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

 

역사는 과거를 공부하는 학문이다. 동양의 전통적인 역사관은 ‘과거에 비추어 오늘을 경계한다.’이고, 이런 이유로 동아시아에서 역사학은 제왕학(帝王學)이었다. 동양에서 새로 개업한 왕조는 전(前)왕조의 역사를 편찬했으며, 왜 이전의 왕조가 흥했고, 망했는지를 거울삼았다.

또한 역사는 두려움의 학문이기도 했다.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은 서문 격인 백이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체 하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도척과 같은 놈들은 사람의 생간을 회쳐 먹으며 살고도 천수를 누렸고, 백이, 숙제와 같은 이들은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고 말았다. 하늘의 도는 반드시 의롭고 착한 사람 편이라는 말이 있지만, 백이 같은 인물은 왜 그처럼 불행해야 했는가? 또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났던 안회는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하게 살다가 일찍 죽었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하늘의 도의 섭리는 올바른 것일까? 혹시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그는 도척과 백이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라도 이들의 행적을 남기기를 결심한다. 즉 이들을 ‘역사의 심판’에 맡긴 것이다. 많은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실록(實錄)을 만든 것은 왕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사관(士官)들은 법의 보호를 받았으며, 폭군들도 자신의 악행이 역사에 남는 것은 두려워했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자신 사후에 실록 편찬에 기초가 되는 자료인 사초(史草)를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역사에는 이러한 의미 밖에 없는가?

한국은 세계 최강대국 가운데 둘인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다. 지리적 여건이 썩 좋다고 할 수 없다. 전근대시기에는 중국에 많은 부분 예속 당했으며, 근대에 들어서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한국은 중국과 일본을 무시하는 세계에서 몇 되지 않는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정부분 한국 국민이 갖는 역사적 기억에 근거한다.

 

기본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일본을 ‘한국이 문화를 전파해준 나라’로 인식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이 일본을 깔볼 근거는 전혀 되지 않는다. 한국 대부분의 전통문화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는 과거 중국 문화를 수입했다고 중국을 우러러보지 않는다.

일본은 전근대 한반도 국가에게는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건국 초기부터 신라를 공격하는 것은 왜(倭)이며, 신라가 최초로 만든 외교관련 부서는 왜전(倭典), 즉 일본에 관한 것이었다. 고려 말, 고려를 끈질기게 위협한 것도 일본이었으며, 7년간의 전쟁으로 조선을 초토화 시킨 것도 일본이었다.

일본을 무시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조선시대부터였을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 의해 일본을 무시하였고,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로 여기며 이러한 태도가 심화되었다. 그 결과는 우리가 또한 역사에서 배운 것과 같이 일본에 대한 식민지배였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까지 일본을 무시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을 생각해보자. 중국은 세계무대에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을 제외하고 항상 세계의 최강대국이었다. 한국의 많은 문화는 중국에서 수입했다. 4세기 이후부터 17세기까지 세계의 어느 문명도 중국만큼 풍요롭지 못했다. 한국 역사상 가장 강대국이라던 고구려는 결국 당에 의해 멸망당했고, 황제국을 칭하던 고려는 몽고에 속국이 되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에 진심으로 사대했으며, 명을 멸망시킨, 그래서 조선 사대부들이 그렇게 멸시하던 또 하나의 중국왕조인 청에게는 왕이 삼전도에서 아홉 번이나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중국을 무시하는가?

 

우리가 요새 중국을 ‘무시’하는 것은 현재 중국의 문화와 중국의 질 낮은 물건들이 주요 원인이 된다. 즉 근대 이후의 기억이 중국 무시의 원인이다. 반면 일본 무시는 앞서 언급했던 전근대시기에 ‘우리가 문화를 수출해줬다’는 기억이 근거가 된다. 즉 근대건 전근대이건 우리한테 유리한 쪽으로 기억하고 주변의 세계 최강국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은 근대 한국의 역사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 부분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국민국가는 근대 이후에 성립됐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전의 국가들은 왕조국가였다. 우리가 흔히 ‘이씨조선(李氏朝鮮)’은 잘못된 말인 것으로 알지만, 실제로 조선은 이씨 왕조의 나라였다. 왕씨가 왕이 아닌 고려가 있을 수 없듯이, 이씨의 왕통이 바뀌면 그것은 더 이상 조선일 수 없었다. 서양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근대의 국가에 시민이나 국민은 없었다. 근대는 이런 ‘시민’과 ‘국민’의 성장 혹은 탄생이기도 했다. 그리고 ‘국민’ 혹은 ‘신민’의 탄생에 일조한 것이 바로 역사였다.

 

전근대는 신분제 사회였다. 전근대의 신민(臣民)은 그 자체로 왕조에 예속된 존재였으며, 신분에 따라 상위 신분에 속박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 국가에 속한 인민들 모두가 동질성을 느낄 수는 없었다. 국민은 이렇게 동질성을 갖지 않았던 신민들 사이에 동질성을 부여하며 탄생했고, 그 도구로 활용된 것이 역사이다. ‘우리 국민은 동일한 역사를 갖고 있다.’고 가르치는 것만큼 동질성을 확보하는데 좋은 도구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는 국가에 의한 언어의 통일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쓴다.’라는..

 

한국의 역사 역시 이러한 ‘국민 만들기’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식민지를 겪었고, 일본에 의해서 왜곡된 한국의 역사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강조된 것이 바로 ‘민족’이었다. 전근대 중국, 근대 일본에게 ‘당한’ 역사로는 국민을 만들 수 없었다. 때문에 고조선이라는 오래전 역사가 강조되었으며(이는 사실 일제 초부터 있었던 움직임이다), 고구려는 민족의 ‘웅위(雄威)’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기억되었다. 해방이후 단기(檀紀)를 사용한 것은 이러한 민족주의적 국민 만들기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우리 민족’이 본래는 중국보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으며, 또한 엄청난 영토를 갖고 있었다는 <환단고기>류의 책이 주목 받은 것도 이런 흐름 가운데의 일이었다.

 

한국의 역사가 자랑스러우려면 주변국의 역사는 축소되어야 했다. 일본은 고대부터 문화와는 별개로 상당한 국력을 갖고 있었지만, 한국 역사책에서 이것이 언급된 일은 없었다. 실제로 신라는 실성왕 대에 당시 전성기였던 고구려와 함께 일본에 인질을 보낸다. 한편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항상 최강국이었다. ‘한민족’ 최고 강대국이었다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신라가 아니라 당이었으며, 원 간섭기의 고려는 원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 역시 한국 역사책에서 언급되지 않거나 축소되었다.

 

현재의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근대의 ‘근대 국민 만들기’를 위한 역사 교육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다.

 

이렇게 ‘근대 국민국가’에서 ‘역사’의 역할을 구구절절 이야기한 것은 역사가 단지 과거를 공부하는 것에 그치는 것만이 아닌, 지금 현재 우리의 인식의 단면을 살펴보기 위한 학문이기도 한 학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역사는 과거를 그대로 복원해내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의 고대사는 한국 고대의 일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라(사실 이건 가능하지도 않다)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싶은(혹은 인식하는) 고대사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학은 가장 현재적인 학문이며, 동양의 전통적인 사관에서와는 다른 의미에서 현재의 나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학문이다.

 

동북공정을 예로 들어보자. 동북공정은 중국이 고구려-발해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기 위한 작업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시작한 것에는 나름의 절박한 이유가 있다.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중국은 영토 내 모든 민족의 동질성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고, 그 때문에 영토 내의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반대로 이른바 ‘단일민족’인 한국은 예-맥-한(韓)족의 역사를 모두 ‘우리민족’의 역사로 보고 민족사를 서술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근대 일본은 만주를 중국·한반도와 모두 분리 할 필요가 있었고, 만주는 한반도·중국과 관련 없는 독자적인 역사였다는 ‘만선사관’을 창조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한국에게 고구려는 왜 중요할까? 사실 중국이 고구려가 한국(북한까지)의 역사라고 인정한다고 해도 고구려의 땅이 우리 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원나라가 모스크바까지 지배했다고 지금 그 영토가 몽고의 영토가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구려-발해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 국민(혹은 한민족)의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가 중국의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중국의 국민 만들기에서 동북지역의 역사 귀속이 중요하듯, 한국의 국민 만들기에서도 고구려-발해의 역사는 중요한 것이다.

 

한편 실질적인 문제도 있다. 북한이 붕괴했다고 가정해보자. 고구려-발해가 중국사로 편입된다면, 평양까지 고구려의 영토였기 때문에, 동북공정은 ‘북한 붕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북한을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킬 명분이 될 수도 있다.(앞서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가 된다고 고구려 땅이 우리 땅이 된다고 한 것과 모순된다고 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북한붕괴라는 특수한 상황을 가정한 것이다. 국제 관계에서 국가의 붕괴는 매우 특수한 상황에 속한다)

 

조금 중언부언 했다. 이제 결론을 맺어보자. 결론에서도 조금 중언부언 할 것이다.

역사는 국민국가 만들기에 매우 중요했다.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유효해야 하는 것이지, 앞으로도 유효해서는 안 된다. 근대에 국민과 민족이 생겨나며 국민과 민족이란 이름으로 엄청난 악행들이 행해졌고, 또 행해지고 있다. 국가에 이익이 되는 것이면 악행도 선행으로 포장된다.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권시절 국익을 위해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피를 흘렸으며, 또 그중 일부는 그곳에서 만행을 저질렀다. 노무현 정부도 국익이란 이름으로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병했다. 모두 국가의 이익이란 탈을 쓰고 이루어졌으며, 그것으로 모든 행위는 정당화 되었다. 사회보장제도가 가장 잘 갖춰지고, 노동자의 권리도 가장 철저하게 보호하는 북유럽의 국가와 다국적 기업들도, 그들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는 약소국의 독제, 약소국 국민의 착취는 용인한다. 이것이 근대 국민국가이고, 그 안에 사는 국민들이다. 세계 제2차 대전에서 독일의 나치에 동조한 독일인들은 국가에 대한 사랑, 즉 애국심으로 무장했다(우리는 정당성을 떠나 그들의 애국심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민족 간의 갈등을 조장하고, 민족 대학살이 일어 난 예는 굳이 들지 않아도 셀 수 없이 많다.

 

지금의 역사학이 할 일은 이러한 근대 국민의 환상을 역사로부터 깨는 것이다. 애초에 민족과 국민은 없었다고 말해야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민족이었는가? 이 삼국에게 한민족 운운하는 것 자체가 지금의 관점이다. 그들은 죽고 죽여야 할 적이었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백제군의 화살에 전사했으며, 백제의 개로왕과 성왕은 각각 고구려와 신라의 군사에게 목이 달아났다. 백제에게 신라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존재였으며, 신라에게 백제는 자신의 목줄을 죄고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적국이었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합한 후, 고려와 조선이라는 두 왕조가 1000년 가까이 통일 왕조를 이어 왔다. 그 긴 시간동안 일정한 동질성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평생 자신의 동네를 벗어날 수 없던 사람들이 대부분인 당시 상황에서 경상도의 백성이 함경도의 백성과 동질성을 느꼈다고 할 수 있을까? 거기에 신분의 벽이 엄연한 사회에서 혹시 생겼을 동질성이 지금의 ‘민족 동질성’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샤를마뉴, 카를로스 대제, 칼 대제. 모두 같은 사람이다. 제일 앞은 프랑스어, 다음은 영어, 그 다음은 독일어식 표현이다. 이 인물은 중세 프랑크 왕국의 왕인데, 이 사람의 역사는 직금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삼국이 공유한다. 이 인물을 현재 국민국가 중 어느 한 나라의 역사로 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유럽에서 동아시아와 같은 역사분쟁은 없다.

 

한반도의 역사가 중국 대륙과 무관한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중국 대륙의 역사가 그들이 말하는 북방민족(흉노, 거란, 몽고) 등과 잠시라도 무관한 적이 있었던가? 중국과 한반도의 문화 없이 지금의 일본 문화가 있을 수 있었는가? 인도 문명이 없이 한국의 불교문화가 가능했으며, 알렉산더 없이 인도의 간다라 미술이 생겨났겠는가?

 

이런 식으로 국가와 민족의 역사를 분해하고, 인류의 역사를 복원해야 한다. 과거의 역사는 지금 어느 한 나라의 것일 수 없다. 그렇게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결국 나와 남을 가르게 된다. 국민과 민족도 철저히 남을 의식하는 개념이다. 역사학은 최소한 역사로부터 이러한 편 가르기를 그치게 해야 한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도척을 심판하려 했고, 백이의 의로움을 알리려했다. 이를 통해 후세가 역사의 무서움을 알고 최소한 자신이 꿈꾸는 보다 이상적인 사회가 되기를 꿈꿨기 때문이다. 왕들이 제왕학으로 역사를 공부한 것도 과거를 통해 스스로를 경계하고, 그것으로 보다 나은 통치를 하고자하는 마음이었다.(물론 역사를 통해 자신 왕조의 정당성을 구축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지만..)

지금의 역사학도 마찬가지이다. 최소한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역사학은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과학기술, 사회과학이 사회에 필요하듯, 역사학도 사회에 필요한 학문이란 뜻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학문을 해야만 한다. 내가 역사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다소 거창하지만 여기에 있다.

Posted by beatles for s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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