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있음, 영화를 볼 분은 이 글을 읽지 마세요)

난 영화 보는 것을 즐기기는 편이긴하지만, 어떤 영화가 나오기를 목을 빼고 기다리며, 예매하고 개봉하는 날부터 찾아가는 그런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인생사에는 예외가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그런 영화 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와 같이 이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과, 나보다 부지런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깨닭았을 때에는 이미 당일은 커녕 일주일 안에 영화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영화 표를 구할 수 있게될 무렵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봐서 더 이상 같이 볼 사람이 없었다. 결국 그 사이에 미드나잇 인 파리, 두 개의 문, 도둑들, 토탈리콜 등 평소보다 훨씬 많은 영화를 봤음에도 이 영화는 오늘에서야, 그것도 곧 있으면 상영관이 사라질지도 모른 다는 두려움이 나의 게으름을 이긴 다음에야, 혼자라도 가서 볼 마음을 먹게했고, 볼 수 있었다.

배트맨은 위법적인 존재다. 그것이 이 시리즈의 문제 의식 가운데 하나인 듯하다. 그는 공권력이 손댈 수 없는 악당들의 범죄를 해결해 주지만, 그런 행위 자체로 그는 불법을 저지른다. 근대 이전부터 많은 나라들은 법을 통해 사적복수 등 사적인 처벌을 금지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정의를 외치며 사적으로 범죄자를 처단하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혼란의 빠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리고 지배층의 권력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근대 국가에서 사회의 규약(법)을 어기는 사람에 대한 처벌은 오직 국가만이 할 수 있으며, 그것도 여러 제약을 통해서만 집행될 수 있다. 배트맨은 결국 범죄자다. 
이 전편인 다크나이트에서 웨인이 고민한 것도 바로 이 부분이고, 라이즈에서 배트맨이 시작과 동시에 범죄자가 되는 것도 이 부분이다. 그는 전편에서 결국 제도 안에서 악이 해결되길 바라며, 그 때문에 연적인 하비 덴트를 도와준다. 덴트는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위법자들을 처벌하고자하는 의지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실험은 끝난다. 덴트는 그의 믿음이 무너졌을 때, 가장 잔혹한 악인이 되고만다. 정의의 사자와 악인. 그의 별명 투 페이스와 같이 그는 가장 정의로운 인간에서 가장 비정하고 악한자가 된다. 바로 이점이 놀란이 갖는 두 번째 문제의식이다.

라스알굴과 베인의 문제는 뒤로 하자. 가장 극명한 것은 조커와 웨인의 대결이다. 조커는 인간 자체를 믿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공포와 두려움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범죄자들이 탄 배와, 일반 시민이 탄 배. 서로가 서로의 배를 폭파 시켜야만 살 수 있는 구조. 조커는 그 구조 안에서 결국 하나의 배는 폭파될 것이며, 그것을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려 한다. 아마 라스 알굴도 그랬던 듯하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추악하고 더러우며,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그들을 모두 없에고 ‘재건’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웨인(과 그의 집안)은 인간을 믿었다. 웨인은 인간은 바뀔 수 있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와 그의 집안은 그들이 가진 재산을 통해 고담시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두 개의 배, 모두가 폭발하지 않았을 때, 웨인의 믿음은 승리를 거둔 듯했다. 하지만 베인이 왔을 때, 그가 도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가진 자에 대한 분노를 표출할 장을 만들어줬을 때, 사람들은 망서리지 않고 그 분노를 가진 자들에게 폭발시켰다. 부자들에 대한 ‘인민재판’이 벌어지고, 쉽게 죽음이 결정된다. 그리고 그러한 분노가 사그러졌는지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분노가 폭발할 수 있었단 무대는 베인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고, 공권력이 다시 고담시에 돌아온 것 정도만 확인 가능하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영웅에 의해 해결된다. 

이러한 모습은 조금 오버스러울지 몰라도 지금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미국은 제도로의 복지를 하는 나라가 아니다. 많은 부자들의 자발적 기부에 의한 빈민구제의 형태가 강하다. 제도적으로 복지가 보장된 서유럽(혹은 북유럽)과는 다르다. 당장 웨인 재단의 후원이 끊긴 고아원은 아이들을 책임지지 못하고, 그 아이들은 범죄의 세계로 흡수되어 버린다. 지금 미국의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헐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그 수많은 영웅들과 그에 열광하는 대중은 이제 미국의 문제가 영웅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러한 영웅들의 존재가 판타지이듯, 영웅에 의한 세상의 변화 역시 꿈 같은 일이다. 설혹 영웅이 나타나도 영화에서 보듯 순식간에 범죄자로 몰릴지도 모르는 일이고..

결국 한 사회가 살기 좋은, 분노가 없는 사회로 가야 하는 가장 빠른 길은 영웅이 나타나지 않게하는 일이다. 정의로운 하비 덴트에게 힘을 주고, 공권력을 감시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은 그 일한 만큼의 보수를 받고, 사회적 약자가 보호되고.. 이런 사회에서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가진 라스 알굴과 조커, 베인은 생겨나기 어렵다. 설혹 생겨난다 해도 그 적개심에 사회가 동조하지 않는다. 

노르웨이에서 얼마전 충격적인 인종적 차별에 의한 무차별 살인이 벌어졌을 때, 노르웨이 시민들이 보여준 것은 분노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한 소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이 저렇게 큰 분노를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보여줄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보’라고. 

우리는 영웅 배트맨에 열광했지만, 배트맨이 원하는 사회는 배트맨이 필요 없는 사회였고, 그 자신도 영웅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고 싶어했다. 배트맨이 없는 세상이 이 시리즈가 말하고자 하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Posted by beatles for s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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