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y Life'에 해당되는 글 175건

  1. 2016.11.25 그날 이후
  2. 2016.11.25 밤길
  3. 2016.11.25 신발끈
  4. 2016.05.05 집에 가는 길
  5. 2016.04.24 사랑
  6. 2016.04.24 김광석展
  7. 2016.04.23
  8. 2016.04.17 슬픔
  9. 2015.07.09 피에타
  10. 2015.07.09 피에타-프롤로그 1

그날 이후

카테고리 없음 2016. 11. 25. 18:23

하늘의 별이 땅으로

내려왔다.


눈물은 흘러 하늘에
맺혔다.


고개를 들어 땅을
보고


한숨을 쉬며 하늘을 
내려다 본다.


그렇게


은하수를
건너면


눈물의 강에 
닿을까.


그러면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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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길

카테고리 없음 2016. 11. 25. 18:22

새로 지은 성벽 위
아직 어린 단풍잎에
전기 조명이 색을 더 한다.


성 밖 오랜 마을은
옛 영화 한 번 못 누려본듯 늙어있고
휘영청 밝다던 달은 구름에 가려 어렴풋 붉다.


나는 걷다 넘어져 부끄러워 주변을 살피고
아무도 없음을 알고 그제야 아프다가,
문득 지난 부끄러움마저 생각나 소리를 지른다.


추운듯 담벼락에 붙어 앉아 있던 길고양이들은
내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한데 모여 아침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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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끈

Imagine 2016. 11. 25. 18:21

어제 저녁 운동을 하려고 밖으로 나왔다. 
추워서 새로산 장갑을 꼈다.


산길을 뛰어 올라가고
걸어 내려오는데,
지난 몇 주 간 한 번도 풀린 적 없는 운동화 끈이 풀렸다.


장갑을 벗고 운동화 끈을 묶었다.
손시 시려웠다.


다시 뛰기 시작하는 데 
이번엔 양쪽 운동화 끈이 모두 풀렸다.


'신발 끈이 풀리는 것은 누군가가 내 생각을 하는 거라던데..'
이런 생각을 하니,
정작 날 생각할 사람이 아니라, 
나를 생각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떠올랐다.


'그럴리 없지'
생각만 했을 뿐인데 괜한 기대에 문득 부끄러웠다.


또 다시 신발 끈이 풀렸다. 
추운 날씨에 계속 장갑을 벗어야 하는 것에 짜증이 살짝 났다.


집에 도착하니 고양이가 문 앞에서 날 기다렸다. 
'그래 너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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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는 길

Imagine 2016. 5. 5. 21:30

집에 가는 길



차창 밖을 바라보는데, 

차창 밖에 내가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길을 걷는다.


그리운 얼굴들이 보여 차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밖을 바라보는데,

창 밖에 내가 창 안의 나를 무심히 바라보다 사라진다.


다시 창 밖을 보니 친구와 다니던 골목에서 친구와 내가 걸어 내려오는데,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자못 진지해 보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야?' 궁금해 죽겠는데 알길이 없어,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웃으며 '자기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또 다시 창 밖을 보니 예전에 본 듯한 가게가 보이는데,

그 가게가 이 가게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고, 그것이 왜 궁금한지도 이해를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다 문득 몇 년 전 생긴 페스트푸드 가게를 보며 

'저 가게는 장사가 되는 걸까?'라는 더 쓸 곳 없는 질문이 든다. 


집에 두고 온 고양이도,

집으로 만나러 가는 어머니도

집으로 가는 길에 모두 생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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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Imagine 2016. 4. 24. 23:47

시로 부를 수 없는 그리움과

글로 쓸 수 없는 이야기


노래로 담을 수 없는 소리와

그림으로 그릴 수 없는 풍경


눈으로 다 볼 수 없는 빛과 

가슴으로 다 품을 수 없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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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展

Imagine 2016. 4. 24. 23:40

죽은 사람을 보고
아니 죽은 사람의 살았을 때 모습을 보고,
죽은 사람의 살았을 때 목소리를 듣고,
그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를 그리워 하게 됐다. 
그래서 그 죽은 사람이 그리워 술을 마셨다. 
그 죽은 사람은 내가 한 번도 본적 없는 사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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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ine 2016. 4. 23. 16:32

방에 문이 하나 있어 열고 나갔다.
문을 여니 방이 있고 문이 두 개 있는 방이 나왔다.
(들어 온 문까지 두 개다)
다시 문을 열고 나가니 다시 문이 두 개 있는 방이 나왔다.
계속해서 문을 열고 나가니 이제 문이 세 개 있는 방이 나왔다. 
선택을 해서 다시 문을 열고 나가니 다시 문이 세 개 있는 방이 나왔다. 
그리고 또 다시 문이 세 개 있는 방이 나왔다. 

(들어 온 문까지 세 개다)
이렇게 계속가니 다시 문이 네 개 있는 방이 나왔다. 
다시 선택해서 문을 열고 나가니 다시 문이 네 개 있는 방이 나왔다. 
계속 다시 문이 네 개 있는 방이 나왔다.

(들어 온 문까지 네 개다) 
정신을 차리고 방에 우두커니 서 있이니 내가 어디서 왔는지 찾아 돌아갈 자신이 없다. 
문이 네 개 있는 방에 있는데 온 곳은 찾을 수 없고, 갈 곳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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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Imagine 2016. 4. 17. 21:03

늘 다니는 낮선 거리와 매일 변하는 똑같은 사람들

강풍을 버틴 나뭇잎과 작은 입김에 무너진 건물들

강물에 희석된 거대한 오수와 바다도 품지 못한 몇 방울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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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Imagine 2015. 7. 9. 13:48

요새 뭘 잘못 먹었는지 자꾸 열이 난다. 그래서 병원에 가는 길에 영화를 봤다. 본 영화는 김기덕 감독의 18번째 영화라는 피에타. 스포가 있으니, 보실 분은 패스하셔도 좋을 듯.

‘인간성’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인간에 대한 애정’ 혹은 ‘연민’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완전히 상실한 한 남자가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엄마에게 버림받은 그에게는 가족도, 친구도 없다. 설정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친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람이, 남의 아픔을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남의 아픔 따위, 인간에 대한 연민 따위 없는 그에게, 남 병신 만들어 보험금을 타서 빚을 받아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10미터 가까운 곳에서 사람을 밀어 버리고, 손가락을 자르고, 심지어 팔도 자른다. 죽으면 곤란하다. 보험금 타내기가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그에게 자살한 사람은 ‘무책임한 새끼’일 뿐이고, 300만원의 원금이 3000만원이 되어 빚을 갚지 못하겠다는 사람 역시 ‘남의 돈 빌려 놓고, 어떻게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엄마’가 찾아온다. 그는 그 엄마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밀치고, 때리고 그렇게 완강히 거부한다. 하지만 가족도 친구도 없는 그가 외롭지 않을리 없다. 가족과 친구가 그립지 않을리 없었다. 결국 그는 엄마를 받아들인다. 그때부터 행복하지만 불안한 시간이 시작된다. 그는 지킬 것이 생겼지만, 이미 그는 너무 많은 분노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에게 행복이 찾아온 그 순간 불안이 찾아왔고, 또 ‘인간성’이 찾아왔다. 엄마를 용서하고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도 생겼다.

하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복수였다. 엄마는 그의 엄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엄마였다. 엄마는 그에게 희생된 아들의 복수를 위해 그에게 접근했다. 그에게 소중한 것을 만든 후에 그것을 빼앗는 것, 그래서 그의 영혼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을 복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리러니하게도 엄마의 복수는 그의 구원과 맞닿아 있다. 엄마의 복수로 인해, 그는 인간성을 찾을 수 있었다. 엄마 역시 아들이 아닌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야 만다.

엄마는 자신을 던짐으로, 그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 그는 이것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는 자신의 행위로 남이 받았을 고통을, 그 이후의 고통스런 삶을 드디어 이해한다. 엄마의 고통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속죄를 향하여 간다(그의 속죄 방식은 마치 미션에서 로버트 드 니로의 속죄 방식과 같이 가학적이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극단적 자본주의이다. 그는 묻는다. ‘돈이 뭘까요?’ 엄마는 대답한다. ‘모든 것의 시작’ ‘사랑, 명예, (중략) 복수’라고. 돈을 빌릴 수밖에 없는 상황. 그 돈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상황. 그리고 갓 낳은 자식을 버리는 사회. 이것은 자본주의의 폐해라고 감독은 말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의 구원은 있을까? 이 잔인하고 끔찍한 영화는 이런 점에선 희망차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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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프롤로그

Imagine 2015. 7. 9. 13:47


을 쓰기 전 고백한다. 김기덕 감독이 황금사자상을 탄 이후에야 볼까 말까 고민했던 ‘피에타’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다시 김기덕 감독 영화를 찾아 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 글을 꼭 써야지라고 마음먹고 쓴 것이 아니라, 늦은 밤 생각 없이 마신 커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해 이런 저런 생각에 뒤척이다가 그 이런 저런 생각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난 홍상수와 김기덕, 이 두 감독을 좋아하는 편이다. 여기서 ‘좋아하는 편’이라고 표현한 것은, 두 감독의 영화를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려가며 보지도 않음은 물론, 전부 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편’이라고 이야기 한 것은 본 영화들이 모두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아하는 편’이란 표현은 적당한 잘난 척을 하기 위한 장치인 동시에, 무식함이 탄로난 후에도 적당히 빠져나갈 구멍도 되는 셈이다.

내가 굳이 저 두 감독을 같이 언급한 것은, 전혀 다른 듯한 두 감독의 영화에서 묘한 공통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공통점은 바로 ‘불편함’이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두 감독 영화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다르다.

홍상수의 불편함은 너무나 일상적이기 때문에 나타단다. 남들도 나처럼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백컨데 내 일상에는 기승전결 따위가 없고, 인간 관계란 항상 모호하며, 특정 사람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그때그때 달라지고, 찌질거리지 않으려 노력하나, 찌질의 정도를 넘어서는 경우도 많고, 때론 유치찬란해서 밤에 잠못이루는 경우도 있으며, 해놓고 후회하는 일이 한 두번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홍상수는 이것을 영화에서도 보여준다. 그래서 불편하다.

오랫만에 기분 좋게 친했던 선배를 만나 옛 추억을 더듬거리며 유쾌해진 술자리에서, 갑자기 별거 아닌 몇 마디에 기분이 확 상해지는 상황도, 그러면서도 확 싫은 소리 같이 못하고 허허 거리는 장면도 다 나 같다. 친한 그 여자와는 그냥 이정도로 지내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확 사귀자고 말을 해야하는지, 아니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긴 하는 건지도 의심스러운데, 그러면서도 만나서 술한잔이라도 먹자면 같이 자고 싶어 하는 것도 나 같다.

그리고 이런 상황들은 조금 시간이 흐르면, 아니 어떤 경우에는 집에와 돌이켜 보면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있자면, 그래서 난 불편할 수밖에 없다. 나의 찌질거리는 일상을 내 돈 내고 극장에서 보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어떤 때에는 기승전결이 없는 것 자체까지 불편하다. 더욱이 한 사람 대해 존경, 질투, 미움, 두려움, 사랑 이 모든 것이 복합된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가끔 가장 추잡스런 짓을 하다 걸린 것만 같은 기분이다.

김기덕은 딱 이 반대에 있다. 한 사람에 대한 저 복잡미묘한 감정 가운데 하나가 과잉된 그런 기분이다. 분노면 분노, 미움이면 미움, 사랑이면 사랑..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가 분리될 수 있을까? 사랑하지 않으면 분노하지도 않고, 분노하지 않으면 미워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저 감정 가운데 어느 하나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는가?

흔히 마음 속의 죄는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종교에서는 그것도 죄다. 마음 속에 분노가 일 때, 그 마음 안에선 살인도 일어나고 강간도 일어난다. 욕심이 생기면 도둑질도 한다. 적어도 난 그런적이 있다. 이 마음속의 일들을 김기덕은 영화로 끄집어 내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불편하다. 역시 내 마음속 깊은 곳 어두운 심연, 끄집어내지 않고 싶은 것 까지 끄집어 내기 때문이다. 내가 억지로 숨겨 놓은 것을 누군가 끄집어서 보여준다면 마음이 편할리 없다.

어머니를 때리는 아들, 딸의 원조교제를 지켜보며 살인하는 아버지, 사랑하는 여자를 매춘으로 모는 남자 등등 극단적인 설정들은, 어쩌면 내 마음속 분노가 치밀었을 때 한번쯤 생각해 보았음직한 어떤 모습과 닮아 있는 듯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숨긴다고 사라지는 것일까? 이것이 혹 김기덕이 말하고자하는 것은 아닐까?

또 구원이란 무엇인가? 극단적 분노에 빠져있다 마음의 평안을 얻었지만 세속의 심판은 남은 경우, 나는 남만의 행위를 통해 용서를 빌고, 구원받는 행위를 하지만, 그것이 남을 지옥으로 내 모는 경우.. 내 안에 추악함에 대한 마주 봄 없이 과연 우리는 신을 믿음으로 혹은 믿지 않음으로 내 삶이 진정 평화롭고, 자유로운가..

천주교에는 고해성사라는 것이 있다. 나의 마음 속 죄까지 털어 놓는 행위이다. 개신교에서도 마음 속 죄까지 신에게 용서를 빈다. 불교에서도 이러한 인간의 번뇌를 털어 놓기 위한 끊임없는 수양을 요구한다. 그의 영화가 갖는 종교성이란 것은 혹 이런 것은 아닐까? 내면의 추악함을(그것이 개인이던 사회인던, 또 드러났건 드러나지 않았건) 일단 끄집어 내서 마주할 때만이, 진정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고..

‘피에타-프롤로그’라고 제목을 정했는데, 본편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시 늦은 밤, 생각 없이 커피한잔 마실 날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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