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2.12.03 서평: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 창비, 2022)


정지아 작가가 쓴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었다.

빨갱이. 나는 이 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지만, 어린 시절 이 말을 들으면 왜인지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곤 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아이도, 저 단어를 내뱉는 사람들이 가진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저 적의에 가득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모른 체 두려움에 떨며 동조하며, 저 적의를 내재화했다. 저들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나도 '빨갱이'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 단어를 평생 꼬리표처럼 달고 살아온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삶은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이데올로기는 - 그것이 무엇이라고 -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도 쉽지 않았다. 조금 모자라고, 가끔은 찌질하고, 종종 우스워지고, 때로는 한심한 것이 우리들의 삶이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저런 모자람과 찌질함과 우스움과 한심함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미워도 하지만 끝내 서로와 부딪히며 산다. 평소라면 그것이 심해지면 '얼굴 안 보고 살면 그만'이었을 것이지만 어떤 시대에는 서로를 증오해서 죽이고야 말기도 했다. 그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수많은 '배신'을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한 사람이 겪어온 삶은, 적의에 가득 찬 '빨갱이' 딱지를 달면서도 그 신념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의 깨우침인지, 타협인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모를 무언가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들까지 고스란히 자신의 짐을 함께 져야 했기에, 그 마음의 짐을 또 스스로 지고 가야 했던 사람이 아니면, 저 생각을 단순히 '천성'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중 아버지는 죽음으로 해방되었다. 유물론자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는 없으니, 먼지에서 태어나 먼지로 돌아간 그에게 그사이의 삶이란 선택하지 않았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여러 관계와 선택을 강요 받는 감옥과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수많은 관계에서 때로는 싸우고, 때론 순응하지만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삶 말이다.

죽어서야 해방되었던 작중 '빨갱이' 아버지와 그를 둘러싼 여러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묘한 위로를 준다. 그는 '빨갱이'였지만 평범한 아버지였고, 남편이었고, 이웃이었으며, 형이었고, 삼촌이었다. 그런 그의 특수하지만 평범한 삶은, 죽음이라는 누구나 맞이하지만 아무도 경험담을 이야기할 수 없는 그 두려움의 세계가 모두에게 공평하며, 그곳에 도달하기까지의 삶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Posted by beatles for sal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