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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7.14 2020 여름 휴가기 : 2일차(경주-울진) 1

1.

아침을 먹고 또 김밥을 사러갔다. 이제 너무 유명해진 김밥을 사기 위해서였다. 나는 C에게 김밥에 대한 추억을 설명했다. C는 알 수 없는 추억이었지만, 그래도 추억에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니 열심히 들었다. 이른 아침이라 명성에 비해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맛은 예전의 그 맛이 아니었지만, 나에게 그 김밥은 단순한 김밥 이상의 무엇이었다. 음식을 매개로 추억이 떠오르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언제든 다시 그 김밥을 먹을 때면, 아니 그 김밥이 떠오를 때면 추억은 자연히 같이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추억이 담긴 김밥을 사서 국립경주박물관(이하 경주박물관)으로 향했다.

 

2.

경주박물관은 예약제로 운영됐다. 1시간에 300. 우리는 전날 예약을 했지만 신분증만 있으면 현장에서도 접수가 가능했다. 무려 수천 년을 지난 유물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경험이다. 물건들을 통해 그것을 사용하던 옛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떻게 사용했을까? 저것은 어디에 두고 보았을까? 그리고 다른 이것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된다. 물론 이것에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매우 치밀한 증거들을 통해 상상을 논증해내어야 하지만, 오늘 같은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생각나는대로 생각하는 사치를 부려보는 것도 특권이다.

, 갑옷을 입다라는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매우 흥미롭게 전시를 보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러 이야기가 있었는데, 핵심이 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에 대한 논쟁이었다. 말 갑옷의 무게, 거기에 갑옷을 입은 사람의 무게까지 더하면 말이 과연 제 속도를 낼 수 있었을까에 대한 논쟁과, 말이 불상하다는 이야기까지 주제는 다양했다. 첫 번째 물음에 대한 설명이 전시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오는 길에 성덕대왕 신종의 종소리를 들었다. 부처님의 음성이라는 범종의 소리는, 위안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비록 녹음된 소리였지만, 한참을 들었다.

수많은 토기들
금붙이
말갖춤 중 일부

 

3,

석굴암으로 갔다. C의 선택이었다. 비가 오는 토암산은 차로 쉽게 오를 수 있었다. 그곳에서 김밥을 먹었다. 입장료는 6,000원이었다. 10분 남짓한 길을 걸어 석굴암을 갔다. 그 신비로운 모습에 여전히 경외감이 들었지만, 본 시간은 고작 2분 남짓이었다. 유리벽 넘어의 모습이 볼 수 있는 그 경외로운 작품 감상의 전부였다. 신라시대에도 관람은 이 정도였을까? 하긴 그 때는 관람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을 수는 없었다. 신비로운 문화유산이라고 해도, 이런 정도라면 또 와서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위대함과 경의로움을 불국사는 보호라는 핑계로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유리벽 속에 갇힌 부처님의 얼굴은 자애롭다기 보다 슬퍼보였다. 대중을 만나지 못하는 부처라니!

석굴암
토암산에서 바라본 경주

4.

많은 감상을 뒤로하고 포항으로 갔다. 보고 싶은 사람도, 보고 싶은 장소도 있었다. 일단 사람을 먼저 보아야 했는데 시간을 맞추기 위해 호미곶을 먼저 들렀다. 비바람은 세차게 불었다. 우산을 쓰고는 있지만 의미는 없었다. 손바닥을 위로하고 있는 조형물이 있는 이곳은 해돋이를 보는 장소로 유명하지만, 우리는 그냥 바다를 보러 왔다. 지금부터는 7번국도를 타고 가는 여행이었다. 비바람 속에서도 나와 C는 웃어가며 사진을 찍었다. 새삼 이런 날씨에도 웃으며 여행을 같이 다닐 수 있는 친구인 C가 고마웠다.

호미곶
호미곶의 거친파도

5.

사촌동생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본지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 집안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사는 이야기를 했다. 경찰은 그는 근무시간이 대중없다고 했다. 지금은 뺑소니 사건 담당이라 더 정신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울산, 정확히는 언양이 고양인 동생은 2006년부터 포항에서 살고 있다. 어디든 먼 것은 마찬가지여서 얼굴보기가 쉽지가 않았다. 거기에 7년 전에 결혼까지 했으니 보기는 더 어려워졌다. 이런 기회에 보지 않으면 또 10년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다. C가 어색해할까 살짝 걱정했지만, C와 동생 모두 걱정이 무색할 만큼 이야기를 잘 이어갔다.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하고, 기약 없는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동생과 헤어질 때 즈음 비가 그쳤다.

 

6.

영일냉수리신라비를 보러갔다. 냉수리비라고 불리는 이 비석은 대게 50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흔히 지증왕이라고 부르는 지증마립간이 지도로갈문왕이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니, 학술적인 이야기는 빼자. 다만 이 지도로갈문왕은 사라, 사로 등으로 불리던 신라의 이름을 신라로 확정한 사람이고, 앞서 내가 대릉원에서 안타까워하던 순장을 금지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이곳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일종의 재산권 다툼에 대한 판결을 했다. 이 비석은 그 판결을 적어 놓은 것이다. 그의 판결은 정당한 것이었을까? 그의 판결로 어떤 사람의 억울함이 좀 풀렸을까? 그것까지는 알 방법이 없다. 자연석을 약간 다듬어 글자를 새길 수 있는 곳에 모두 글자를 써 넣은 이 비석은 얼마 전까지도 가장 오래된 신라비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는데, 여전히 작은 비각에 외롭게 있었다. 바람이 많은 날은 비도 피할 수 없었다. 누구나 와서 판결을 보라고 만들어 놓은 비였기 때문에, 이편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

7.

배가고파 바로 옆에서 점심을 먹었다. 허름한 식당이었는데, 주인아주머니는 귀찮은 듯 우리를 받았지만, 받고 나서는 친절하게 우리를 손님으로 대해주었다. 된장찌개는 더 할 수 없이 맛있었고, 가짓수가 많지 않은 반찬 역시 모두 별미였다. 나도 C도 모두 만족했다. 든든하게 한 끼를 그곳에서 때웠다. 그리고 숙소로 향했다. 가는 길의 풍경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됐다. 비가 그쳐 맑은 하늘, 하지만 곳곳에 남아 있는 비의 기운은 묘하게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었다. 연신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이 사진에 다 담길 리 없었다. 그냥 이런 호사는 눈으로 보고 머리로 기억하는 것으로 남기기로 했다. 날은 금방 어두워졌고, 가는 길에는 가로등도 많이 없었다. 고양이들은 무슨 일인지 도로에 나와 있어 운전하는 나를 놀라게 했다. 숙소 근처에서 치킨과 맥주를 샀다.

위안이 되어주던 풍경 하나
위안이 되어주던 풍경 둘
위안이 되어주던 풍경 셋

Posted by beatles for s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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