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의 십 년 만에 사촌형의 무덤(정확히는 납골당)에 갔다. 어머니, 동생, 매부(妹夫), 나까지 넷이 갔다(넷이 간 이유는 – 아무도 궁금하지 않겠지만 – 나중에 쓰기로 한다). 형의 납골당 앞에는 최근에 찍은 것 같은 조카들의 사진이 붙어 있고, 그 밑에는 형의 젊은 시절 사진이 있다. 동생은 큰 이모와 영상통화를 했다. 그리고 형의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이모는 곧 눈물을 보이시고 더 보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이모가 다시 웃음을 찾은 것은 임신한 동생의 부른 배를 보고 나서였다.
벌써 18년도 넘은 일이다. 대학교 1학년 1학기, 첫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난 잠에서 깼다. 다급할 뿐만 아니라 이미 우는 목소리였다. 평생 약한 모습 한 번 보이지 않던 어머니의 낯선 모습에 난 이미 당황했다. 하지만 당황하긴 일렀다. 어머니의 다음 말에 난 정말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은 “경대 형이 죽었데.”라는 말이었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일단 중간고사는 보러갔다. 스물, 아직 어린 나에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쉬이 다가오지 않았다.
1989년,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시장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2주가 넘게 있었다. 말 그대로 생사를 넘나들었다. 당시 식당과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던 우리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가족의 부재임과 동시에 생활의 문제였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꾸기엔 초등학교 2학년인 나는 너무 어렸다. 그 자리를 메꾼 것이 경대형이다. 형은 당시 컴퓨터 회사를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면 꽤 유망한 회사에 다녔던 셈이다. 하지만 무슨 책임감에서였는지 회사를 그만두고 우리를 도왔다. 거의 같이 살다 시피 했다. 아버지가 하던 일은 고스라니 형의 몫이 됐다. 먼 시장에 가서 장을 봐오고, 식당일을 도왔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컴퓨터 쪽 일은 다시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형에게 당연히도 미안해 했다. 우리 가게가 자리를 잡자, 형이 슈퍼마켓을 할 수 있게 알아봐 주기도 하고, 형의 결혼을 중매 서기도 했다. 나에게도 형은 각별했다. 말이 형이지 나보다 형은 나보다 18살이나 많았다. 그럼에도 형이 결혼하기 전까지 난 철없이 반말을 할 정도로 가까웠다. 어머니는 9남매였는데, 형은 큰이모의 큰아들이라 우리 24명 사촌 중에 가장 큰 형이기도 했다. 아무튼 형은 철없는 나를 참 자상히도 봐줬다. 형은 그림을 잘 그렸는데, 내가 그려달라는 그림을 다 쓴 달력 뒤에다 그려주기도 하고, 팔고 남은 스타킹 박스 뒤편에(구멍가게도 했으므로)도 그려주곤 했다. 어디선가 낡은 1루수 글러브를 구해와 나에게 줘서, 동네 야구판에서 내가 어께 한 번 으쓱하게 해 준 것도 형이었다. 수능이 끝나자 우리 어머니에게 말을 하고 나와 같이 수능 본 사촌 동생을 불로 형네 슈퍼마켓 앞 포장마차에서 나에게 정식으로 처음 소주를 사준 사람도 형이었다.
시험을 보고 병원으로 갔다. 강동성심병원 장례식장이었다. 거기엔 형의 영정사진이 놓여있었다. 멍하니 서서 영정사진을 30분은 바라보고 나서야 형이 죽었다는 것이 조금씩 실감나기 시작했다. 가까운 사람의 첫 죽음은 스무 살의 나에겐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장례식 기간 내내, 그리고 끝나고 나서도 난 꽤나 술을 많이 마셔서, 당시 막 친해지던 대학 동기들을 괴롭혔다. 당시 조카들의 나이는 6살 4살 정도였는데, 둘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형이 젊은 나이에 갔으니 형수도 젊었다. 형수는 몇 년이 지나 재혼을 했는데, 처음에는 그것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다짐은 조카들에게 잘 해주겠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난 많이 잊고 살았다. 조카들이 찾아오면 잘해주긴 했지만 형이 나에게 했던 만큼 헌신적일 수는 없었다. 조카들은 볼 때마다 커서 왔다. 어엿하게 큰 조카들에게 형의 모습이 보일 때는, 형이 생각나 당혹스럽기도 했다. 이제는 너무 커서 맛있는 것 사다준다는 정도로는 찾아오지도 않는 조카들이지만, 형만 생각하면 조금도 서운하지 않다.
38살. 형이 죽은 나이, 그리고 지금 내 나이. 이제 난 형보다 세상을 더 살게 될 텐데, 형만큼 사람들을 잘 품을 수 있을까? 오늘의 나를 형이 봤으면 나에게 뭐라고 말을 할까?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왈칵 나올 만큼, 형이 보고 싶은 밤이다.
(2017.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