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 윙’이라는 판타지.
드라마 웨스트 윙을 어쩌다 또 다시 봤다. 쉽게 ‘봤다’고 표현하지만 시즌이 7까지 있고 매 시즌이 22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어마어마한 대작이다(사실 아직 시즌 7은 시작하지 못했다). 드라마는 미국 가상의 대통령인 ‘조샤이어 바틀렛(민주당)’의 집권기를 다루는데, 이상적이긴 해도 미국 정치 현실을 잘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놓고 미국 민주당을 지지해서 공화당원들 사이에서는 ‘레프트 윙’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시청했다고 하니 얼마나 재미있는 미드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번에 보면서 느낀 것은 이상적인 리더십에 관한 것이었다. 민주당이라는 동일한 가치를 추구하는 정당의 대통령과 참모들의 이야기이지만, 이들은 다양한 캐릭터를 갖고 있다. 부잣집 아들에, 경제학 박사에, 노벨상 수상자이며 주지사 출신인 대통령은 그 자체로 미국 대통령이 돈 없으면 도전하기 힘든 자리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대통령의 캐릭터이다. 대통령은 이상주의자이면서도 때론 현실과 타협한다. 어릴 적 재능 있는 아들을 질투하는 아버지에게 구타당한 경험이 있는 그는 결정적인 순간 후퇴한다. 또 가족들을 정치에 이용할 경우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흥분하는 성격이다.
여기에 제동을 거는 것이 참모들이다. 비서실장 리오 맥게리는 엄청난 부자의 민주당원이면서 바틀렛의 친구이자 대통령에 출마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대통령을 위해 목숨도 바칠 만큼 충성심이 높지만, 대통령의 가장 큰 비판자이기도 하다. 시즌 1 초반, 대통령이 아끼는 군의관이 테러로 죽는다. 이에 대통령이 흥분해서 과도한 대응을 하고, 모든 사람에게 화를 내자 그는 대통령을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 단 둘만의 자리를 만들고 이렇게 이야기 한다.
“적의 전사자를 늘리는 것이 전쟁억제를 불러온다고 생각한다면 자넨 약에 중독된 갱 우두머리들과 다를 바가 없어. 그리고 미군을 왕의 군대처럼 부릴 생각이라면, 그래, 그렇게 할 수 있네. 우리는 유일한 초강대국이니까. 하지만 죽이려면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모두를, 특히 날 죽일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거야. 왜냐면 난 자네에게 대항할 군대를 만들 거고 결국에는 내가 자네를 이길테니까!”
물론 대통령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흥분을 가라앉힌다.
공보수석인 토비 지글러는 대통령과 가장 많이 갈등하는 인물이다. 가장 이상주의적인 그는 대통령이 현실과 타협할 때마다 대통령과 가장 강하게 대립하는 인물이다. 때로는 비판이 도를 넘기도 한다. 대통령이 ‘내가 자네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해고 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나중에는 이렇게 멋진 말로 사과한다.
“난 자네 없이 살 수 없어. 토비. 잡초에 파묻히게 되겠지. 쓸모없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일 거야. 내가 자네를 가끔 실망시키는 것을 알고 있네. 자네의 실망을 느낄 수 있어. 내가 화내는 이유는 많은 경우에 단지 자네가 옳기 때문이야. 자넨 수업시간에 손을 들고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타입의 아이가 아니지. 자네는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이야.”
이 밖에도 중요한 인물이 많지만, 특히 이 둘이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참모들 중에서 대통령에게 가장 강하게 반대하고 대립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모들에게 비판 받는 것이 좋을 리 없는 대통령은 용케도 이들을 용납한다. 물론 엄청 화도 내고, 소리도 지르며, 언성도 높이지만 말이다. 물론 대통령이 이들을 용납하는 것은 이들의 의견이 옳기 때문이지만,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참모들이 대통령에게 거침없이 소리를 높이고 의견을 제시하는 것 역시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권력이라는 것은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인 정치적이기도, 경제적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권력을 갖게 되면, 권력자 주변에는 좋은 힘을 자신에게 발휘해주길 바라는 사람들로 차게 된다. 당연히 칭찬과 찬사로 주변이 가득 차게 된다. 권력자의 권력을 탐하기 때문이다. 자연히 자신을 비판하는 소리는 듣기 싫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다. 잘못된 판단을 하고, 실수도 한다. 그것을 최소화 하는 것이 주변의 비판을 듣는 것이다. 자신이 권력을 갖기 전부터 알던 사람들의 비판은 특히 새겨들어야 한다.
웨스트 윙은 말 그대로 드라마일 뿐이지만, 왜 수많은 미국인들이, 심지어 공화당원들까지도 그것을 시청했을까?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정치가에게 바라는 환상을 가장 잘 구현했기 때문은 아닐까?
덧. 내 주변에는 비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많다. 그런면에서 난 행운이다. 이런 사람들이 더 많은 일을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