후 프랑스는 몇몇 부르주아의 국가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에서 출발하여 많은 제도들이 정비되었고, 그 제도 안에서 인민들은 힘을 갖을 수 있게되었다. 여전히 정치는 '정치가'라고 하는 몇몇 특별한 계급(적절한 표현은 아닌 것 같지만 일정의 계급성은 갖는 다고 생각한다)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들은 최소한 그들 나라의 시민(혹은 국민 혹은 인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인민주권론에서 시작된 민주주의의 상식에 따르면 주권을 가진 모든 사람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 같이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도 정치인이라면 '여러분 모두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포장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권력을 너희 '피지배층'도 같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전에 모 국회위원께서 '아무나 정치하려고 한다'라고 말해주셨다. 솔찍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정치는 보통 사람이 해서는 안되는, 몇몇이 독점해야 하는 그 무엇이라는 프랑스 혁명 당시 '부르주아'의 생각을 그대로 답습하고 계신 것이다. 그 솔찍함과 순수함에 감탄을 보낼 수밖에 없지만, 그가 말한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은 조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직접 민주주의의 정수라고 했던 페리클리스 시대의 아테네에서는 심지어 공직을 추첨으로 뽑았다. 모든 시민은 정치와 국가운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원칙을 그대로 지킨 것이다. 그럼 이때 그리스가 엉망이었냐? 그렇지도 않다. 페리클리스 시대의 아테네는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이런식의 정치야 아테네와 같은 폐쇠적인 시민국가이기 때문에 가능하긴 했지만, 민주주의라는 원칙에서 볼 때 사람의 의식이라는 것이 2000년이 지나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고, 몇몇 정치가들을 볼 때 더 세련되지 못해졌다는 데에는 약간의 허무함 마져 느낀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지만 군사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이던 노태우는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가 왔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지금 위대한 보통사람은 어디도 없다. 나도 겪고 있지만 보상도 제대로 못받고 쫒겨나고, (백번 양보해 그것이 불법이라 하더라도) 내 권리를 지키겠다고 버티다 공권력에 의해 불에 타 죽는 '보통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일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 당시 부르주아가 인민주권론을 이야기했다고, 20여년 전 노태우가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선언했다고 그것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있는 권리를 나에 이익에 맞게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사용할 때 비로서 얻을 수 있다. 가만히 앉아서 선거철에만 잠시 정치에 관심을 갖고 투표 몇 번 한다고 바뀌지 않는 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하고 정치가들에게 '내가 조금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하는 것은 감나무 밑에서 떨어지는 감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리는 것 보다 더 가능성이 적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심지어 선거마져!-이 선거는 무엇을 결정하는 '투표'와는 구별된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아마도 많은 사람이 최근 몇 년 사이 정치가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정치에 의해 세금이 결정되고, 집 값이 움직이고, 물가가 오르락 내리락 한다. 그것을 알았다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별게 아니다. 끊임 없이 관심을 갖고, (원칙 적으로는)나를 대신해 정치를 하고 있는 그들을 감시하며, 비판하고 요구 해야한다. 그래서 그들이 최소한 보다 많이 당신들의 눈치를 보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삶이 그렇게 '한가하지'않은 것도 안다. 하지만 그것도 하지 않으면 '각자'가 원하는 좋은 세상은 오지 않는다. '인민주권론'은 원칙으로만,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는 수사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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