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 서울 - 타슈켄트

0210

- 여행 준비.

별로 준비하지 않은 여행이었다. 하루 전 날에야 제대로 짐을 쌌다. 집 청소도 그제야 했다. 벌써 몇 번째이지만, 마리를 두고 여행 가는 것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계속 미안한 마음이 떠나질 않는다.

짐은 단출했다. 옷 몇 벌, 환전한 돈, 여권, 카메라가 전부였다. 친구가 부탁한 짐은 캐리어 하나에 가득 담았다. 이참에 조금 큰 캐리어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준비랄 것도 없었다. 여행지에서의 이동편, 숙소, 가이드 예약은 모두 현지에 있는 친구가 맡았다. 사실상 친구가 준비한 패키지여행이었다.

 

중앙아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죽을 때까지 가보지 못한 곳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은 낮선 공간이었다. 사실 친구가 없었다면 갈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크로드, 서역, 이슬람, 고려인, 미인(!?) 이것이 내가 우즈베키스탄에 대해 알고 있는 이미지의 전부였다. 그것은 이집트와 같은 신비감,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동질감과 이질감 섞인 무엇, 유럽과 미국에 대한 어린 시절부터 세뇌 된 이상한 동경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우즈베키스탄을 검색을 해보면 고대부터 우리와 교역한 나라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내가 가볼 사마르칸트에 아프로시욥언덕의 벽화가 바로 그 흔적이다. 그 밖에 구 소련에 속했으며, 이슬람문화권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공항에 가서야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에 대해 검색해 봤다.

 

- 비행

비행은 편했다. 코로나19바이러스 덕분(!?)인지 공항은 한산했다. 7시간 10분이 걸리는 거리였는데, 난 비상구 좌석을 받았고, 양쪽이 다 비어 정말 편하게 비행을 즐길 수 있었다. 도착 1시간 30분 정도 전에 창밖으로 엄청난 산맥이 보였다. 천산산맥이다. 찾아보니 천산산맥의 해발고도가 3,600m에서 4,000m, 가장 높은 포베다산의 높이는 7,439m라고 한다. 너비는 무려400이다. 비행용 비행기는 7.6~13정도의 고도를 유지한다고 하는데, 거기서도 산맥이 생생하게 보인 것은 산맥의 엄청난 높이 때문일 것이다.

저 길로도 사람이 다녔다는 상상을 해봤다. 만약 다녔다면, 어떤 이유로 지독한 추위와 외로움이라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저 길을 가야만 했을까? 수많은 잡념이 머리를 스쳤다.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과 무한에 가깝게 느껴지는 시간 속에 우리의 존재와 삶은 먼지 같을 수도, 찰나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그 순간을 영원히 살 것처럼 희노애락을 느끼며 사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도착

비행기에서 내리려는데 의사 같이 생긴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열 감지기를 쓰고 들어왔다. 우리를 하나씩 체크하고서야 비행기에서 내릴 수 있었다. 입국 심사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가니 비가 왔고, 친구가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웠지만, 일단 비를 피해 짐을 싣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친구의 집은 아늑했다. 친구 부부와 아이는 모두 만난 적이 있었고, 아이는 나에게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듯했다. 모두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여행의 첫날 치고는 가장 편안했다.

 

 

비행기에서 본 천산산맥

 

 

02 11

운전

이곳은 한국보다 네 시간이 느리다. 덕분에 새벽에 일어났다. 친구는 부인을 출근시키고, 아이를 등원 시켰다. 나도 함께 했다. 그리고 아침을 먹었다. 특이한 것은 이곳의 신호체계인데, 좌회전이 비보호였다. 즉 양쪽이 모두 직진인데, 그 와중에 좌회전도 해야 했다. 차가 적은 시절에는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지금 같은 교통량이면 글쎄.. 아무래도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온 것 같았다. 끼어들기는 앞으로 했다. 이것을 한국에서는 보통 칼치기라고 부르고 잘못하면 운전자 간 싸움도 일어나는데, 이것도 일상적인 끼어들기의 방법이었다. 옆에서 운전을 지켜보는데 아슬아슬했다.

환전

은행에서 바꾸어온 달러를 우즈베키스탄의 숨(화폐단위)으로 환전했다. 200불을 환전하니 1,900만숨을 줬다. 너무 두꺼워 지갑에 다 들어가지 않았다. 갖고 다니던 힙색에 돈을 넣어 다녔다. 달러를 매우 유심히 살피고 돈을 바꿔주었는데, 100달러 하나에 볼펜으로 된 작은 낙서가 되어 있자 환전을 거부했다. 환전이 어려운 나라였다. 100달러는 나를 대신하여 국내선 비행기와 기차표를 예매해준 친구에게 표 값으로 지불하는데 사용했다(친구는 다행이 받아 주었다!).

 

국립박물관

박물관에 갔다. 입장을 하려고 하는데 매표하는 직원이 보이지 않았다. 박물관 내에서 사람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입장이 시작된 것은 확실했다. 옆에 앉아 있는 직원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영어로 물었는데,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조금 기다리다 다시 그 사람에게 몸짓발짓 섞어가며 얘기하니 그제야 큰 소리로 사람을 부른다. 그리고 한 사람이 천천히 헉헉되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올라왔다. 입장료는 2,000원이 되지 않았고, 사진촬영 비용은 500원 정도 따로 받았다(휴대폰으로 찍는 것은 받는 것 같지 않았다). 사회주의적 느긋함인가? 혹은 게으름인가? 이런 생각이 들다가, 오히려 우리가 너무 쫓기듯 사는 것은 아닌가?라는 반문이 들기도 했다.

2층 한 층에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직은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남들에게 소개하는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있는 한에서 최대한 꾸미고 치장하려는 의지는 보였지만, 유물들은 자신이 가진 가치를 제대로 빛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영어 안내판은 물론, 유물의 이름도 영어로 되어있지 않았다. 3층은 현대와 미래의 우즈베키스탄이었는데, 정권의 홍보관 같았다.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생각났다. 난 어릴 적 중앙청에 있던 국립박물관부터, 현재의 고궁박물관자리에 있던 시절, 그리고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을 모두 방문한 기억이 있다. 언젠가 이 나라도 점차 자신들의 역사를 남들에게 보다 더 잘 꾸미고 치장할 날이 올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관람할 땐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견학을 와 있었는데, 우리 아이들과 비슷하게 대부분은 큰 관심이 없어보였다. 몇몇 학생들은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하자티 이맘광장

유적지를 갔다. 하자티(혹은 하즈라티) 이맘광장이다. 여기에는 중앙아시아에서는 세 번째로 크다는 하즈라티 이맘 모스크, 사슴가죽으로 7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꾸란 중 하나를 보관하고 있는 무이 무보락 메드레세(Muyi Muborak Medressa), 바라크 한 메드레세((Barak-khan Medressa)가 있었다.

먼저 모스크를 살짝 들어가 봤는데 공사 중이었다. 그것도 내부를 대대적으로 뜯어 고치고 있었다. 관계자가 있었는데, 우리를 보더니 앗살라말라이쿰(신의 평화게 당신에게)’이라는 이슬람식 인사를 했다. 같이 대답을 했어야 했지만, 살며 처음 들어본 이슬람 인사에 당황에 영어로 땡큐라고 대답하고야 말았다.

잠시 공사 현장만 보고 다시 나와 무이 바라크 한 메드레세를 갔다. 친구의 설명으로 메드레세는 일종의 대학이라고 했다. 겉에 화려한 문을 들어가면 안쪽에는 칸칸히 방이 있는데 보통 그곳에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1502년 세워졌다는 이 건물은 1868년 지진으로 지붕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바로 복구하였다고 하는데, 겉으로는 잘 모를 정도로 잘 수리되어 있었다. 예전 공부방으로 쓰이던 방들은 이제 장인들에게 제공하여 그곳에서 물건을 만들어 팔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나도 그곳에서 기념품을 몇 개 샀다. 독특한 건축물과 정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이런 구조의 건축을 엄청나게 보게 된다.

나오는 길에 초등학생 쯤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우리와 마주쳤는데, 그 학생 중 하나가 나와 사진을 찍자고 했다. 약간 당황했지만 사진을 찍어줬다. 그후 내 카메라고도 찍자고 했는데, 갑자기 들어오던 초등학생들 가운데 많은 수가 같이 몰려와 나와 같이 사진을 찍었다. 같이 있던 친구도 몇 달 동안 처음 본 풍경이라고 했는데, 지방에서 소풍을 와서 동아시아계통의 사람을 자주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을 아닐까 추측했다. 어찌됐건 나에겐 즐거운 추억이었다.

바라크 한 메드레세를 갔다. 입장료가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출입이 어려웠던 것 같은데, 마침 책임자 같은 사람이 와서 우리를 들여보내줬다. 사진촬영은 불가였다. 아마도 신성한 꾸란 때문이었을 것이다. 원래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는데, 모르고 그냥 들어갔다. 나중에 우리를 들여보내 준 직원이 신발을 벗어야 한다고 웃으며 알려줬다. 중심에 커다란 꾸란이 있고, 주변 방으로 여러 종류의 꾸란이 있었다. 일종의 꾸란 박물관이었다. 한국의 꾸란도 전시되어 있었다. 사슴 가죽으로 책 만드는 기술을 무척 궁금해 하며 나왔다.

점심

위구르게 음식이라는 라그만을 먹으러 갔다. 전통 위구르 식은 국물이 없다고 하는데, 우즈베키스탄 식 라그만은 짬뽕 국물 같은 진한 국물도 있고, 양고기도 들어가고, 마들도 들어간다. 거기에 꼬치요리인 샤슬릭과 빵도 시켰다. 음식은 대체로 다 맛있었다. 나중에 빵을 라그만 국물에 찍어 먹었는데, 맛이 일품이었다. 커피를 마시러 갔다. 종업원이 간단한 한국어를 할 줄 알아서 편하게 먹었다.

라구만, 빵, 토마토 샐러드

- 쇼핑

쇼핑을 했다. 말이 쇼핑이지 기념품을 조금 샀다. 그리고 가죽 공방을 가봤는데, 상당히 해 보이는 물품들이 많았다. 사고 싶은 욕망이 있었지만, 딱히 사용할 곳이 없어 그만 뒀다. 친구는 시장에서 딸이 좋아하는 한국 딸기를 샀는데, 상당히 비쌌다.

 

- 저녁

친구 아이를 학교에서 데리고 축구를 하러 갔다. 후배가 사서 보낸 새 유니폼을 입고 갔는데, 그날이 축구를 하러 간 잠정적인 마지막 날이 됐다. 뭐 아무튼 이런 여가 프로그램이 생각보다 잘 되어 있는 것 같았다. 환대에 고마워 친구 가족에게 한식을 샀다. 그리고 바로 맥주를 한 잔 마시러 갔는데 시간이 되자 밴드가 연주를 했고, 흥이 오르자 젊은 사람들(주로 여성)이 나와 춤을 췄다. 우리 앉은 바로 앞이 일종의 홀(?)이었고, 그 앞으로 무대가 있었다. 일종의 명당인 셈이다. 우리도 신나게(!?) 앉아서 몸을 흔들며 음악을 감상했다.

 

춤을 추는 사람들

0212

- 초르수 시장

초르수 시장으로 갔다. 친구도 처음 가본다는 곳이었다.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는데, 막상 근처를 가니 사람이 엄청 많았다. 친구가 사는 곳이 신도시라면 이곳은 구도심 같은 느낌이었다. 간신히 주차를 하고 시장으로 들어갔다. 한국의 가락시장 같은 느낌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추운 날씨에도 좌판을 열고 각종 물건들을 팔았다. 과일, 고기, 향신료, 반찬 등등 없는 것이 없었다. 조금만 외각으로 가면 구제 옷과 도저히 팔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거의 쓰레기에 가까운 부품들도 팔았다. 시장에는 물건을 많이 산 사람들을 위해 배달을 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 인상 깊은 것은 그 깨끗함이었다. 비가 와서 땅이 젖어 있었음에도 바닥은 깨끗했다.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향신료 등 어쩔 수 없는 냄새를 제외하고는 비린내 등의 냄새도 거의 나지 않았다. 이후 느낀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 깨끗했다. 공중 화장실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사용료는 약 100). 우린 그곳을 구석구석 돌아 다녔다. 석류를 그 자리에서 짜서 만든 석류주스를 하나 사서 마시기도 했다. 여기만 돌아보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크기도 하고 볼 것도 많았다. 무엇보다 현지인으로 가득해도 위협적이거나 불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점심

터키 식당에 갔다. 우즈베키스탄은 터키와 사이가 매우 좋다고 한다. 이곳에는 터키()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음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닭고기 볶음밥 같은 음식과 샤슬릭 같이 생긴 케밥을 시켜 먹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한 터키인은 내가 메고 다니던 가방의 지퍼가 열렸음을 지적해 주기도 했다. 친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차를 마시고 친구 집에 가서 부하라-사마르칸트로 가져갈 짐을 추렸다. 조금 쉬었다. 후에 친구의 아이를 데리고 왔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비행기를 탔다. 공항에서는 세 번이나 짐 검사를 했다. 비행기가 떴다.

Posted by beatles for s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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