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새론이 죽었다. 자살인 것 같다. 오래 전 영화 '아저씨'에서 보고 딱히 기억은 없었다. 그리고 들은 소식이 음주운전과 그후의 각종 구설이다. 그리곤 이렇게 됐다.
그의 소식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왜 이리 가혹한가?' 사람은 누구나 실수와 잘못을 한다. 어떤 잘못은 사회적 규범을 벗어나기도 하고 또 어떤 잘못은 법을 어기기도 한다. 그래서 처벌을 받는다. 여기까진 당연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법의 처벌을 받아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가혹하다.
물론 범법자는 처벌 받음으로 그 죄값을 다 치렀다. 물론 법이 정한 형량이 너무 약해보이고 못마땅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입법을 한 국회와 구형을 한 검찰(행정부)과 선고를 한 사법부에 있지, 피의자의 잘못은 아니다. 또 어떤 범죄자는 용서 받기 어렵기도 하다. 상습범이나 아동성폭행 같은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그 경우라도 죄값을 치르고 나오면 먹고 살 길은 마련해 줘야 한다.
하지만 이 글은 범죄자를 옹호하려는 글이 아니다. 그들을 보는 가혹한 시선이 바로 우리 스스로에게 향하는 시선 같아서 쓰는 글이다. 하나의 실수, 한 번의 잘못에 대해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가혹하다. 김새론 같은 연예인은 더 많은 대중에게 조리돌림 당할 뿐, 우리의 실수와 잘못도 주변 사람의 구설에 오르는 일은 흔하다.
사회 시스템도 그렇다.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다. 좋은 대학을 가야한다고 말하고, 좋은 대학을 가면 좋은 직장을 가야한다고 말한다. 좋은 직장을 가기 위해선 '첫 직장'이 중요하다고 하고, 좋은 첫 직장을 가기 위해서는 또 여러 경력(소위 스펙)을 쌓아야 한다. 그렇게 해도 좋은 직장 가기는 어렵다. 그 수가 적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의 문제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쉽게 개인의 게으름으로 치부해 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실패한' 개인은 좌절한다.
좋은 직장을 가도 끝난 것이 아니다. 퇴직까지 남은 시간은 20년 정도, 그 안에서도 실패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 또 경쟁에서 탈락한다. 이렇듯 실패는 너무 흔하다. 그렇게 실패한 사람에게 우리 사회는 낙인을 찍는다. 도태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가 노력하지 않아서, 네 능력이 부족해서.. 언제든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럼 잘못은? 잘못도 흔하다. 계속 말하지만 음주운전 등의 불법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불법을 저지르면 죄값을 치르면 된다. 문제는 그 후의 일이다. 같은 잘못을 계속 저지르면 문제가 되겠지만, 한 번 잘못을 한 사람에게 주홍글씨를 새기고 조리돌림 하지는 말아야한다. 스스로가 사회에서 받는 온갖 스트레스를 잘못한 한 개인에게 풀어버리는 것 같다.
잘못하고 실수하고.. 인간이 살면서 늘 저지르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들에 우리 사회는 가혹하다. 연예인에게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도 그렇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르고 실패한 사람은 스스로에게 가혹할만큼의 책임을 돌리고, 심한 경우에는 자살을 하게 된다. 그렇게 자살하는 사람이 하루에 40명이 넘는다. 사회에서 낙오되고 고립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서로에게 그렇게 가혹한가? 나는 잘 모르겠다. 성별, 세대, 정치적 성향으로 나누어 서로가 서로를 조롱하고 증오하고, 조금만 삐끗하도 역시 비판받는 사회는 언제부터 만들어진 것일까? 어떻게 해야 우린 서로에게 조금 더 관대할 수 있을까? 정말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답답한 마음에 글을 쓴다.
이 글은 성재 이시영 선생이 한국전쟁 중 공직자의 비리로 수만 명을 죽게 만든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사직을 하며 쓴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글입니다.
이시영 선생은 이회영 선생 형제 중 막내로, 유일하게 해방을 보고 부통령을 역임하신 분입니다.
최상병, 이태원 참사, 계엄령 등등의 사건에서 단 한 명도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때 보면 좋을 것 같은 글이라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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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에게 고함
나는 국민 앞에 이 글을 내놓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한편으로 부끄러워하며 또 한편으로는 슬퍼한다. 내가 망명활동 삼십여 년 동안 이역에서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다(無爲渡日)하다가 8.15해방과 함께 나이든 가족들을(老嫗) 이끌고 흔연귀국(欣然歸國)하였을 때 나는 이미 제 구실을 못할 만큼 나이 든(老朽) 몸이건만 여생을 조국의 남북통일과 자주독립을 위해서 바치겠다는 것을 다시금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좌우상극으로 인한 그 혼란의 파도에 휩쓸리기 싫어 나는 귀국하자마자 모든 정치단체와의 관계를 끊고 초야로 돌아가 야인(野人)으로서 어느 당론에도 기우리지 않고 또 어떤 파쟁에도 끌림이 없이 오직 국가를 건지고 민족을 살리려는 일념에 진심어린 정성을 기울였든 것이다.
그렇듯 내 심경은 명경지수(明鏡止水)와도 같이 담담하든 중 단기 4281년(1948년) 7월 20일 뜻밖에도 국회에서 나를 초대부통령으로 선거했을 때에 나는 그 적임이 아님을 모른 바 아니었으나 이것이 국민의 총의인 이상 내가 사퇴한다는 것은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심사원려 끝에 승낙 했다는 것을 여기에 고백한다.
그 뒤 3년 동안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대체로 무엇을 하였든가. 내가 부통령의 군임(軍任)을 맡음으로서 국정이 얼마나 쇄신되었으며 국민은 어떠한 혜택을 입었든가. 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이 부통령의 임무라면 내가 취임한 지 삼년 동안 얼마나 한 도와서 올바르게 이끌어(翼贊) 성과를 빛내었는가. 하나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야말로 재능도 없이 관직에 있으며 녹을 먹는 것에(尺位素餐)에 지나지 못했든 것이니 이것은 그 과오와 책임이(過責)이 오로지 나 한 사람의 무위무능(無爲無能)에 있었다는 것을 국민 앞에 또한 솔직히 표명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매양 사람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일을 하도록 해 줌으로써 그 사람의 직능(職能)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니 만약에 그렇지 못한다면 부질없이 공위에 앉아 허영에 도취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자리를 깨끗이 물러나가는 것이 떳떳하고 마땅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정부에 봉직하는 모든 공무원 된 사람으로 상하계급을 막론하고 다 그러하려니와 특히 부통령이라는 나의 처지로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내 본래 무능한 중에도 모든 환경은 나로 하여금 더구나 무위하게 만들어 이 이상 재능 없이 자리(尺位)에 앉아 나라의(國)록만 축낸다는 것은 첫째로 국가에 불충한 것이 되고, 둘째로는 국민에게 매우 부끄러운(慙愧)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국가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형세(興亡竿頭)에 걸렸고 국민이 존속과 멸망의 낭떠러지에(存沒斷崖) 달려 위기간발에 있건만 이것을 바로잡아 고치고(匡正) 널리 세상을 구할(弘救) 성충(誠忠)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동량지재(棟梁之材)가 별로 없음은 어찐 까닭인가.
그러나 간혹 인재다운 인재가 있다 하되 양두구육(羊頭狗肉)의 가면 쓴 애국위선자들의 도량으로 말미암아 초토에 묻혀 비육의 탄식을 자아내고 있는 현상이니 뜻이 있는 사람(有志者)으로서 얼마나 통탄한 일인가. 뿐만 아니라 나는 정부수립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관의 지위에 앉은 인재로서 그 적재가 그 적소에 등용된 것을 별로 보지 못하였다.
그러한데다가 탐관오리는 도시와 시골(都鄙)에 발호(跋扈)하여 국민의 신망을 상실케 하며 정부의 위신을 훼손하고 나아가서는 국가의 존경을 모독하여서 신생민국(新生民國)의 장래에 암영을 던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이며 이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마다 그르다 하되 고칠 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의 시비를 논하든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오류(濁水汚流)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더구나 그렇듯 관기가 흐리고 민생(民膜)이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 워낙 무위무능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나는 이번 결연코 대한민국 부통령의 직을 이에 사퇴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의 직책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아울러 국민들 앞에 과거 삼년 동안 아무 업적과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謝)하는 동시에 앞으로 나는 일개포의(一個布衣)로 돌아가 국민과 함께 고락과 사생을 같이하려 한다.
그러나 내 아무리 노혼한 몸이라 하지만 아직도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하려는(盡忠報國) 진심어린 마음(丹心)과 정성과 열정은(誠熱)은 결코 사그러지지 않아 남은 생을(殘生) 조국의 완전통일과 영구독립에 끝내 이바지할 것을 여기에 굳게 맹서한다. 그리고 국민 여러분은 앞으로 더욱 위국진충(爲國盡忠)의 성의를 북돋아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여 주었으면 흔행(欣幸)일까 한다.
단기 4284년(1951) 5월 9일
사진을 보고 생각나는 몇 가지 에피소드
1. 회수권.
회수권에 대한 기억은 내 나이 또래면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시절부터 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내가 처음 기억하는 버스요금은 60원. 그래서 어머니는 내가 등교할 때 오십원짜리 두 개, 십원짜리 두 개를 손에 쥐어줬다. 딱 왕복을 할 수 있는 돈이었다. 언젠가 뽑기가 하고 싶어서 50원을 뽑기에 쓰고 걸어갔는데, 초등학교 1학년의 나이인 나는 어머니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교 시간이 늦어지는 것을 어머니가 눈치채지 못 할리 없었다. 난 버스를 탔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뽑기보다 거짓말 때문에 많이 혼났던 기억이 있다.
회수권은 중학교 들어오면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학교에서 샀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몇 백원이라도 아낀다고, 10개짜리 회수권을 종종 11개로 만들곤 했다. 교묘하게(?) 회수권을 자르면 11개가 되곤 했는데, 그렇게 자르다보면 티가 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표와 표 사이의 중간 공백 부분이 중간에 간다던가.. 뭐 이런 경우. 대부분의 기사님들은 알고보 모른 척 해준 것으로 기억하는데, 가끔 원칙주의자 아저씨들을 만나면 매우 혼나곤 했다. 그래도 내리라고 하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다.
2. 넥스트의 마지막 콘서트
난 넥스트의 어마어마한 팬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해체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난 그때까지 콘서트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는데, 이때는 큰 용기를 냈다. 모와 둔 돈을 다 털고, 부모님한테도 사실대로 이야기해서 돈을 좀 빌려서 콘서트 비용과 앨범 비용을 마련했다. 그리고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약을 했는데, 그것이 공교롭게 1997년 12월 31일이었다. 그날은 그들의 해체 콘서트 중이도 마지막 날이었다. 친구들과 간 자리는 콘서트 장에서도 완전 말석이었는데, 그래도 처음 간 콘서트의 현장은 대단했다. 심지어 그들의 마지막 콘서트였으니.. 신해철은 마지막 쯤에, "우리 밤새 여기서 놀까요!"라고 했고, 우리는 모두 "네!!"라고 했지만, 당시 12시부터 음악도시를 진행하던 신해철은.. "그런데 저 아쉽지만 라디오 가야해요.."라고 하고는 앵콜 몇 곡을 더 하고 공연을 마쳤다. 많은 사람들은 흥분과 슬픔 속에서 퇴장했다. 콘서트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내 고2가 끝나고 나는 고3이 됐다.
3. 농구대찬치(기아의 우승)
난 지금도 농구를 매우 좋아하는데, 당시에는 누구나 그랬듯 슬램덩크와 농구대잔치, 그리고 마지막 승부의 영향이었다. 난 남들이 다 고대, 연대 좋아할 때, 기아를 좋아했다. 특히 허재를 좋아했는데, 그의 천재성이 너무 좋았다. 속공을 하는데 멈춰서 3점을 던지고, 지금에는 스텝 백이라고 하는 슛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허재를 보면 농구가 너무 쉬워보였다. 나는 그의 우승이 너무 보고 싶어 친구들과 농구대잔치 결승을 보러갔다. 94-95시즌 경기도 보러갔는데,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결승은 아니었다. 그해에도 기아가 우승을 했는데, 다음해에는 기아우승을 현장에서 꼭 보고 싶었다. 그리고 1년을 기다려서 95-96시즌 농구대잔치 결승을 보러갔다. 날짜도 2월 26일. 그날 기아가 상무를 이기고 우승을 했다. 그때 축포가 터졌고, 옆에 친구랑 얼싸 않으며 좋아했던 기억이 아스라이 기억 난다. 그리고 저 티켓을 보니, 집에와서 잊지 않겠다고 싸인펜으로 쭉쭉 기아 우승이라고 썻던 것도 떠오른다.
6. 96년 한국시리즈(고등학생의 음주 야구 관람)
기억난다. 현대와 해태의 경기었다. 난 롯데 팬이라서 사실 누가 이겨도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가 보고 싶었고 친구들과 경기를 보러가기로 했다. 그런데 당시에도 인기팀인 해태 쪽 표는 구하기도 힘들었고, 엘지 팬인 내 친구는 해태를 응원하기 싫다고 했다(당시 두 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현대 경기를 응원하러갔다. 당시 야구의 인기는 지금과 같지 않아서 표 구하기도 상대적으로 쉬웠다. 3루 쪽 외야에 앉은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교복을 입고(!?) 야구를 보러 갔는데, 그래도 다들 야구를 좋아하니 곧 몰입이 됐다. 당시 현대 선발은 정민태. 나름 에이스였다. 투수전으로 기억한다. 해태 선발은 기억이 나지 않고.. 아무튼 응원하다 해태 선수들을 친구들과 막 욕했는데, 갑자기 주의가 조용해졌다. 속으로 '교복을 입고 욕을 했으니.. 혼나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뒤에 있던 아저씨가 "학생들" 하면서 불렀다. 우리는 긴장하고 뒤를 돌았는데, 아저씨가 활짝 웃으며 "훌륭한 학생들이네! 여기 맥주도 있으니 마셔"(???)라고 말했다. 우리 교복 입고 있었는데.. 그래서 "저희 학생인데요?" 라고 그랬더니, 주변 모두가 합심해서 "어른들이 주는 건 괜찮아!"하셔서 맥주를 한 캔씩 들고 신나게 응원했다. 그날 경기는 졌다.
7. 마무리
이렇게 보니 고등학생 시절 신나게 놀기만 했다. 야구장, 농구창, 축구장.. 정말 다니지 않은 곳이 없다. 표를 모아둔 것만 저정도이니니 얼마나 많이 다녔겠는가.. 저때 공부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도 들지만, 뭐 그래도 나름 재밌었던 기억이다. 집에서 추억의 도구들을 찾은 관계로 적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