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뮤지엄 산’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알고 보니 꽤나 유명한 곳이었다. 주말에 가기에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았고, 연차도 남아 평일을 잡아 당일치기 원주 여행을 가기로 했다.
차가 막히는 것이 싫어 출발은 새벽에 했다. 6시 조금 넘어 출발했고, 아침은 휴게소에서 도시락 대신 싸간 만두로 먹었다(어머니 감사합니다). 뮤지엄 산이 개관 시간은 오전 10시. 아무리 천천히 가도 8시 조금 넘으면 도착하는 시간이었다. 휴게소에서 검색 후 일정을 바꿨다. 그래서 처음 간 곳은 반곡역.
폐역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역은 여느 폐역과 같이 작았다. 위치도 묘한 곳에 있었다. 지금은 개발에 밀려 외진 곳이 된 것인지, 본래 외진 곳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반곡역의 위치는 차로 가기도 불편한 위치 였다. 안내판을 보니 일제가 강원도의 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중앙선을 놓는 과정에서 생긴 역이었다. 한동안 부산했을 이곳은 시간이 지나자 쓰임이 다했고 이제 폐역이 된 것이다. 사람이야 많은 생각을 하지만 자연이야 알 것이 있겠는가. 역의 사정은 알 것 없다는 듯 꽃은 여전히 피고 뻐꾹이가 울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스타벅스를 들렀다.
반곡역에서 가까운 박경리 문학공원(문학기념관)을 들렀다. 몇 년 전에 와본 곳이었다. 그때는 사람들을 인솔해서 왔지만, 이번엔 혼자 오니 한적하고 가벼웠다. 박경리 선생이 살던 옛집은 코로나 이후로 내부 관람이 안 된다고 해서 아쉬웠지만, 기념관의 첫 손님이었던 나는 주변을 신경쓰지 않고 이곳을 둘러봤다. 그곳에는 젊은 시절의 박경리부터 만년의 박경리까지가 있었다. 한 사람의 일생을 이렇게 본다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경험이다. 한 젊은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잃고,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글을 쓰고, 남을 자식과 손주를 키우는 삶은 평범하지만 감동적이다.
그 한 사람의 육체에세 저 장대한 글이 나왔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 작은 육신에 그 많은 지식이 있다는 것이 신비로웠으며 그 육신의 삶이 다 하면서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것이 서글펐다. 그래도 글이 남았으니 다행이었고, 인류의 지혜와 지식이 이런식으로 전달 되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가고 싶었던 뮤지엄 산이었다. 통합권 입장료는 39,000원. 싸지는 않았다. 첫인상 또한 조금 큰 박물관이라 생각했다. 종이 전시도 평범했다. 사진 찍이 좋은 카페의 풍경이 이곳을 만들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명상관에서 진행한 30여 분의 명상은 꽤나 특별했고, 제임스 터렐 관에서 본 그의 작품을 경험한 것은 최근 들어 가장 만족스러웠다. 거대한 건축을 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빛을 잘 사용하는 작가였다. 11시가 조금 되지 않아 입장했는데 이것저것 다 하고나니 배가 고파 비싸고 경치 좋은 카페에서 커피와 케익을 먹으며 이 글을 쓰는 시간은 오후 2시가 넘었다. 3시간이 훌쩍이다. 카페에 가장 좋은 자리에 혼자 앉아 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자리인데, 비싼 커피와 케익 값을 다 하기 위해 오래 앉아 있을 계획이다.
오랫동안 좋은 자리에 앉았는데, 옆 자리 커플이 파라솔(?)도 없는 곳에 앉아 고생하고 있는 것이 좀 고소하다가도 마음에 걸렸다. 지금까지 왔던 여행기도 정리했겠다, 명상도 했겠다, 마음 좋은 척하고 덥다고 다른 곳에 가려는 커플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뭐 정확히 말로 양보한 것은 아닌데, 막 떠나려고 할 때 쯤 가는 척 정리를 시작하니 알아서 나 가면 앉으려고 그들도 자리를 정리했다.
여주 아울렛에 갔다. 티셔츠를 두 벌 샀다. 아울렛인데 왜이리 가격이 비쌀까? 뭐.. 아무튼.. 그리고 어머니 집으로 다시 갔다. 어제 저녁, 내가 집에 온 이후 많이 어지러우셨다고 해서 잠시 들렀다. 다행히 많이 나아지셨다고 했다. 동생이 해물찜을 시켜놔서 간단히 먹고 30분 정도 잤다. 자고 일어나 조카들과 힘겹게 놀았다. 같은 놀이를 100넘게 해도 아이들은 질리지 않았다. 덥지도 않은 저녁에 땀이 났다.
그리고 집에 오니 마리가 반긴다. 뭐라고 해도 여기가 내 집이다.
가끔 돈을 쓰며 미술관 같은 곳을 왜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여러 답이 있겠지만 나에겐 경험이다. 오래전, 아니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작품에는 그들이 사는 시대가 있고, 나는 그 시대를 그 작품을 통해 체험한다. 동시대 작품 속에는 내가 보지 못하는 내가 사는 세상이 있다. 그들의 작품은 그 속으로 나를 안내한다. 문학도, 음악, 연극과 영화도 그 점에서 모두 나에게는 본질적으로 같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나를 조금은 열린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해 준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조금 불편해도 슬퍼도 괜찮다.
집에 와서 씻고 누우니 하루 종일 혼자 있을 마리가 마음에 걸린다. 낚시 줄을 갖고 또 조금 놀아줬다. 늘 비슷한 놀이에도 만족하는 마리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오랜 여행이든, 하루짜리 여행이든 지나고 나면 꿈 같다. 그 지난 꿈 같은 시간을 회상하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