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 작가가 쓴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었다.

빨갱이. 나는 이 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지만, 어린 시절 이 말을 들으면 왜인지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곤 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아이도, 저 단어를 내뱉는 사람들이 가진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저 적의에 가득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모른 체 두려움에 떨며 동조하며, 저 적의를 내재화했다. 저들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나도 '빨갱이'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 단어를 평생 꼬리표처럼 달고 살아온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삶은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이데올로기는 - 그것이 무엇이라고 -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도 쉽지 않았다. 조금 모자라고, 가끔은 찌질하고, 종종 우스워지고, 때로는 한심한 것이 우리들의 삶이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저런 모자람과 찌질함과 우스움과 한심함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미워도 하지만 끝내 서로와 부딪히며 산다. 평소라면 그것이 심해지면 '얼굴 안 보고 살면 그만'이었을 것이지만 어떤 시대에는 서로를 증오해서 죽이고야 말기도 했다. 그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수많은 '배신'을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한 사람이 겪어온 삶은, 적의에 가득 찬 '빨갱이' 딱지를 달면서도 그 신념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의 깨우침인지, 타협인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모를 무언가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들까지 고스란히 자신의 짐을 함께 져야 했기에, 그 마음의 짐을 또 스스로 지고 가야 했던 사람이 아니면, 저 생각을 단순히 '천성'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중 아버지는 죽음으로 해방되었다. 유물론자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는 없으니, 먼지에서 태어나 먼지로 돌아간 그에게 그사이의 삶이란 선택하지 않았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여러 관계와 선택을 강요 받는 감옥과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수많은 관계에서 때로는 싸우고, 때론 순응하지만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삶 말이다.

죽어서야 해방되었던 작중 '빨갱이' 아버지와 그를 둘러싼 여러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묘한 위로를 준다. 그는 '빨갱이'였지만 평범한 아버지였고, 남편이었고, 이웃이었으며, 형이었고, 삼촌이었다. 그런 그의 특수하지만 평범한 삶은, 죽음이라는 누구나 맞이하지만 아무도 경험담을 이야기할 수 없는 그 두려움의 세계가 모두에게 공평하며, 그곳에 도달하기까지의 삶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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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창고 앞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죽어간다고 누군가 말을 했다. 그래서 보았더니 비둘기 한 마리가 털이 많이 빠진채 힘 없이 앉아 있었다. 혹시나 해서 가까이 다가가고 비둘기는 사람이 온 것도 모른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고 있었다. '아 정말 죽어가는 구나..' 생각했다. 

죽어가는 비둘기를 발견한 분은 "고양이가 습격했나봐요"라고 말을 해 주었는데, 그랬으면 잡아 먹었을 것 같았다. 일단 고무장갑을 끼고 비둘기를 잡아보기로 했다. 사람의 손이 닿자 비둘기는 언제 힘이 없었냐는 듯 잡히지 않으려 날개를 퍼덕이며 내 손을 피했다. 하지만 날지는 못했고, 곧 내 손에 잡혔다. 큰 외상은 없어 보였다. 나는 비둘기를 발견한 분에게 "뭔가를 잘못 먹은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보다 보기 좋은 곳으로 옮겨 놨다. 

한동안 눈을 뜨고 있던 비둘기는 다시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몸에 힘이 없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아. 비둘기는 저렇게 죽는구나' 생각을 했다. 크기를 보니 아직 어린 비둘기 같았다. 위에서 보니 그 예쁜 겉깃털이 절반은 빠져있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혹시나 해서 찾아봤지만, 유해조수로 지정된 비둘기를 돌봐 줄 곳은 없어 보였다. 물을 줬지만 먹을 수 없었다. 

최근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찍은 사진을 봤다. 무한하게만 보이는 우주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넓은 우주에서 생명으로 태어난 존재의 소중함도 느꼈다. 우리 인간은 아직 지구 밖에서 생명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 엄청난 우주의 넓이 때문에 발견하더라도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지금 지구의 모든 생명은 기적 같은 찰나를 보내는 중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은 얼마나 소중하고 경의로운가! 그러니 한 생명이 사라지는 죽음은 슬픈 일이다. 

지금은 다른 공간에서 일하고 있기에, 죽어가는 비둘기가 있는 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비둘기가 죽으면 알려달라고 말을 했다. 내가 옮겼으니 내가 마지막으로 보내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심에서 흔히 보는 비둘기이고 하루에도 수 백 마리가 죽어갈 수는 있겠지만, 내 눈 앞에서 죽어가는 순간을 본 그 순간, 그것은 그 다른 수 백 마리와 같을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비둘기가 정신을 차리고 어느 순간 파다닥 날개짓하며 날아가길 바란다. 어느 존재이든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슬프고 힘든 일이다. 

왼쪽 사진을 보면 왼편의 깃털이 모두 떨어진 것이 보인다. 오른 편을 보면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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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지옥] 후기

Imagine 2021. 11. 22. 08:55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거기에 선악은 없다. 좋고 훌륭한 사람이 사고나 병에 걸려 죽고,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장수하는 경우는 지금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 같지만, 죽음이야 말로 우연히 몰가치하게 모든 생명에게 찾아온다. 과학은 삶과 죽음의 신비를 풀어낼 수는 있지만, 죽음이 맞는 수 만 가지 이유는 오직 철학과 종교적인 해석만으로 가능할지 모르며, 그것이 종교가 여전히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연상호의 드라마 ‘지옥’은 바로 이 지점을 이야기한다. ‘지옥’에서 죽음이 찾아오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처음 악인에게만 찾아온다고 믿었던 ‘천사’와 ‘지옥의 사자’들은 사실 불특정한 모두에게 찾아온다. 거기에는 죄를 지을 수 없는 갓난아기도 포함된다.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사람들은 이들을 ‘죽어 마땅한 사람’으로 포장해야 하지만, 모든 죽음이 그렇듯 ‘지옥’에서의 죽음에도 어떤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해석뿐이다. 저 고통스러운 죽음은 ‘죽어 마땅한 사람’ 혹은 ‘죄지은 사람’만이 겪는 것으로 해석해야 나머지 ‘선량한’ 사람들이 마음의 위로와 안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선량한’ 사람들은 내가 죄를 짓지 않으면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믿음(사실은 그렇지 않더라도)을 통해 위안을 받으며, ‘죄인’들의 죽음은 ‘선량한’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의 독점권을 갖는 종교집단은 엄청난 권력을 갖게 되는데, 이는 마치 성경의 해석을 독점했던 중세 가톨릭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드라마는 이 과정에 수많은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연결시킨다. ‘사이버렉카’로 불리며 이슈를 쫓아다니는 인터넷 방송, 한국 사법체계의 허점, 선정적인 보도를 일삼는 언론, 여전히 연좌죄적 성격을 갖고 있는 우리의 사고방식, 내가 선이고 나머지는 악이라는 한국사회의 흔한 이분법을 통해 드러나는 단체들까지 다루는 것은 수도 없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불가해한 죽음과 선정적인 사회 이 사회 자체가 지옥이라고 감독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모든 이슈를 단 6회 만에 다루어야하기 때문에 극은 상당히 빠르게 전개된다. 때로는 과장된 연기가 몰입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하며, 논란이 되었던 컴퓨터 그래픽도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드라마 ‘지옥’은 약간의 잔인함을 견딜 수 있다면 충분히 추천하고 싶은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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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마켓 ’동네생활’에 성북동 어딘가에서 새끼고양이가 죽어가고 있다고 사진과 글이 올라왔다. 이미 뻗어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면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혹시 몰라 장소를 물어보고 츄르(고양이 간식)를 챙겨 바로 그 장소로 갔다.

새끼 고양이는 이미 죽은 듯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1~2분 보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가려는데, 고양이가 움찔하며 약간 움직였다.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일단 들어 안았는데, 몸이 이미 너무 찼다. 장기가 다 망가졌는지 배도 부어있었다. 살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일단 집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고양이에게는 “죽어도 저기서 죽지는 마, 혹시 살아 나면 나랑, 마리(내 반려묘)랑 같이 살자”라고 이야기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고양이 체온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양이는 한 두번 나에게 ‘야옹’하고 우는 것 같았지만 힘이 없어 소리는 내지 못했다.

결국 집에 도착하기 전 고양이는 죽었다. 겨우 10분 내외의 시간이었다. 눈도 끝내 감지 못했다. 감겨 주려 해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 거리보다, 내 품에서 조금은 따뜻하게 세상을 떠났길, 감지 못한 눈으로 내 눈을 보며 조금은 외롭지 않게 떠났길 바란다.

덧. 검색해보니 죽은 동물의 사체는 생활쓰레기 봉투에 넣어서 처리하면 된다고 한다. 작은 박스가 하나 있어 보니 마침 딱 죽은 고양이의 크기와 맞았다. 거기에 고양이와 츄르를 넣고, 박스를 밀봉하고, 새 종량제 쓰레기 봉투를 꺼내 박스를 넣었다. 빈 공간은 신문지로 채웠다. 마리가 있어 입고간 옷은 바로 세탁기에 넣고, 샤워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리는 다시 간식을 달라고 한다.

덧2. 아침에 나와보니 쓰레기봉투는 이미 수거해갔다. 고양아 짧은 인연이었지만 그곳에선 아프지말고 따뜻하게 지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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