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성북동의 근대 이야기를 하려면 1937년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겠는데 나와 이야기 나눴던 기자들도 그렇고 다른 부분에서도 1933년에 더 주목 하는 것 같다.
내가 1937년 성북동에 주목한 것은 간단하다. 그냥 유명인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한용운과 이태준은 1933년 각각 집을 짓고 이사를 왔다. 그 무렵 김일엽과 김기진 등도 성북동에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1933년 당시 성북동은 이미 ‘문인촌’으로 불리긴 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다른 ‘유명인’들과의 인연은 그 이후의 일이다. 『근원수필』로 유명한 화가 김용준이 친구 이태준의 이웃이 된 것, 간송 전형필이 한국문화재 수집을 진행하며 수장과 연구를 위한 공간 마련을 위해 성북동에 땅을 산 것은 1934년의 일이었다. 전형필이 산 땅에 ‘북단장’이란 이름을 지어준 것은 오세창이었는데, 그 역시 이 무렵에는 성북동을 드나들었음이 분명하다.
1936년 12월에 토지구획정리사업이 발표 됐다. 성북동 일부가 속한 돈암지구는 1차 사업지로 선정되었다. 개발은 이듬해인 1937년부터 시작 됐다. 그해 봄 심우장에서 조헌영·조지훈 부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송 김동삼 선생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들은 당시 성균관 근처에 살며 한용운과 교류했다. 뿐만 아니다. 1938년 완공된 보화각의 공사는 건축가 박길룡의 주도 하에 한창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며, 정지용, 이효석 등은 이태준과 만나기 위해 수연상방을 드나들었을 것이다(『덕수교회 60년사』).
이제 1937년을 생각해 보자. 동지(김동삼)를 잃고 슬퍼하던 한용운, 그를 옆에서 묵묵히 도우며 장례를 치렀을 조헌영과 17살 조지훈. 위아래 살며 밤마다 술 한 잔 해주었을 것만 같은 노시산방과 수연산방의 두 주인, 김용준과 이태준. 그 아래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보화각을 보러 성북동 골자기를 올랐을 전형필. 이들을 만나러 왔을 사람들(정지용, 이효석, 오세창 등) 그리고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된 성북동. 이것이 1937년 활기찬 성북동의 모습이다.
한용운, 김용준, 이태준, 전형필이 이웃인 마을, 그 사람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뒤로 하더라도 충분히 흥미롭지 않은가?
(2017.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