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술을 잘 모른다. 좋은 시를 읽으면 기쁘고, 좋은 노래를 들으면 설레고, 좋은 그림을 보면 신난다. 때로는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어떤 노래를 들으면 슬프고, 어떤 그림을 보면 눈물이 나고, 어떤 시를 읽으면 생각에 잠긴다. 나는 이런 내가 예술에 대해선 '평균적인 인간'이라는 생각을 한다(사실 평균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배운티를 내겠다고 어떤 작품을 보면 작가의 의도도 파악하려고 해보고, 나름 해석도 시도해본다. 사실 그런식의 '생각놀이'가 재미 있는 경우도 꽤나 있다.
이런 놀이는 내가 접하는 작품에 장르의 익숙함에 따라 재미로 느껴지는 빈도가 다르다. 그나마 익숙한 문자로 된 예술, 즉 문학의 경우는 재미로 느껴지는 빈도가 높지만, 미술, 특히 현대미술 쪽으로 가면 익숙하지 않아서 그냥 생각만 하다 마는 경우가 생긴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익숙해 지는 것에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낯선 것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폭력일 수도 있다. 차라리 어떤 낯선 것을 놓고, '낯설지만 인정하고 그냥 공존하자'라고 이야기하면 받아 들을 수 있다. 우리는 늘 낯선 존재와 부딪치고 살고 있고, 그것이야 말로 삶일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공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전은 공공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국가나 사회의 구성원에게 두루 관계되는 것'
사회 구성원에게 두루 관계되는 것을 공금을 들여 만드는 것은 조금은 익숙해야 한다. 아니 꼭 익숙할 필요도 없다. 최소한 모두에게 낯선 것을 가져다 놨으면 설명은 있어야 한다. 이 낯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피카소 같은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곳에 가보면 설명을 듣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심지어 책을 읽으며 보는 사람도 있다. 이미 유명한 작가의 그림도 사람들은 설명을 듣고 책을 보고서야 이해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작품들을 두고 '너희가 일아서 생각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최소한 '공공예술'이란 측면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전이야 당연히 개인의 자유지만.(이것은 유명인과 비유명인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다. 더 훌륭하고,덜 훌륭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유명한 사람은 사람들이 더 많이 유명인의 의도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국가는 작가 개인을 지원하기도 한다. 그런식의 지원에서 나오는 작품이야 얼마든 낯설어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낯섬이야 말로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넓혀주는 귀중한 자원이다. 그런 개인전의 다양성이야 말로 얼마나 풍부하고 아름다운가.
오늘 우연히 공공미술이라고 이야기하는 전시들을 봤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너 이해하라고 만든 것 아니야'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공공'이란 말을 넣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그곳에는 그 작품에 대한 어떠한 친절한 설명도 없었다. 큐레이터와 도슨트가 바쁘다면 설명이라도 붙여두면 되는 것이다.
누구나 와서 공감할 수 있는 전시가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2017.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