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어? 어제도 통화 했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초등학교 동창이고 종종 통화를 하지만 몇 달에 한 번 정도였지, 어제통화하고 오늘 다시 통화하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휴가 차 필리핀에 있었을 때도 전화가 왔었다. 난 문자로 ‘휴가로 해외에 왔어’ 라고 보냈고, 친구는 ‘언제와?’라고 다시 질문을 했다. 난 ‘내일’이라고 말했고, 도착한 다음 날 전화가 왔다. 어제의 통화는 평소와 같았는데, 뭔가 좀 우울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오늘 다시 전화가 왔을 때야 난 ‘무슨 일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느낌과 달리 전화는 어제와 같이 평범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유쾌한 비난을 쏟아 냈고, 많이 웃었다. 남편, 아이들과 함께 사는 친구는 산책을 나와 전화를 하는 듯했다. 그렇게 평범하게 흘러가던 대화는 점차 심각한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그 친구를 알게 된지 30년이 되어가지만, 난 그 친구가 그렇게 많은 고민과 어려움 속에서 사는지 알지 못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였다. 어릴 때부터 단정하고 밝은데다 공부도 잘해서 남학생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나도 잠시 좋아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친해지기 위해 엄청 노력했는데 이상하게 친해지면서 이성적인 감정이 사라졌다. 그것이 오랜 기간 나와 그 친구를 ‘친구’로 유지시켜 주었을 것이다. 공부를 잘하던 그 친구는 명문대 법대에 진학했다. 그 뒤로도 우리는 일 년에 한 번 쯤 만나고 6번 쯤 통화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좀 특이 했던 것은 그 친구였는데, 종종 자기 남자친구를 나에게 소개해 주고 나의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을 한다고 했다. 새로 사귀는 남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좀 급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워낙 똑똑하고 야무진 친구여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결혼을 한 친구는 남편을 따라 해외로 갔고, 연락은 뜸해졌다. 다시 연락을 한 것은 귀국한 이후였다. 돌아 왔을 때 친구는 두 아이의 엄마였다.
친구의 가족은 화목했는데, 문제는 지금 남편과 가족이 아니었다. 나와 알던 시절의 친구의 가족사가 그를 힘들게 했다. 친구는 대학을 다닐 당시, 취업을 했을 당시의 힘들었던 일을 처음으로 나에게 이야기했다. 자기가 왜 고등학교까지 공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처음 들었다. 그리고는 울었다. 우는 모습은 종종 봤지만, 그렇게 서럽게 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 평생 가장 말없이 남의 말을 듣기만 했다. 상갓집도 많이 갔지만, 이럴 땐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물론 울음을 그치고, 다시 일상의 이야기도 돌아갔고, 우린 다시 서로에 대해 유쾌한 비난을 쏟아 부으며 전화를 마쳤다. 그래야만 전화를 마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상대를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전화를 끊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나는 사실 조금도 모르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30년 지기 친구의 가장 중요했던, 그 힘들었던 순간도 난 몰랐으니까. 통화 도중 친구가 물었다. ‘너 나 얼마나 알지?’. 난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이렇게 통화할 만큼?’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네.’
답은 했지만, 난 그만큼이 얼만 큼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누구도 얼만 큼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또 그리고 그 힘든 시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해 친구에게 많이 미안하다.
그런 복잡한 마음에 밤늦게 걸려온 친구의 전화 한통에 밤새 뒤척여야 했다.
2022년 7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