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새론이 죽었다. 자살인 것 같다. 오래 전 영화 '아저씨'에서 보고 딱히 기억은 없었다. 그리고 들은 소식이 음주운전과 그후의 각종 구설이다. 그리곤 이렇게 됐다.
그의 소식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왜 이리 가혹한가?' 사람은 누구나 실수와 잘못을 한다. 어떤 잘못은 사회적 규범을 벗어나기도 하고 또 어떤 잘못은 법을 어기기도 한다. 그래서 처벌을 받는다. 여기까진 당연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법의 처벌을 받아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가혹하다.
물론 범법자는 처벌 받음으로 그 죄값을 다 치렀다. 물론 법이 정한 형량이 너무 약해보이고 못마땅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입법을 한 국회와 구형을 한 검찰(행정부)과 선고를 한 사법부에 있지, 피의자의 잘못은 아니다. 또 어떤 범죄자는 용서 받기 어렵기도 하다. 상습범이나 아동성폭행 같은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그 경우라도 죄값을 치르고 나오면 먹고 살 길은 마련해 줘야 한다.
하지만 이 글은 범죄자를 옹호하려는 글이 아니다. 그들을 보는 가혹한 시선이 바로 우리 스스로에게 향하는 시선 같아서 쓰는 글이다. 하나의 실수, 한 번의 잘못에 대해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가혹하다. 김새론 같은 연예인은 더 많은 대중에게 조리돌림 당할 뿐, 우리의 실수와 잘못도 주변 사람의 구설에 오르는 일은 흔하다.
사회 시스템도 그렇다.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다. 좋은 대학을 가야한다고 말하고, 좋은 대학을 가면 좋은 직장을 가야한다고 말한다. 좋은 직장을 가기 위해선 '첫 직장'이 중요하다고 하고, 좋은 첫 직장을 가기 위해서는 또 여러 경력(소위 스펙)을 쌓아야 한다. 그렇게 해도 좋은 직장 가기는 어렵다. 그 수가 적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의 문제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쉽게 개인의 게으름으로 치부해 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실패한' 개인은 좌절한다.
좋은 직장을 가도 끝난 것이 아니다. 퇴직까지 남은 시간은 20년 정도, 그 안에서도 실패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 또 경쟁에서 탈락한다. 이렇듯 실패는 너무 흔하다. 그렇게 실패한 사람에게 우리 사회는 낙인을 찍는다. 도태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가 노력하지 않아서, 네 능력이 부족해서.. 언제든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럼 잘못은? 잘못도 흔하다. 계속 말하지만 음주운전 등의 불법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불법을 저지르면 죄값을 치르면 된다. 문제는 그 후의 일이다. 같은 잘못을 계속 저지르면 문제가 되겠지만, 한 번 잘못을 한 사람에게 주홍글씨를 새기고 조리돌림 하지는 말아야한다. 스스로가 사회에서 받는 온갖 스트레스를 잘못한 한 개인에게 풀어버리는 것 같다.
잘못하고 실수하고.. 인간이 살면서 늘 저지르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들에 우리 사회는 가혹하다. 연예인에게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도 그렇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르고 실패한 사람은 스스로에게 가혹할만큼의 책임을 돌리고, 심한 경우에는 자살을 하게 된다. 그렇게 자살하는 사람이 하루에 40명이 넘는다. 사회에서 낙오되고 고립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서로에게 그렇게 가혹한가? 나는 잘 모르겠다. 성별, 세대, 정치적 성향으로 나누어 서로가 서로를 조롱하고 증오하고, 조금만 삐끗하도 역시 비판받는 사회는 언제부터 만들어진 것일까? 어떻게 해야 우린 서로에게 조금 더 관대할 수 있을까? 정말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답답한 마음에 글을 쓴다.
'In My Life'에 해당되는 글 175건
- 2025.02.18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1
- 2024.12.05 성재 이시영 - 국민에게 고함 3
- 2024.03.19 회수권, 넥스트, 농구대잔치, 96년 한국시리즈 1
- 2024.03.14 좋은 관리자 되기 1
- 2024.03.14 어머니의 수술 1
- 2023.11.03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김민철, 2023, 창비) 1
- 2023.08.09 출근길, 마법 같던 순간. 1
- 2023.07.24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나라.
- 2023.07.12 늦은 밤 친구와의 전화
- 2023.07.12 저출산 문제
이 글은 성재 이시영 선생이 한국전쟁 중 공직자의 비리로 수만 명을 죽게 만든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사직을 하며 쓴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글입니다.
이시영 선생은 이회영 선생 형제 중 막내로, 유일하게 해방을 보고 부통령을 역임하신 분입니다.
최상병, 이태원 참사, 계엄령 등등의 사건에서 단 한 명도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때 보면 좋을 것 같은 글이라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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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에게 고함
나는 국민 앞에 이 글을 내놓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한편으로 부끄러워하며 또 한편으로는 슬퍼한다. 내가 망명활동 삼십여 년 동안 이역에서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다(無爲渡日)하다가 8.15해방과 함께 나이든 가족들을(老嫗) 이끌고 흔연귀국(欣然歸國)하였을 때 나는 이미 제 구실을 못할 만큼 나이 든(老朽) 몸이건만 여생을 조국의 남북통일과 자주독립을 위해서 바치겠다는 것을 다시금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좌우상극으로 인한 그 혼란의 파도에 휩쓸리기 싫어 나는 귀국하자마자 모든 정치단체와의 관계를 끊고 초야로 돌아가 야인(野人)으로서 어느 당론에도 기우리지 않고 또 어떤 파쟁에도 끌림이 없이 오직 국가를 건지고 민족을 살리려는 일념에 진심어린 정성을 기울였든 것이다.
그렇듯 내 심경은 명경지수(明鏡止水)와도 같이 담담하든 중 단기 4281년(1948년) 7월 20일 뜻밖에도 국회에서 나를 초대부통령으로 선거했을 때에 나는 그 적임이 아님을 모른 바 아니었으나 이것이 국민의 총의인 이상 내가 사퇴한다는 것은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심사원려 끝에 승낙 했다는 것을 여기에 고백한다.
그 뒤 3년 동안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대체로 무엇을 하였든가. 내가 부통령의 군임(軍任)을 맡음으로서 국정이 얼마나 쇄신되었으며 국민은 어떠한 혜택을 입었든가. 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이 부통령의 임무라면 내가 취임한 지 삼년 동안 얼마나 한 도와서 올바르게 이끌어(翼贊) 성과를 빛내었는가. 하나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야말로 재능도 없이 관직에 있으며 녹을 먹는 것에(尺位素餐)에 지나지 못했든 것이니 이것은 그 과오와 책임이(過責)이 오로지 나 한 사람의 무위무능(無爲無能)에 있었다는 것을 국민 앞에 또한 솔직히 표명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매양 사람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일을 하도록 해 줌으로써 그 사람의 직능(職能)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니 만약에 그렇지 못한다면 부질없이 공위에 앉아 허영에 도취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자리를 깨끗이 물러나가는 것이 떳떳하고 마땅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정부에 봉직하는 모든 공무원 된 사람으로 상하계급을 막론하고 다 그러하려니와 특히 부통령이라는 나의 처지로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내 본래 무능한 중에도 모든 환경은 나로 하여금 더구나 무위하게 만들어 이 이상 재능 없이 자리(尺位)에 앉아 나라의(國)록만 축낸다는 것은 첫째로 국가에 불충한 것이 되고, 둘째로는 국민에게 매우 부끄러운(慙愧)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국가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형세(興亡竿頭)에 걸렸고 국민이 존속과 멸망의 낭떠러지에(存沒斷崖) 달려 위기간발에 있건만 이것을 바로잡아 고치고(匡正) 널리 세상을 구할(弘救) 성충(誠忠)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동량지재(棟梁之材)가 별로 없음은 어찐 까닭인가.
그러나 간혹 인재다운 인재가 있다 하되 양두구육(羊頭狗肉)의 가면 쓴 애국위선자들의 도량으로 말미암아 초토에 묻혀 비육의 탄식을 자아내고 있는 현상이니 뜻이 있는 사람(有志者)으로서 얼마나 통탄한 일인가. 뿐만 아니라 나는 정부수립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관의 지위에 앉은 인재로서 그 적재가 그 적소에 등용된 것을 별로 보지 못하였다.
그러한데다가 탐관오리는 도시와 시골(都鄙)에 발호(跋扈)하여 국민의 신망을 상실케 하며 정부의 위신을 훼손하고 나아가서는 국가의 존경을 모독하여서 신생민국(新生民國)의 장래에 암영을 던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이며 이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마다 그르다 하되 고칠 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의 시비를 논하든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오류(濁水汚流)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더구나 그렇듯 관기가 흐리고 민생(民膜)이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 워낙 무위무능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나는 이번 결연코 대한민국 부통령의 직을 이에 사퇴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의 직책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아울러 국민들 앞에 과거 삼년 동안 아무 업적과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謝)하는 동시에 앞으로 나는 일개포의(一個布衣)로 돌아가 국민과 함께 고락과 사생을 같이하려 한다.
그러나 내 아무리 노혼한 몸이라 하지만 아직도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하려는(盡忠報國) 진심어린 마음(丹心)과 정성과 열정은(誠熱)은 결코 사그러지지 않아 남은 생을(殘生) 조국의 완전통일과 영구독립에 끝내 이바지할 것을 여기에 굳게 맹서한다. 그리고 국민 여러분은 앞으로 더욱 위국진충(爲國盡忠)의 성의를 북돋아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여 주었으면 흔행(欣幸)일까 한다.
단기 4284년(1951) 5월 9일
사진을 보고 생각나는 몇 가지 에피소드
1. 회수권.
회수권에 대한 기억은 내 나이 또래면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시절부터 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내가 처음 기억하는 버스요금은 60원. 그래서 어머니는 내가 등교할 때 오십원짜리 두 개, 십원짜리 두 개를 손에 쥐어줬다. 딱 왕복을 할 수 있는 돈이었다. 언젠가 뽑기가 하고 싶어서 50원을 뽑기에 쓰고 걸어갔는데, 초등학교 1학년의 나이인 나는 어머니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교 시간이 늦어지는 것을 어머니가 눈치채지 못 할리 없었다. 난 버스를 탔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뽑기보다 거짓말 때문에 많이 혼났던 기억이 있다.
회수권은 중학교 들어오면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학교에서 샀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몇 백원이라도 아낀다고, 10개짜리 회수권을 종종 11개로 만들곤 했다. 교묘하게(?) 회수권을 자르면 11개가 되곤 했는데, 그렇게 자르다보면 티가 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표와 표 사이의 중간 공백 부분이 중간에 간다던가.. 뭐 이런 경우. 대부분의 기사님들은 알고보 모른 척 해준 것으로 기억하는데, 가끔 원칙주의자 아저씨들을 만나면 매우 혼나곤 했다. 그래도 내리라고 하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다.
2. 넥스트의 마지막 콘서트
난 넥스트의 어마어마한 팬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해체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난 그때까지 콘서트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는데, 이때는 큰 용기를 냈다. 모와 둔 돈을 다 털고, 부모님한테도 사실대로 이야기해서 돈을 좀 빌려서 콘서트 비용과 앨범 비용을 마련했다. 그리고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약을 했는데, 그것이 공교롭게 1997년 12월 31일이었다. 그날은 그들의 해체 콘서트 중이도 마지막 날이었다. 친구들과 간 자리는 콘서트 장에서도 완전 말석이었는데, 그래도 처음 간 콘서트의 현장은 대단했다. 심지어 그들의 마지막 콘서트였으니.. 신해철은 마지막 쯤에, "우리 밤새 여기서 놀까요!"라고 했고, 우리는 모두 "네!!"라고 했지만, 당시 12시부터 음악도시를 진행하던 신해철은.. "그런데 저 아쉽지만 라디오 가야해요.."라고 하고는 앵콜 몇 곡을 더 하고 공연을 마쳤다. 많은 사람들은 흥분과 슬픔 속에서 퇴장했다. 콘서트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내 고2가 끝나고 나는 고3이 됐다.
3. 농구대찬치(기아의 우승)
난 지금도 농구를 매우 좋아하는데, 당시에는 누구나 그랬듯 슬램덩크와 농구대잔치, 그리고 마지막 승부의 영향이었다. 난 남들이 다 고대, 연대 좋아할 때, 기아를 좋아했다. 특히 허재를 좋아했는데, 그의 천재성이 너무 좋았다. 속공을 하는데 멈춰서 3점을 던지고, 지금에는 스텝 백이라고 하는 슛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허재를 보면 농구가 너무 쉬워보였다. 나는 그의 우승이 너무 보고 싶어 친구들과 농구대잔치 결승을 보러갔다. 94-95시즌 경기도 보러갔는데,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결승은 아니었다. 그해에도 기아가 우승을 했는데, 다음해에는 기아우승을 현장에서 꼭 보고 싶었다. 그리고 1년을 기다려서 95-96시즌 농구대잔치 결승을 보러갔다. 날짜도 2월 26일. 그날 기아가 상무를 이기고 우승을 했다. 그때 축포가 터졌고, 옆에 친구랑 얼싸 않으며 좋아했던 기억이 아스라이 기억 난다. 그리고 저 티켓을 보니, 집에와서 잊지 않겠다고 싸인펜으로 쭉쭉 기아 우승이라고 썻던 것도 떠오른다.
6. 96년 한국시리즈(고등학생의 음주 야구 관람)
기억난다. 현대와 해태의 경기었다. 난 롯데 팬이라서 사실 누가 이겨도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가 보고 싶었고 친구들과 경기를 보러가기로 했다. 그런데 당시에도 인기팀인 해태 쪽 표는 구하기도 힘들었고, 엘지 팬인 내 친구는 해태를 응원하기 싫다고 했다(당시 두 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현대 경기를 응원하러갔다. 당시 야구의 인기는 지금과 같지 않아서 표 구하기도 상대적으로 쉬웠다. 3루 쪽 외야에 앉은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교복을 입고(!?) 야구를 보러 갔는데, 그래도 다들 야구를 좋아하니 곧 몰입이 됐다. 당시 현대 선발은 정민태. 나름 에이스였다. 투수전으로 기억한다. 해태 선발은 기억이 나지 않고.. 아무튼 응원하다 해태 선수들을 친구들과 막 욕했는데, 갑자기 주의가 조용해졌다. 속으로 '교복을 입고 욕을 했으니.. 혼나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뒤에 있던 아저씨가 "학생들" 하면서 불렀다. 우리는 긴장하고 뒤를 돌았는데, 아저씨가 활짝 웃으며 "훌륭한 학생들이네! 여기 맥주도 있으니 마셔"(???)라고 말했다. 우리 교복 입고 있었는데.. 그래서 "저희 학생인데요?" 라고 그랬더니, 주변 모두가 합심해서 "어른들이 주는 건 괜찮아!"하셔서 맥주를 한 캔씩 들고 신나게 응원했다. 그날 경기는 졌다.
7. 마무리
이렇게 보니 고등학생 시절 신나게 놀기만 했다. 야구장, 농구창, 축구장.. 정말 다니지 않은 곳이 없다. 표를 모아둔 것만 저정도이니니 얼마나 많이 다녔겠는가.. 저때 공부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도 들지만, 뭐 그래도 나름 재밌었던 기억이다. 집에서 추억의 도구들을 찾은 관계로 적어봄.
나이를 먹고 연차가 쌓이니 자연히 직장에서도 관리직이 되었다. 아니 된지 좀 오래 됐다. 그렇게 관리직으로 지내며 느낀 몇 가지.
첫째, 좋은 상사는 직원들의 의견을 잘 듣고, 결정해주고, 결정에 책임지는 사람이다. 셋 중 하나라도 못하면 좋은 상사일 수 없다. 실무를 안 하는대신 저거 하라고 월급을 더 받는 것이다.
둘째, 화내서 좋을 건 없다. 직원이 실수를 해도 화내지 말아야 한다. 괜찮은 직원이면 내가 화내지 않아도 본인의 실수에대해 더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그럴 땐 실수하지 않도록 방향만 잡아주면 된다. 괜찮지 않은 직원이면 원칙대로 고과를 낮게 주거나, 중요한 업무에서 차차 배제하면 된다. 화를 내는 것은 서로 감정만 상할 뿐 업무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화내고 “난 뒤끝이 없잖아” 같은 무의미한 말은 할 필요도 없다. 이미 감정은 다 상한 상황이다.
셋째, 방향을 정해줘야 한다. 일은 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나 때의 방식이 지금은 비효율적일 수도 있고, 같은 시기 같은 세대라 하더라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팀웍을 깨지 않는 선에서 일하는 방법까지 제시할 필요는 없다. 방향을 제시해주고 일은 알아서 하게 하면 된다. 나는 약속된 시간에 보고서를 받고, 그것에 대해 평가하면 그뿐이다.
이렇게 적다보니 내가 굉장히 좋은 상사이자 관리자 같지만 그렇지 않다. 가끔은 짜증도 내고, 책임을 피하고 싶어하고, 나도 뭔지 모르면서 일을 시키기도 한다. 그냥 저렇게 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어머니가 어깨 수술을 받았다. 2017년에 오른쪽 어깨 수술을 받고 7년 만에 왼쪽 어깨 수술을 받은 것이다.
어머니는 오랜 시간 식당을 하셨는데, 그때부터 어깨가 망가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식당을 하던 시절에는 쿠팡 같은 것이 없었다. 경기도 하남시에 살던 시절 어머니는 새벽부터 가락시장에 나가 장을 직접 봤다. 물론 운전도 직접 했다. 주변에 공사가 있을 때는 공사 현장에 음식을 납품하기도 했고, 저녁에는 동네 공장 노동자들을 상대로 술과 안주를 팔았다. 그야말로 새벽부터 저녁까지 계속되는 노동이었다. 이것을 수십년을 하다보니 어깨 근육이 망가진 것이다.
어깨뿐이 아니다. 무릎과 허리는 오래전부터 안 좋았다. 그래도 젊은 시절에는 젊음으로 버텼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70대 중반의 나이는 - 아무리 100세 시대라고 해도 - 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언제나 걸음이 빨랐던 어머니는 이제 오래 걷는 것 조차 힘들어하신다. 거기에 여전히 동생의 쌍둥이 자녀들을 봐주고 있고, 집안일을 하다보니 예전 같은 강도 높은 노동이 아니라도 몸이 버틸 제간이 없다. 그 결과가 7년을 두고 받은 양쪽 어깨 수술이다.
큰 수술도 위험한 수술도 아닌 것을 알지만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실 때 어딘가 모르게 아픈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수술을 받고 나와 회복 중이지만, 수면 마취가 덜 깨서 인지 힘들어 보이고, 난 그만큼 마음이 아프다. 어제 저녁부터 물도 마시지 못하는 금식 중이었기에, 배도 고프실테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오히려 나의 식사를 챙기는 모습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다. 이런 사랑은 어머니가 아니면 받을 수 없다는 생각뿐이다.
병원에 있으면 아픈 사람도 많이 보지만, 나이 든 사람도 많이 보게 된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그 나이 든 사람들 중에 속하고, 그 중에서도 적지 않은 나이임을 느낀다. 가는 시간을 잡을 수도 없고, 그것이 순리라고 하지만 이런 날은 시간이 원망스럽다.
얼마 전 율령제라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는 도중 생각이 막힌 적이 있다(자주 있는 일이다). 그러다 문득 현대 민주주의를 율령제와 비교해 보기로 하자고 생각했다. 매우 추상적인 민주주의는 민주정이라는 형태로 실현되는데, 그 민주정이 실현되는 형태는 다양하다. 동시대로(횡적으로) 보면 영국, 미국, 대한민국, 일본, 캐나다,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이 민주주의를 추구하며 민주정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 형태는 모두 다르다. 입헌군주제의 형태를 띄기도 하고, 양원제를 택하기도 하며, 일부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종적으로 봐도 민주정의 형태는 다르다. 내가 사는 대한민국만 봐도 1공화국부터 현재의 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헌법이 개정되었고, 그 법에 따라 민주정의 내용도 달랐다. 부통령이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비록 군사정권 이긴 했지만) 행정부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기도 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민주정을 이루는 헌법 역시 개헌의 논의가 – 비록 지금은 조금 시들해 지긴 했지만 – 진행 중이다.
이렇게보면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는 이데올로기이며 이 이데올로기를 이루기 위한 정부의 형태로서의 민주정은 각 사회의 상황에 맞게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뿐, 어떤 완성된 형태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율령제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완성된 형태의 율령제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율령에 의한 통치라는 하나의 이상을 실행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 생각을 얼마 전 한 선배와 이야기 했더니, 학계에서는 이미 이렇게들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김민철, 2023, 창비)를 본 것은 이러한 고민을 하던 때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민주주의는 사실 정체(政體)라고 사용되기에 민주정(民主政)에 가까우며, 내용상으로는 인민이 통치를 한다는 의미에서 민치정(民治政)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의 역사는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움직임의 계속 발전해온 승리의 역사가 아니라, 엄청 혐오 받고, 경계 받으며, 배척되던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정치체제가 되었는가를 이야기 한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전에 민주정이 배척 받은 이유와 그것이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 가를 세심하게 추적하는 글은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엘리트들의 인민 다수의 덕성에 대한 불신,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최소한의 경제적인 평등(혹은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거대한 생각에 변화 속에서도 쉽게 바뀌지 않았던 여성에 대한 인식 등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시사점을 준다. 더욱이 저자는 마지막에 현재 많은 ‘민주정’ 국가들이 과연 ‘민주주의’을 실현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중요 직책들과 입법권자들은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선거로 뽑지만, 법관, 대부분의 고위관료가 시험에 의해 선발되는 형태가 과연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옳은 정체(政體)인가는 계속해서 많은 국가들이 고민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물론 저자도 말미에 썼듯, 완벽한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도 언급 했듯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민주정도 하나의 형태가 있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실현은 완성 불가능한, 그렇기 때문에 계속 노력해야하는 과제이다. 어쩌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가장 큰 적은 지금의 현실과 제도에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안주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
출근을 하려고 문을 나섰는데, 참새 한 마리가 옆집 현관 문에 부딪혀 떨어졌다.
걱정되어 가 봤는데, 참새 치고도 몸집이 작은 것이 아직 새끼인 것 같았다.
출근길이라 그냥 갈까 했는데, 우리동네 길고양이가 많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심지어 몇 마리는 내가 밥을 주니까, 참새 정도는 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만졌는데 푸다닥 거리면 내가 놀랄 것 같아서(생각보다 겁은 많다..) 살짝 건드려 봤는데 안 움직인다.
그래서 '죽었나?'하고 봤는데 눈은 껌뻑 거리고 있었다.
놀랄 준비를 하고, 살포시 잡아 들었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출근길이니 다시 집으로 갈 수는 없고, 회사에가서 물과 먹이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참새를 두 손으로 잡고, 걸어서 회사로 걷기 시작했다.
(난 회사까지 걸어서 출근한다. 15분 내외)
조금 시간이 지나자 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낯선 생물의 손아귀에서 이동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둥절한 상황이겠는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발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 정신을 차리나?' 생각을 했다.
알아 들을 리 없지만 얼굴을 마주보고 "이제 좀 괜찮아?" 하고 물었는데,
더 그럴리 없지만 참새는 고개를 끄덕였다(정말이다. 알아듣고 한 행동은 아니겠지만).
그러더니 갑자기 푸드득 하고 내 손을 떠나 하늘로 날아갔다.
"잘가" 나즈막히 인사를 했다.
그리곤 속으로 '앞으로는 유리 조심하고 건강하게 살아'라고 마음을 전했다.
출근길 10여 분 동안 있었던 마법 같은 순간이다.
책임.
홍수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실종된 사람을 찾던 해병대원은 결국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젊은 교사가 자살을 했다.
불과 며칠 동안 일어난 일이다.
무능을 만드는 부적절한 시스템,
무너진 교권,
군인에 대한 인식 등등
원인을 찾으면 한도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책임이다.
난 한국사회에서 책임을 기꺼이 지는 사람을 많이 보지 못했다.
운이 좋게 내 주변에는 책임의 무게를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조직이 커질 수록 모두 시스템 속에 숨으려 할 뿐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
어렵고 힘든 일은 가장 책임 있고 힘 있는 사람이 담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힘 없고, 책임 질 수 없는 사람이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직에서 그런 일을 맡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좌천', 심지어 '징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고가 나면 그 담당자가 모든 책임을 지는 구조다.
그 일을 지시한 사람도, 그 업무를 맡게 한 사람도 책임지지 않는다.
오직 질책만 할 뿐이다.
이제 막 인사발령을 새로 받아 업무 파악도 힘든 시점에 터지는 불행,
명령에 의해 위험한 상황에서 수색에 투입되서 일어나는 사고,
악성 민원에 시달려도 어디 하나 하소연 할 수 없는 부조리에서 일어나는 비극이지만
누구 하나 '내 잘못'이라고 나서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오송 지하차도 유가족들의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사과와 책임진다는 말을 들어본적이 없다고 했다.
높은 분들은 실무자들을 질책할 뿐이다.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책임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시스템이 발전한다.
어디서 본 일화이다. 폭설이 왔을 때
미군은 영관급 이상부터 출근했고
한국군은 사병들부터 출근했다고 한다.
영관급 이상이 출근한 이유는 명확했다.
그들이 판단하고 지시하고 책임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병들이 나와서 뭘 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우리 사회의 불행의 원인 중 하나이지 않을까.
2023년 7월 21일
늦은 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어? 어제도 통화 했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초등학교 동창이고 종종 통화를 하지만 몇 달에 한 번 정도였지, 어제통화하고 오늘 다시 통화하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휴가 차 필리핀에 있었을 때도 전화가 왔었다. 난 문자로 ‘휴가로 해외에 왔어’ 라고 보냈고, 친구는 ‘언제와?’라고 다시 질문을 했다. 난 ‘내일’이라고 말했고, 도착한 다음 날 전화가 왔다. 어제의 통화는 평소와 같았는데, 뭔가 좀 우울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오늘 다시 전화가 왔을 때야 난 ‘무슨 일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느낌과 달리 전화는 어제와 같이 평범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유쾌한 비난을 쏟아 냈고, 많이 웃었다. 남편, 아이들과 함께 사는 친구는 산책을 나와 전화를 하는 듯했다. 그렇게 평범하게 흘러가던 대화는 점차 심각한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그 친구를 알게 된지 30년이 되어가지만, 난 그 친구가 그렇게 많은 고민과 어려움 속에서 사는지 알지 못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였다. 어릴 때부터 단정하고 밝은데다 공부도 잘해서 남학생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나도 잠시 좋아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친해지기 위해 엄청 노력했는데 이상하게 친해지면서 이성적인 감정이 사라졌다. 그것이 오랜 기간 나와 그 친구를 ‘친구’로 유지시켜 주었을 것이다. 공부를 잘하던 그 친구는 명문대 법대에 진학했다. 그 뒤로도 우리는 일 년에 한 번 쯤 만나고 6번 쯤 통화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좀 특이 했던 것은 그 친구였는데, 종종 자기 남자친구를 나에게 소개해 주고 나의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을 한다고 했다. 새로 사귀는 남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좀 급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워낙 똑똑하고 야무진 친구여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결혼을 한 친구는 남편을 따라 해외로 갔고, 연락은 뜸해졌다. 다시 연락을 한 것은 귀국한 이후였다. 돌아 왔을 때 친구는 두 아이의 엄마였다.
친구의 가족은 화목했는데, 문제는 지금 남편과 가족이 아니었다. 나와 알던 시절의 친구의 가족사가 그를 힘들게 했다. 친구는 대학을 다닐 당시, 취업을 했을 당시의 힘들었던 일을 처음으로 나에게 이야기했다. 자기가 왜 고등학교까지 공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처음 들었다. 그리고는 울었다. 우는 모습은 종종 봤지만, 그렇게 서럽게 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 평생 가장 말없이 남의 말을 듣기만 했다. 상갓집도 많이 갔지만, 이럴 땐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물론 울음을 그치고, 다시 일상의 이야기도 돌아갔고, 우린 다시 서로에 대해 유쾌한 비난을 쏟아 부으며 전화를 마쳤다. 그래야만 전화를 마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상대를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전화를 끊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나는 사실 조금도 모르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30년 지기 친구의 가장 중요했던, 그 힘들었던 순간도 난 몰랐으니까. 통화 도중 친구가 물었다. ‘너 나 얼마나 알지?’. 난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이렇게 통화할 만큼?’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네.’
답은 했지만, 난 그만큼이 얼만 큼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누구도 얼만 큼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또 그리고 그 힘든 시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해 친구에게 많이 미안하다.
그런 복잡한 마음에 밤늦게 걸려온 친구의 전화 한통에 밤새 뒤척여야 했다.
2022년 7월 12일
저출산이 어디 출산하면 집주고, 돈 좀 주면 해결되는 문제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왜 결혼을 하지 않는가?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결혼을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집과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하다. 그게 최소한이다. 그런데 집 값은 천정부지로 오른다. 이미 빚을 내어 집을 산 사람의 숫자가 어마어마하다. 이런 상황에서 집 값은 떨어져도 안 되고, 더 올라도 안된다. 지방과 농촌은 집 값이 싸다고 하는데, 그곳에는 일자리도 생활 인프라도 없다.
더욱이 좋은 일자리도 없다. 대기업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수는 극소수다. 대기업에 들어가도 그 월급만 갖고 수도권에 집을 사는 것은 수 십년이 걸린다. 한국처럼 대기업, 중소기업의 임금격차가 큰 나라에서 중소기업에 들어간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젊은이들이 주식과 코인에 빠지는 이유이다.
집을 살 수도 없고, 좋은 직장도 드물다. 결혼을 할 수가 없다.
미래는 더욱 암울하다. 한국은 대학의 간판이 많은 것을 결정한다. 그런데 이미 소위 명문대 학생들의 대부분은 상류층의 자녀들이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계급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것이 '공부'였는데 그것도 이미 가진자들의 특권이 되어버렸다.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게 되는 이유이다. 나야 기왕 태어났으니 미래가 암울해도 살 수밖에 없지만. (그나마도 포기하고 자살하는 사람 비율도 한국이 1위다), 이 암울한 미래를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는 것이다. 심지어 교육비는 어마어마하게 들고, 그 교육을 위해서 부모들은 자신의 현재를 포기하게 된다. 부모가 행복하지 않은데 자식이 행복할 수 없다.
좋은 미래를 물려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아이를 낳지 않게 된다.
이런 사회 구조는 제조업 중심의 경제구조가 깨지면서 필연적이다. 선진국 경제의 중심은 금융, 첨단제조업, 콘텐츠 산업 등이고 우리나라도 점차 그렇게 가고 있다. 이런 경제 구조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전문성을 갖춘 인력들이다. 이런 인력은 대학 혹은 그 이상의 교육을 받아야 배출 가능하다. 예전 제조업 중심 사회에서는 중등교육만 받은 사람도 충분히 현장에 투입 되었지만 이제는 불가능하다. 아니 투입 되더라도 임금의 격차는 클 수밖에 없다.
경제구조는 계속 변화하는데, 우리는 기존 사회 질서를 바꾸는 것에 소극적이다. 20세기 자본주의의 황금기에는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의 격차가 줄어들었지만, 이제 다시 그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자본수익이 훨씬 더 이익이 크다. 이것은 소득격차가 점차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 격차가 커지만 사회의 불안이 가중된다는 것이다. 그 격차가 어느 임계점을 넘으면 항상 커다란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것은 사회의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다.
환경문제는 어떤가. 기상 이변은 벌써 일어나고 있다. 이제 40년을 조금 넘게 산 나도 기후의 변화를 체감 중이다. 다행이 나는 선진국 대열의 나라에 태어나 좋은 의료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날로 변화하는 지구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19 와 같은 팬대믹도 내 세대가 겪는 극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이다.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그런데 이 사회는 젊은이들의 이런 실패를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쉽게 돌려 버린다. 그러니 역대 최강의 스펙을 쌓은 젊은이들은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부족을 자책하고,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개인의 노력도 성공의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좌절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회의 실패다. 결국 저출산 문제는 한국 사회의 실패다.
이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많은 대안들이 제시되었다. 소득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기본소득 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젊은 세대일 수록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위에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불평등한 젠더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페미니즘이 21세기 초반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물론 이중 그 무엇도 쉽게 받아드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강한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고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그것들이 다 옳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다만 논의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다른 대안들이 등장하지는 않을까?
2022년 7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