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첫 집은 두개의 방이 있는 사글세 집이었다. 물론 난 당시 그 집이 월세인 것을 몰랐다. 방 하나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차지하고 있었고, 우리 네 식구는 나머지 방 하나에서 살았다. 그렇다. 우리집은 가난했다.


집은 가난했지만 난 6살 때부터 학원에 다녔다. 처음 다닌 학원은 우리집에서 차로 20분은 걸렸을 신장 구사거리에 있는 동부 주산학원이었다. 학원차를 타면 구구단 노래가 흘러나왔고, 결국 난 이해도 못하던 구구단을 노래가사 외우듯 외웠다. 7살에는 천호동에 있는 상미 미술학원에 다녔다. 당시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 상당히 많은 곳에 견학을 다녔는데, 당시로도 꽤 비싼 곳이라는 평이 있던 곳이었다. 어머니는 - 교육은 어머니 담당이었으므로 - 가난한 환경에서도 나를 좋은 환경에 교육기관에 보내고 싶어 했다. 당시 동네 친구들은 모두 동네에 있는 풍산유치원을 다녔다. 심지어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는 사립을 보내려고 했는데, 추첨에서 당첨까지 됐다. 결국 너무 멀어 포기하긴 하셨지만..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너무 많은 것을 포기했다. 어디에서 구한 야시카 카메라로 나와 내 동생의 사진을 찍는 것이 어머니의 유일한 사치이자 취미였다. 그 덕에 나와 내 동생의 사진은 꽤나 남아 있고, 앨범도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 앨범에 첫 장에는 이국적은 커다란 흑백사진이 한장 있었다. 어린 나는 어머니에게 사진에 대해 물었다. 어머니는 대답했다. "예루살램, 이스라엘의 예루살램 사진이야. 목사님이 주신 사진인데, 언젠간 꼭 가보고 싶어. 그런데 못가게 되니 그냥 앨범에 넣어 둔거야." 그 사진은 독실한 크리스찬인 어머니의 '불가능한 소원'이었다. 어린 나이라 가난은 잘 몰랐지만 당시 우리집 사정에 해외여행은 불가능 하다는 정도는 나도 어렴풋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작년 설, 우연히 앨범이 눈에 들어왔다. 옛 생각이 떠올라 앨범을 펼치니 그 사진은 앨범 앞을 그대로 차지하고 있었다. 눈물이 왈칵했다. 그 앨범 뒤에는 예전 내 기억엔 없던 어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부터 우리의 어린시절 사진이 이야기처럼 펼쳐졌다. 20대 꿈 많던 젊은이가 자식을 키우느라 70이 되었고, 그러느라 언젠가부터 불가능하지 않아진 소원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어제 저녁 어머니가 이스라엘로 떠났다. 난 작년 설 이후로 예루살램으로 어머니를 보내드리기 위해 돈을 모았다. 아버지는 15년 전 돌아가셔서 한편으로 마음이 아팠지만, 효도의 대상을 집중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적으로 한결 가벼웠다. 돈을 받으며, 떠나며 어머니는 나에게 미안해했다. 나 역시 가끔은 모으는 돈을 나를 위해 쓰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20대를, 그리고 어린시절 내가 다니던 두 유치원을 생각했다. 어머니는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난 한편 뿌듯하고, 한편 죄송스럽다. 어머니의 이번 여행이 힘들지 않길, 그리고 즐겁길 너무 간절히 바란다.


Posted by beatles for s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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