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이 한창 뜰 때 블록체인 기술을 살펴본 적이 있다. 여전히 이 기술에 대하 잘 알지는 못하지만 P2P방식을 기반으로 데이터를 소규모 데이터 '블록'에 나누어 저장하는 데이터 위변조 방지 기술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 기술의 사용 범위가 무궁무진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당장 내가 사용하는 질병관리청 쿠브 어플도 블로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위변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시중 은행 등 보안을 중시하는 곳에서는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고 들었다.
가상화폐 중 상당수는 이런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탈중앙화'를 외치는 이들의 주장과 도전은 일부 정당해 보이기도 하고,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기반으로 한 가상화폐는 언듯 안전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난 처음부터 여기에 의문이 있었다.
화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속이다. '금화'와 '은화'. '동전'을 사용할 때에도 그만큼의 금, 은, 동이 사회적으로 가치를 인정 받아야 한다. 예를 들어 금이 전혀 사회적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많은 양의 금화는 가치를 갖지 못한다. 심지어 금이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경우에도 재난이 벌어져 사회적으로 실물이 더 중요해 졌을 경우에도 역시 금은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한다.
현대 화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있다. 지폐는 그야 말로 국가가 보장하는 종이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폐를 발행하는 국가는 지폐의 위조를 엄격하게 처벌하며, 방지를 어렵게 만든다. 국가의 신뢰도에 따라 각 국 화폐의 가치와 안정성도 달라진다. 이것이 소위 기축통화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이 어려운 시기에도 달러가 강세인 이유이다.
가상화폐는 아직 어느 것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위변조가 거의 불가능하고, 때문에 사용가 간의 동의가 있으면 화폐의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가상화폐를 정말 화폐로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목적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화폐로 다시 바꿔서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것이다. 더욱이 가상화폐는 국가처럼 그 가치를 보장해주는 국가도 없다. 탈중앙화를 외치긴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치를 보장해주는 '중앙(국가)'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국가가 발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가 보장해 줄 수도 없다. 등락폭이 커도 통제할 중앙이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20세기 후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국경이 무너질 것이라 예측을 했지만, 21세기 중반으로 가는 지금 국경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으며, 국민국가체제 역시 흔들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애국주의와 국가주의는 몇몇 국가를 중심으로 더 확대되고 있다. 가상화폐라는 국경 없는 화폐의 실험이 내 예측을 비웃고 성공할 수 있지만, 지금으로서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1. 프롤로그 여행을 좋아하긴 하지만, 많이 다녔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언젠가부터 직장 생활과 여러 핑계로 여행을 잘 가지 않게 되었다. 사실 이정도면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것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른다. 여행이 낯선 곳으로의 떠남이라면, 내 첫 여행은 중3때 친구와 종로에 있던 피카드리 극장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여행보다 모험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낯선 곳으로의 떠남이 주는 설렘, 찾아가기 위한 계획 등을 짠 것 등을 고려해보면 첫 여행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 첫 여행은 친구와 함께였다. 나의 본격적인 여행은 대학교 때 ‘답사’부터였다. 사학과를 진학한 나는, 봄과 가을 두 번의 정기 답사를 갔고, 당시 따로 가입한 학회(과내 공부 동아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답사를 갔으니 답사만 따라다녀도 일년에 6번의 여행을 하게 되는 셈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답사 외에도 또 한 번의 여행이 있었는데, 내 첫 여행을 한 친구와의 이상한 여행이었다. 답사 두 번 갔다고 자신감이 생긴 나는 친구와 무작정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을 보기위해 여행을 떠났다. 시외버스를 타고 떠난 그 여행은 영주, 안동, 부산, 거제를 거쳐 다시 부산으로 와서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계산된 것은 없었고, 그냥 생각나는대로 갔던 여행이다. 지금은 사진 한 장 없는 여행이지만, 이것이 내가 떠난 첫 번째 ‘장기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군대를 다녀온 다음에도 여행은 참 많이도 갔다. 새벽에 경주 월지에 혼자 들어간 적도 있고, 병산서원 앞 낙동강에 발을 담그고 논 기억도 있다. 답사를 가서 히치하이킹을 해서 강원도 정선부터 월정사까지 간 기억도 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이런 답사를 가장한 모험과 여행은 계속되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8일간 혼자 일본에 갔던 것이다. 돈이 없어 걷고 또 걸으며 다녔던 수는, 오전에는 대학 도서관, 오후에는 여행, 저녁에는 일을 하는 일정으로 꾸려졌는데, 내 첫 혼자 떠난 해외 여행이기 때문이다. 박물관에 있을 때는 중국을 몇 번 갔고, 박사과정 때는 대학원 총학의 주최로 그리스-터키를 갔다.
직장을 다니며 경제적 여유가 조금 생기면서 해외를 본격적으로 나갔다. 이탈리아, 스페인, 우즈베키스탄, 필리핀 등이 직장을 다니며 가게 된 여행지이다. 모두 기억에 남고, 즐거웠다.
이 모든 여행에는 공통점이 있다. 가고 싶어서 갔고, 그래서 갖게 된 설렘이다. 계획을 짜는 그 순간부터 흥분되고, 짐을 싸는 그 순간은 너무 신이 났다. 여행 전날 밤에는 여행에서 만날 새로운 풍경과 인연에 잠이 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점차 가고 싶은 곳도 점차 사라지고, 그러니 설렘도 사라졌다. 여행의 빈도도 줄어들었다.
친구에게 여행 제안을 받은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친구는 어디를 가서 좀 걷자고 했고, 난 선뜻 좋다고 했다. 대학교 때 만난 친구는 누구보다 나와 함께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이었고, 서로의 취향을 대략 알고 있었다. 그리고 20년이 넘는 세월은 조금 다른 취향 정도는 서로 맞출 수 있는 인간관계의 숙성을 가오기도 했다. 난 물론 흔쾌히 좋다고 했다.
준비는 상대적으로 쉬웠다. 아니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숙소를 예약하는 것으로 준비를 끝냈다. 간만에 친구와의 여행에 기분 좋은 설렘을 느껴보려고 했는데, 할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짐도 단촐해서 금방 꾸렸다. 의외로 떠나기 전 가장 큰 위기는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의 몸 상태였다. 친구는 전날 아프다고 연락이 왔고, 난 조금 철렁했다. 나라도 먼저 가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이 극적으로 친구의 몸상태는 회복됐고(어쩌면 억지로 회복 되었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예정보다 시간만 조금 늦춰진 여행을 떠났다.
2. 첫 날 친구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날씨도 기분도 좋았다. 친구 집으로 가는 도중 네비게이션을 제대로 보지 못해 조금 돌아가긴 했지만, 생각보다 수월하게(?) 친구의 집에 도착했다. 문제는 그 와중에 마시려고 사 놓은 술을 놓고 갔다는 것인데, 친구 전화를 받고 너무 신나게 출발하면서 그만 그것만 빼놓은 것이다. 다행히 친구는 다음에 먹으면 된다고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하긴, 둘의 여행이 오랜만인 것이지, 만남이 어려운 것은 아니니까. 나도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강릉까지는 길도 많이 막히지 않았지만, 대화를 하다보니 정말 금방 도착한 기분이었다(이건 물론 운전을 한 친구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이른 새벽에 출발하기로 한 것이 여러 사정으로 조금 늦춰져, 길이 막히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평일 낮의 도로는 생각보다 한산했고, 조금 늦은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시간에 강릉에 도착했다.
조금 늦은 점심을 먹고,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걷기로 했으니 걷기 위해 나왔다. 우리는 경포호를 한 바퀴 돌았다. 경포호는 너무 넓어 한 바퀴 도는데 몇 시간은 걸린 것 같았는데, 한 시간이면 돌 수 있었다. 곳곳에 산불 피해의 흔적이 보였다. 우리는 경포호를 한바퀴 돌고, 안목해변까지 내리 걸었다. 강문의 긴 솔밭을 지나 안목 해변까지는 한 시간 남짓 걸렸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걸어야 하기에 몸을 적응시킨다고 생각하고 걸었는데, 처음엔 생각보다 수월하다고 생각했던 걷기는 두 시간이 다 되어가자 힘에 부쳤다. 무엇보다 오른쪽 새끼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경포호를 걷는 도중(좌), 해질 무렵의 해변(우)
하지만 걷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적당한 온도, 맑은 하늘, 푸른 바다, 솔밭,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이야기 나눌 친구. ‘걷기에 가장 좋은 환경은 이런 것이 아닐까?’란 생각마저 들었다. 난 혼자 여행을 꽤나 즐기는 편이지만, 혼자 하는 여행은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힌다. 외로움이다. 좋은 것을 봐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을 때,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숙소에 혼자 멍하니 있을 때, 긴 이동 시간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할 때 등 외로움은 여행에서 문득, 잊을 만하면 찾아온다. 혼자 여행이 주는 장점도 역시 헤아리라고 하면, 몇 개 당장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말할 수 있지만, 외로움은 저 장점들을 가끔 잊게 할 만큼 강하게 찾아온다. 이번 여행에는 그 외로움이 없었다. 가는 길에,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목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숙소로 돌아와 씻고, 택시를 타고 친구가 찾아 놓은 맛집을 찾아갔다. 우리를 태워준 택시기사의 조카가 운영하는 집이라고 했다. 꼬막 비빔밥과 참치 마구로는 꽤 맛있었다. 아직 다 회복하지 못한 친구의 건강과, 내일 일정에 대한 나의 두려움 때문에 첫날 일정은 여기서 마치기로 했다. 숙소로 돌아와 나만 맥주 두 캔을 더 마시고 잠이 들었다.
3. 둘째 날 우리가 걷기로 한 길은 해파랑길이다. 부산부터 고성까지 동해안을 잇는 이 길은 총 50개의 코스로 이루어졌다. 이날 우리가 걷기로 한 길은 강원도 동해시 묵호에서 옥계역까지 이어지는 34코스였다. 동해에서 묵호까지 걷는 것이 정방향이었는데, 옥계역에서 동해로 가는 버스도 놓치게 되어 결국 역방향(옥계에서 묵호항까지)으로 걷기로 했다. 거리상은 12km 약 3시간이면 갈 수 있었다.
아침을 먹고 안목해변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이른 시간에 문을 연 집이 별로 없어 들어간 커피숍은 호텔을 겸하는 것 같았는데, 윗층(정확히는 6층)의 전망이 매우 훌륭했다. 젠주라는 이름의 커피집이었다. 커피까지 충전하고야 우리는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며 본 풍경
여정은 시작부터 험난했다. 날은 맑았는데,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우리가 걸어가는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맞바람이었다. 파도는 무섭게 일렁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파랑길 동해시 부분의 안내가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우리는 덕분에 여정의 시작부터 길을 헤맸다. 길을 잘못 들어 한참을 가다 길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제대로 된 길을 찾았다. 살짝 짜증이 날 뻔도 했지만, 친구와 서로 안내판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 사람들을 욕하며 짜증을 날려보냈다.
처음 본 해파랑길 이정표(좌), 이후부터는 오른쪽과 같은 이정표를 찾을 수 있었다.
역시 걷다 보니 좋았다. 맞바람도 강하고 어제부터 잡히기 시작한 물집이 계속 거슬렸지만, ‘좋음’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뭐가 좋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무언가 특정해 말하기는 어렵다. 그냥 그날 그 시간에 그곳을 친구와 함께 걷는 것이 좋았다고 하면 될 것이다. 걸으며 나누는 걷기에 대한 효능에 대한 이야기도, 마주치는 사람들에 대한 추정도, 풍경에 대한 감상도, 지금 생각하면 시답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마냥 즐거웠다. 우연히 찾아간 길에서 발견한 좋은 풍경도, 걸으며 찍은 별거 아닌 영상도 그냥 좋았다.
그날 걷다가 본 풍경들. 파란 하늘과 거친 파도를 모두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좋은 것과 힘든 것은 다른 문제였다. 내 물집은 점점 커져갔고 거센 바람은 도저히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우리는 걷는 도중 본 온천에 가기로 했고, 묵호항에 도착하자 곧 택시를 잡고 온천으로 갔다. 힘들게 걸은 길이었는데 차로는 금방인 것이 조금 허탈하기도 했지만, 그것마저 서로 웃으며 이야기 할 좋은 이야기 거리일 뿐이었다. 온천을 하며 떨어진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고기’를 먹기로 했다. 역시 친구가 알아 놓은 곳이었다.
숙소에 가서 휴식을 취하고 옷을 갈아입고 고기를 먹으러갔다. 식당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특별한’ 위치에 있는 식당의 고기는 맛있었고, 무엇보다 식후에 나오는 된장찌개는 일품이었다. 다 먹고 난 후에는 역시 친구가 알아둔 한 맥주 부루어리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 꽤 신선한 맥주를 마실 수 있어 좋았다. 역시 숙소에서 가볍게 맥주를 마시고 잤다.
음식사진은 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이 고기와 된장찌개는 너무 맛있어서 올림.
4. 셋째 날 셋째 날, 친구가 무릎 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다. 어제 마신 맥주 탓일 수도 있고, 생각보다 젊지 않은 우리 몸 때문일 수도 있었다. 겨우 40대 초중반에 무슨 나이 탓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20대와 같이 뛸 수도 없고 빠르지도 않다는 것이다. 20대에 당연하던 것들이 이제는 노력을 해야만 가능한 나이가 됐다. 다행히 내 물집은 마법처럼 아프지 않았다. 전날 물집에서 물을 좀 뺐는데, 그것에 효과를 본 모양이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었으니 무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상황에 맞춰 가보자고 했다.
역시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일정을 시작했다. 이번에도 안목의 커피집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그 커피집은 전명의 거대한 유리가 위 아래로 열렸다. 친구도 몇 번 와본 곳이라고 했는데, 문이 열리는 것은 처음 본다고 했다. AM이라는 커피집이었다. 둘이 동시에 휴대폰을 꺼내어 영상을 찍었는데, 남들이 봤으면 조금 웃꼈겠다는 생각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조금 든다. 우리는 신기한 경험을 뒤로 하고 여정을 시작했다.
여정은 경포호부터 주문진항까지였다. 해파랑길 39코스 일부와 40코스를 걸었다. 이곳에서야 강릉산불의 피해가 심각하게 다가왔다. 사근진과 순긋해변 근처의 마을들은 산불로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살아남은 집은 정말 운이 좋아서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바로 옆집인데 한 집은 모두 불에 타고, 한 집은 약간의 피해로 끝나기도 했다. 바람도 어제와 같이 강하지 않고, 하늘은 어제만큼 맑아 걷기는 오늘이 더 좋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다. 걷는 이야기 가운데 상당부분이 산불에 관한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 모습은 처참했다. 바다가 아름다워 더 슬픈 풍경이었다.
길을 걷다 본 강릉 산불의 피해의 현장
사천으로 다가가자 풍경이 바뀌었다. 높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었고, 새롭게 짓는 팬션도 눈에 많이 들어왔다. 무언가 사천항 주변으로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까지는 찾지 못했다. 유명하다는 박이추커피공장에서 잠시 커피를 마시며 쉬었다 다시 걸었다. 강릉 부근의 해파랑길은 강릉에서 조성한 바우길을 잘 활용한 것 같았다. 안내도 친절하게 되어 있었고, 다시 돌아가기 위한 대중교통도 잘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는 중간중간 사람이 없는 해변에서 드론을 날리며 쉬엄쉬엄 갔다. 다행이 친구의 무릎도 괜찮은 것 같았다.
주문진항 부근은 온통 공사 중이었다. 여름을 대비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걸을 수 있는 길이 없었고, 위험하기도 했다. 보아둔 식당까지는 택시를 불러서 갔다. 메밀막국수와 수육을 잘한다는 집에가서 점심을 먹었다. 막국수도, 수육도 맛있었다. 식사 후에는 경포로 돌아가는 버스를 바로 탈 수 있었다. 시티(Sea Tea)버스라고 명명된 이 버스는 강릉의 명물인 바다와 차(아마도 커피)에서 이름을 가져온 듯 보였다. 쉬엄쉬엄 왔지만 네 시간 가까이 걸어서 온 길을 버스는 20분만에 도착했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씻고 선물가게로 갔다. 친구 딸의 선물을 사기 위해서 였는데, 나도 마리를 돌봐주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샀다. 술을 먹으러 간 곳은 교동이었는데, 서울의 웬만한 번화가 보다 훨씬 크고 화려했다. 친구는 “네가 사는 성북동 보다는 여기에 훨씬 프렌차이즈 술집이 많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정도가 아니라 내가 서울에 살면서도 보지 못한 프렌차이즈 식당과 술집이 많았다. 이곳에서 회와 맥주와 사케, 그리고 위스키를 마셨다. 밤바다를 보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1층 바에서 생맥주를 한 잔씩 마셨다.
밤바다에서 찍은 친구와 나
5. 마지말날과 에필로그 돌아가는 날이다. 비가 아주 약간씩 떨어졌다. 우리는 짬뽕순두부로 유명한 동화가든이라는 곳을 갔는데, 8시 40분쯤 도착했지만 사람이 많아 식사는 한 시간 후에나 할 수 있었다. 밥을 먹고 강릉중앙시장을 갔다. 강릉을 여러 번 와본 친구는 시장의 이곳저곳을 안내했다. 생각해보니 강릉에 오며 좋았던 곳은 다 친구의 안내 덕분이었다. 나야 혼자 와서 몇 곳 둘러보고 간 것이 전부였기에 잘 아는 곳이 없었다. 이것저것 먹을 것을 좀 사고, 친구 딸에게 줄 기념품도 하나 샀다. 그리고 강릉을 떠났다.
강릉시장. 토요일이 되니 오전임에도 사람이 북적거렸다.
대관령을 넘으니 비가 꽤 오기 시작했다. 태백산맥의 위용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운전은 계속 친구가 했다. 친구 집에는 2시 30분 전후에 도착한 것으로 기억한다. 거기서 친구와 햄버거로 점심을 먹었다. 다시 내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짐을 풀고 씻고, 마리와 침대에 누웠는데, 많이 삐친 모양새다. 먹을 것으로 달래 봤는데, 쉬이 풀리지 않는다. 그래도 억지로 않고 침대에 다시 누우니 도망가진 않는다. 외로웠던 모양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여행은 늘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일상의 강고함이 있기에 가능한 모험이기도 하다. 일상은 지루한 듯 반복되지만, 내 삶을 지켜주는 버팀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언제나 약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날씨, 교통, 언어 등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험에서 만들어진 추억들은 내 일상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추억을 함께 한 사람이 있다면, 나중에 그 추억을 함께 나누는 것만으로도 다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친구와의 여행이 좋았던 것도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여행 내내 새로운 추억을 만들기도 했지만 지난 추억을 곱씹으며 다녔다. 그리고 다시만든 이 추억으로 또 행복한 일상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어린 시절, 아니 지금도 가끔 두렵고 궁금한 질문이 있다. 하나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이다. 이 책의 저자인 룰루 밀러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인생의 의미를 물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들을 답은 뜻밖이었다. “의미는 없어” 그녀의 아버지는 신도, 계획도 내세도 운명도 없으며, 심지어 우주에서 인간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존재임을 역설한다. 그리곤 “그러니 너 좋을 대로 살아”라고 결론을 내린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우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나, 혹은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오늘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우주는 물론 우리 사회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저자는 그럼에도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 과정에서 사랑도 하고 이별도 했다. 그리고 이별의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다 찾아낸 사람이 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학자였다. 저자는 그의 자서전을 발견하고는 그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한다. 그는 스탠퍼드의 초대 학장이었고, 지금까지 알려진 어류의 1/5을 ‘발견한’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연구와 노력이 집약된 연구 샘플이 화재와 지진으로 두 번이나 크게 상실의 위기에 쳐했을 때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실을 표본에 직접 꿰매는 방법을 고안해 내기까지 했다.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그의 자세는 저자에게 큰 감명과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더 알아가는 순간 저자는 다시 혼란에 빠진다. 그는 우생학의 신봉자였다. 단순히 그가 우생학의 신봉자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과학자인 그가, 그가 그토록 신봉하며 따르던 과학의 근거들에 의지하지 않고, ‘믿음’에 근거하여 우생학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더 존귀한 생명체가 있으며, 인간 역시 더 귀한 존재가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믿음은, 그가 과학적으로 의지하던 다윈의 학설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결국 그의 이러한 믿음은 미국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결국 20세기 초반 미국은 다양한 방법으로 임신중절을 강요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러한 법은 지금도 완전히 사장되지 않고 남아 미국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오히려 다시 희망을 발견한다. 그에 의해 만들어진 정책의 희생자가 결국은 이 사회의 일원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리고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놓치는 일’이라는 다윈의 관점을 상기한다. 그러면서 세상의 다양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의미 없는’ 존재일 수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중요한 존재’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저자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사실은 학자로서 큰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후에도 그의 연구를 따라가며 친구인 캐럴 계숙 윤을 통해 또하나의 놀라운 사실과 마주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생물학적으로 볼 때 ‘어류’란 굉장히 모호한 관점이며, 하나로 묶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유럽인들이 아라비아반도,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의 여러 지역, 코카서스지역,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아시아인’으로 묶는 것, 혹은 모든 아프리카 대륙에 사는 사람들을 ‘아프리카인’으로 묶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물론 책에서는 어류와 관련해서 보다 과학적인 설명들을 제시한다). 기존의 분류(즉 비늘이 있고 척추가 있어 물속을 헤엄치는 동물을 어류로 묶는)는 직관의 영역일 수 있지만, 그것은 편리에 의한 것일뿐 과학적 사실은 아니라는 것 역시 이야기한다.
그러면 어류를 포기해서 얻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은 또 다른 세계이다. 어류라는 하나의 단위로 모든 물고기를 묶었을 때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들. 그리고 우리가 ‘물고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또 알지 못하는 것들은 무엇일까라는 지식에 대한 겸손 같은 것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이런 지적 호기심을 채워 주는 것 이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흥미로웠음을 밝힌다. 이 책은 저자인 룰루 밀러의 자서전이기도 하며, 데이비드 스터 조던이라는 사람의 평전이다. 동시에 과학교양서이자, 현재의 배우자와 가족에게 바치는 연애편지이다. 각주를 제외하면 28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에 이 모든 내용을 매우 흥미롭고 밀도 있게 담고 있다는 것은 저자의 놀라운 필력과 구성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추천.
어떤 후보의 유세장에 갔던 것 같다. 어느 버스 앞을 지나가는데, 핸드폰이 떨어져있었다. 같이 갔던 사람(누군지 기억이 안난다)이 나에게 그냥 가다가 경찰한테 맡기고 가자고 했는데, 난 분명히 버스에 탄 사람 중 한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해서 버스에 올랐다.
버스 내부는 그야말로 럭셔리했다. 테이블이 곳곳에 놓여있고, 그곳을 둘러 의자가 놓여져 있는 버스였다. 내가 타서 핸드폰 주인 계신가요? 라고 묻자, 어떤 사람이 나를 제지하면서 핸드폰을 빼았았다. 그러더니 핸드폰 주인을 확인했다. 그러던 와중에 내 앞에 있는 어떤 여자가, '기사 출발하세요~'라고 말했다. 난 '잠시만요? 저 내려야 하는데요?'라고 하자 그 여자는 다시 '그냥 가세요'라고 말했다. 내부 분위기에 왜인지 모르게 위축된 나는 그냥 버스를 타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내부를 살펴보니, 앞에 서 뒤쪽을 바라보던 내 시아에서 보면 바로 앞에 뒤를 보고 앉아 있던 기사에게 출발을 하자고 했던 여자가 있었고, 그 테이블에는 딸로 보이는 여자도 있었다. 그 다음 테이블에는 역시 뒤쪽을 보고 앉아 있는 남자가 있었고, 20대로 보이는 예쁜 여자들이 5명정도 앉아 있었다.
버스가 한참을 가자, 집에 갈 생각에 불안해진 나는 다시 내려야겠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기사에게 출발하자고 말했던 여자가, '이 의원(솔찍이 이 의원은 이름까지 기억나는데 여기선 생략) 이 분에게 사례금 좀 주세요.'라고 말했다. 난 일단 사양했다. 핸드폰 주워준 것 갖고 무슨 사례냐고 하면서 여기가 어딘지 모르니 정 돈을 주시겠다면 택시비만 달라고 했다. 그 때 그 의원이 나를 보고 일어서며-이때 그 이름과 얼굴이 정확히 일치했다- 돈봉투를 건냈다. 얼핏봐더 두툼한 봉투였다.
난 잠시 갈등했다. 꿈이라 그래서일까,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는데도, 수표와 현금이 새 돈으로 두둑하게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얼핏봐도 1000만원 이상 된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20대 여자 5명, 그 여자의 딸, 내게 핸드폰을 빼앗았던 사람, 그 의원까지. 오직 그 여자만은 나를 처다보지 않았다. 솔찍히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의 시선 때문이었을까 난 다시 사양했다. '무슨 핸드폰인지는 몰라도, 그 핸드폰 찾아 준 것으로 이런 돈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이야기 했다. 그 의원이 다시 말했다. '그냥 받으세요! 정말로 안 받으실겁니까?' 난 다시 갈등했다. 갑자기 돈을 받아야할 모든 이유가 떠오르며 합리화가 시작됐다. 예를 들면 '이 돈이면 어머니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던 성지순례도 보내드릴 수 있다' 따위의..
결국 난 집에서 점점 멀어져간다는 궁색하고 비참한 이유를 대면서 돈을 받았다. 아마 그때 나를 보던 사람들은 '그럼 그렇치'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여자는 얼굴을 끝까지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돈을 받자 버스가 섰고, 나를 내려줬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왔는데, 결국 온 곳은 경기도 광주의 외각 쯤이었다. 광주는 여전히 나에게 낮선 곳이고, 난 그곳에서 택시를 잡으려 했다. 손에 봉투를 꼭 쥐고. 그러면서 다시 갈등이 생겼다. '내가 고작 이거 밖에 안되나? 그 의원실을 찾아가 돌려주자.'와 '이 돈으로 효도나 하자.'란 갈등. 그 와중에 택시는 잡히지 않았고, 난 여전히 봉투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 이후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갈등을 계속했던 느낌만 있다. 꿈에서 깨었을 때, 내 손에 역시나 봉투 따윈 들려있지 않았다.
꿈에서 깨어나 생각해보니, 무슨 비리를 덥어준 것도, 못볼 것을 본 것도 아니었는데, 그들은 왜 나에게 그리 큰 돈을 주었으며, 나는 그 돈 받는 것을 왜이리 부끄러워 하며 받으려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돈을 받을 때 사람들의 '그럼 그렇치'하는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빨갱이. 나는 이 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지만, 어린 시절 이 말을 들으면 왜인지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곤 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아이도, 저 단어를 내뱉는 사람들이 가진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저 적의에 가득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모른 체 두려움에 떨며 동조하며, 저 적의를 내재화했다. 저들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나도 '빨갱이'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 단어를 평생 꼬리표처럼 달고 살아온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삶은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이데올로기는 - 그것이 무엇이라고 -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도 쉽지 않았다. 조금 모자라고, 가끔은 찌질하고, 종종 우스워지고, 때로는 한심한 것이 우리들의 삶이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저런 모자람과 찌질함과 우스움과 한심함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미워도 하지만 끝내 서로와 부딪히며 산다. 평소라면 그것이 심해지면 '얼굴 안 보고 살면 그만'이었을 것이지만 어떤 시대에는 서로를 증오해서 죽이고야 말기도 했다. 그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수많은 '배신'을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한 사람이 겪어온 삶은, 적의에 가득 찬 '빨갱이' 딱지를 달면서도 그 신념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의 깨우침인지, 타협인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모를 무언가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들까지 고스란히 자신의 짐을 함께 져야 했기에, 그 마음의 짐을 또 스스로 지고 가야 했던 사람이 아니면, 저 생각을 단순히 '천성'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중 아버지는 죽음으로 해방되었다. 유물론자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는 없으니, 먼지에서 태어나 먼지로 돌아간 그에게 그사이의 삶이란 선택하지 않았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여러 관계와 선택을 강요 받는 감옥과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수많은 관계에서 때로는 싸우고, 때론 순응하지만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삶 말이다.
죽어서야 해방되었던 작중 '빨갱이' 아버지와 그를 둘러싼 여러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묘한 위로를 준다. 그는 '빨갱이'였지만 평범한 아버지였고, 남편이었고, 이웃이었으며, 형이었고, 삼촌이었다. 그런 그의 특수하지만 평범한 삶은, 죽음이라는 누구나 맞이하지만 아무도 경험담을 이야기할 수 없는 그 두려움의 세계가 모두에게 공평하며, 그곳에 도달하기까지의 삶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애도(哀悼) : 남의 죽음, 심한 정신적 고통, 불운을 슬퍼하는 동정심의 표현. 이렇게 위키피디아는 애도를 정의하고 있다. 우리는 남의 불운에 때론 고소해하지만, 큰 불행 앞에서는 대부분 동정심을 갖기도 하고, 함께 아파하기도 한다. 맹자는 선을 싹틔우기 위한 인간의 본성으로 사단(四端)을 이야기 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측은지심(惻隱之心), 즉 어려운 상황을 당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애도의 표현은 다양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을 조용히 생각하며 시끄러운 노래나, 신나는 음악을, 흥겨운 춤을 자제 하는 것으로 애도의 마음을 표현할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이 시끄러운 노래를 부르고, 신나는 노래를 부르고, 흥겨운 춤을 추며 애도를 표할지 모른다. 애도의 방식이 모두 같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을 흥에 겹기 위해 술을 마시지만, 어떤 이들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는 행위만 갖고 마시는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어떤 이들은 슬프면 생업에 집중하지 못해 방황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생업에 집중하며 슬픔을 잊으려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생업을 멈추고 싶지만, 먹고 살기 위해 생업을 꾸역꾸역 유지하기도 한다. 슬픔을 극복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국가적 슬픔에 국가가 애도기간을 정한 것은 그럴 수 있다. 애도기간을 정한 것 자체를 비판할 생각도 없다. 아무도 ‘내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국가가 애도기간을 정한 것 자체가 국가의 책임을 통감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기도 하다. 다만 애도의 방식까지 국가나 정부가 정할 필요는 없다. 리본을 어떻게 다느냐를 정부가 정해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문학가는 문학을 통해, 미술가는 미술을 통해, 음악가는 음악을 통해, 연극인은 연극을 통해 애도할 수 있게 하면 된다. 이들을 모두 막고 하지 못하게 하는 것만이 애도 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애도가 더 많은 이들을 위로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예술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애도 하도록 둘 수도 있는 일이다.
유흥업소를 강제로 휴업하게 하는 것이 애도일 수 없다. 그것은 생계의 문제이다. 휴업을 하지 않는다고 유흥업소 사장이 애도 하지 않는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고, 그곳에 찾은 사람들이 애도하지 않는다고 속단할 수 없다. 집에만 있으면서 애도는커녕 증오의 언어만 뱉어 내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일요일 아침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에 무슨 일이냐고 하겠지만, 주말 내내 학술회의에서 발표할 글을 쓰는 중이었다. 처음부터 슬픔이 차오르고, 눈물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화가 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150명 넘는 사람이 압사를 당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아무런 안전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슬픔은 잠시 후에 찾아왔다. 보고 싶지 않았는데, SNS에서 모자이크 처리되지 않은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길에 늘어져 누워 있었고, 사고를 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급하게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끔찍한 것은 그렇게 심폐소생술을 해도 꼼짝도 하지 않던 사고 피해자들이었다. 얼른 영상을 껐지만, 영상은 내내 뇌리에 남았고, 조금 더 일찍 끄지 못한 내 자신을 자책했다. 그리고 슬픔이 밀려왔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20대였다고 한다. 한창 젊음을 발산할 나이다. 술도 마시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객기도 한 번쯤 부려볼 시절이다. 돌아보면 나의 20대도 그러했다. 할로윈과 같은 축제는 없었지만, 대학 동기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도 많이 마시고 객기도 좀 부리고 그랬다. 지금도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그때 조금 더 놀지 못한 것이다. 이제는 그 시절처럼 놀 수 없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고, 이태원에 나간 젊은이들도 그 때를 즐기러 나갔을 뿐이다. 거기서 그런 사고를 당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친구를 잃고 생존한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보고 들었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저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저 상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저 슬픔은 또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 이런 걱정이 앞섰고, 죽은 이들의 젊음과 죽기 직전의 고통과 두려움에 마음이 저렸다. 가족들의 슬픔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150명 모두 누군가의 친구고 가족이었을 것이다. 각자 모두 꿈을 갖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 생명들이 어처구니없이 죽었다. 애도는 이런 죽음에 적당한 말이다.
하지만 진정한 애도가 되려면, 어처구니없는 이 일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하고 지저분할 수밖에 없다. 벌써 책임 있는 위치의 사람들은 서로 본인의 책임이 아니라고 회피한다. 잘못은 젊음을 발산하러 나온 젊은 사람들 몫이라도 떠드는 목소리도 들린다. 외국의 축제인 할로윈을 철없이 즐기러 나온 개념 없는 젊은이들 탓이라는 것이다. 이런 목소리에서 피해자도 그들인데, 가해자도 그들이 된다. 애도는 하지만 잘못은 그들에게 있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원인을 밝히는 일이 어디 쉽고 깨끗하겠는가. 책임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지만 모두 한 마디씩 위로의 말은 전한다. 위로가 될 리 없다. 위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임질 사람이 책임을 지고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때, 조금이나마 피해자들은 위로 받을 수 있다. 이런 분위기이면 잘못한 사람을 ‘색출’해서 ‘처벌’하는 것으로 끝내려 할 것 같다. 아무도 위로 받을 수 없는 방법이다. 세월호가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형인 이유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곳에도 ‘색출’과 ‘처벌’만 있을 뿐이었다.
이런 큰 사건에서 위로는 모두에게 필요하다. 이 상처는 피해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견뎌야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아마 잘 해나갈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이번 참사를 여러 방식으로 기억하며 추모할 것이다. 상처는 차츰 시간이 흐르며 그렇게 치유되어 갈 것이다. 이 치유에 방해가 되는 것은 잘못을 회피하려는 저 권력들뿐이다. 혹자들은 이 사고를 정치화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 말 자체가 정치적이다. 세상에 정치가 아닌 것은 없다. 정치는 정치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모든 것에서 일어난다. 인간관계도 일종의 정치가 아니던가. 더욱이 행정부와 입법부는 정치의 작용인 선거로 선출되고, 선출된 사람들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 그 결정에 의해 우리는 이익을 얻기도 하고 피해를 당하기도 한다. 행정의 부재는 정치의 문제이고, 이 사건의 책임은 결국 정치적인 책임이다. 그렇게 책임을 져야 진심어린 애도가 되고, 위로가 된다. 154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상자도 많다. 그 가족과 친구들까지 생각하면 수많은 사람의 일상이 무너져 내렸다. ‘놀러가서 죽은 사람들의 장례를 국가가 왜 지원해주고, 왜 애도해야 하냐’는 댓글을 봤다. 이번 참사는 이런 무책임한 생각이 만든 일이다.
친구와 친구, 가족과 가족 사이에서 애도와 위로는 말로도 충분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말로 밖에 전할 수 없다. 하지만 국가의 애도와 위로는 말로 끝날 수 없다. 색출과 처벌이 아닌, 반성과 사과를 통한 애도와 위로가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기원하며, 그러기 위해 끝까지 사건의 원인을 따져 보기를 모든 정치인들과 언론에 간곡하게 부탁한다. 다시 한 번 모든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애도를 표하며, 부상자들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임경석 선생님이 쓴 독립운동 열전을 모두 읽었다. 최근 굉장히 바빴는데, 책을 손에 쥔 후에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에서 손을 놓기 어려웠다. 결국은 쉬는 시간을 독서시간으로 삼았다.
책의 내용 중 눈보다 마음에 들어온 것은 연구자가 가진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다. ‘잊힌 사건’과 ‘잊힌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결국 모두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일제강점기라는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어떤 고민을 했는지, 그 고민의 결과 그들의 행동이 어땠는지를 책은 생생하게 묘사한다. 마치 그 사람을 옆에서 보는 것 같다.
소설이 아니기에 이런 묘사를 위해서는 수많은 사료가 기초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그 방대한 사료를 보고 정리한 것을 어떤 식으로 서술하여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은 필수적일 것인데, 그 고민은 대상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의 서술은 인물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객관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니 얼마나 많은 고민이 담겨 있는 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것 같다.
10여 년 전 비오는 날 연구실에서 선생님과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당시 선생님은 그리스 비극과 희극을 읽고 계신다고 했다. 비극은 질 것을 알면서도 신에 맞서는 인간, 희극은 권력에 대한 풍자라고 말씀하시며, 독립운동가를 비극으로, 친일파 등을 희극으로 써 보고 싶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 책에는 그런 선생님의 고민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를 인문학이라고 한다. 결국 인간의 이야기이다. 다만 그 인간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살았던 사회경제적 조건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그들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 시대에 대한 연구자들의 고민과 문제의식도 분명해야 한다. 문제의식이 불분명하면, 이야기 하려는 바를 알기 어렵다. 사료에 대한 이해는 역사학의 기초이지만, 늘 어려운 과제이다. 그래서 가끔 스스로도 공부를 하다보면 길을 잃는다. 어떤 순간에는 사료를 놓치고, 어떤 순간에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망각하고, 그러다보면 인간을 빼먹는다.
선생님의 『독립운동 열전』은 쉬운 문체로 재밌게 읽을 수 있지만, 그 무엇 하나 빠져있지 않았다. 문체는 쉽지만 생각할 거리는 많아, 여운도 깊게 남았다. 늘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책을 읽으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낀다. 그리고 책 속의 인물들의 고민과 행동을 곱씹으며 이 시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인 이유를 역시 이 책을 보며 새삼 느꼈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좋은 역사책이 주는 긴장감이다.
대통령의 지지율은 20%대로 추락했고, 부정 여론은 70%를 넘었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생각.
대통령의 취임 100일은 매우 중요하다. 미국의 경우 취임 100일에 맞춰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세웠던 대표 정책을 법안을 통과 시키곤 한다. 가장 힘이 강한 시기이고, 여론도 긍정적이며, 언론도 이른바 ‘허니문 기간’이라고 해서 우호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정부에서 첫 100일 동안 내세운 정책은 눈에 띄는 것이 없다. 기억나는 것은 이전 정권에 대한 비판과 관련 수사 등이다. 특히 대북 문제에 관한 문제인데, 이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이것만을 내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정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대표적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취임 100일이 됐지만 아직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지지율이 떨어지니 여성가족부 폐지 등의 카드를 들고 나왔는데, 이것은 사회 통합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킬 뿐이다. 그나마도 대표적인 ‘정책’이라고 내세우기엔 부족하다.
더욱이 세계 경제는 위기로 치닫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 곡물가격은 물론 석유 가격도 치솟았고, 거기에 몇 년 전부터 계속된 미국의 양적완화가 불러온 인플레이션은 한국의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거기에 한국은 경기 침체 우려까지 있어 스테크플레이션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미국은 이제 인플레이션을 잡겠다고 금리를 올리는데, 따라 올리자니 민생 경제에서 차지하는 민간대출과 경기 침체가 우려되고, 올리지 않자니 외화가 다 미국시장으로 빠져 나갈 것을 걱정해야 한다. 경제 정책이 정말 중요한 시점인데, 정부의 방향성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외교는 더 중요하다. 미국은 칩4 동맹이야기를 꺼내는데, 반도체의 원천 기술은 미국이 갖고 있는데다, 최고의 동맹이니 쉽게 거절하기 힘든데, 한편으로 우리 최대의 수출시장은 중국이다. 역시 양국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해야 하는데, 외교에서 이런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통령은 취임 초기 나토 회의에 참석하더니, 이번에는 한국을 방한한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만나지 않았다. 거기에 어떤 정책이나 방향성이 보이지 않는다. 냉각된 한일관계를 풀겠다고 공약했지만 그 역시도 시원치 않다.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러시아를 ‘악’ 비슷하게 규정했는데, 향후 러시아와의 관계 역시 불명확하다.
코로나19의 재유행과 이번 수해에서의 대응, 즉 재해 대응 역시 불안하다. 코로나19 정책은 ‘국민이 알아서’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다시 사람이 코로나19가 확산하며 발생자도 늘어나고 사망자도 증가하고 있지만, 과학방역을 한다던 이번 정부의 대책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더욱이 이번 수해에서 대통령은 집에 갇혀 전화로 지휘하는 사상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최소한 청와대에서 나와 사저에 머문다고 했을 때 이 정도는 예측 했어야 했다. 군최고통수권자가 고작 수해로 사저에 갇히는 일이 생긴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뿐만 아니라 불안한 일이다.
인사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처음부터 보건복지부 장관후보자가 낙마하더니, 음주운전과 논문표절 등의 문제가 제기 됐음에도 억지로 무리해서 임명한 교육부총리는 준비도 되지 않은 정책을 남발하다가 결국 취임 1달이 조금 넘어서 사퇴하고 말았다. 대통령실 내에 사적 채용문제 역시 끊임없이 제기 된다. 지난 정부의 인사문제를 꼬집으며 공정과 상식을 이야기 했던 이번 정부의 방향과도 맞지 않는다.
이 모든 상황이 가져오는 최악의 결과물은 국민들이 국가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는 것이다. 경제대책도, 외교도, 재난도 모두 방향이 보이지 않으니 국민은 정부는 물론 국가라는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게 된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다. 이것은 정부가 취임 100일도 되지 않아 국민들에게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지율의 하락은 이런 신뢰의 추락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문제는 신뢰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정책 방향을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재해 문제에 대해서도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도 신뢰를 찾는 것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외교나 경제는 당장 티가 나는 성과도 아니다. 이렇게 해도 모자랄 판인데 여당은 여전히 지난 정부 탓을 하고 있고, 대통령실은 전문성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런 인사는 내부에 보이지 않는다. 인적 쇄신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그것도 거부하고 있다. 정말 각자도생의 5년이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