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머리해안'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3.09.02 2013 4박 5일 혼자 떠난 제주도 여행기(8월 19일~8월23일)

프롤로그

'모든 여행은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 여행객의 거의 대부분은 마지막 목적지가 바로 그들의 집이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다. 그럴꺼 뭣하러 가냐는 사람도 일부 있겠지만, 모든 삶도 결국 죽기 위한 여정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마지막 목적지가 집인 여행이야 말로 훌륭한 인생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름 먹고 살만한 나라에 태어난 덕분으로 살면서 난 여러 번의 크고 작은 여행을 각각의 목적을 갖고 떠날 수 있다. 인생은 한 번 밖에 살 수 없지만, 여러 번 떠날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작은 인생- 바로 여행이 갖는 매력이다. 


태어나 34년간 난 직장 다운 직장을 다녀 본 기억이 없다. 학교 박물관에서 2년을 근무한 것이 사회생활의 전부였고, 그곳은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곳이었다. 그런 나에게 '여행'은 익숙한 단어였지만 '휴가'는 생소한 그 무엇이었다. 이번 나의 제주도 여행은 '내 생에 첫 휴가'인 샘이다(뭐 '생에 첫 주택' 이런 정책이 왜 이때 떠오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면 '휴가'가 필요하기도 했다. '입사'를 한 뒤로 4달 넘게 생소한 일을 하며 정신 없이 달려왔다. 일을 배우고, 사람들을 만나고, 갈등을 마주하고 조정하며 지낸 시간들이었다. 잠시 이 일들을 잊을 필요가 있었다. 멀리 떠나고 싶었고, 우르르 몰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한 곳이 바로 제주도였다. 원래 한 명의 친구와 같이 갔으면 했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쉽긴 했지만 혼자라도 상관은 없었다. 그렇게 나의 혼자가는 제주행 휴가는 결정 됐다. 


결정이 쉬운 듯 담담하게 썼지만 망설이고 망설이다 휴가 5일 전에 결정을 내렸고, 그제서야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숙소를 예약했다. 이동 수단으로 택한 것은 스쿠터였다. 그냥 타보고 싶었다. 면허가 있고 자전거를 탈 줄 알면 된다는 이야기를 검색으로 알게 된 이후에는 무엇에 홀린 듯 쉽게 결정했다. 제주에 사는 한 후배에게도 연락을 했다. 아주 친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박물관 근무 2년 간 꽤나 정든 후배였고, 마침 제주에 머물고 있었다. 흔쾌히 약속을 잡았다. 후배는 다른 약속이 있어 긴 시간을 할해 할 수 없어 미안하다고 했지만, 오랫만에 얼굴을 본다는 사실 만으로도 반가웠다. 이 모든 준비는 하루만에 끝이났다. 준비는 간단했고, 여행 하루 전에 싼 짐은 간촐했다. 


제주는 몇 번이나 가본 곳이었다. 정방폭포, 한림공원, 천지연폭포, 주상절리, 섭지코지 등등 유명한 관광지는 모두 몇 번씩 가봤고, 이번에 그런 곳은 가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특별히 어디를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급히 결정되었고, 어디를 가야한다는 압박도 없는 여행(또는 휴가)이었다.



19일(첫 날).

여행의 아침이 됐다. 모든 여행의 시작은 역시 집이다. 아침에 출근하는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나도 곧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그리고 공항으로 향했다. 5호선 강동역에서 김포공한 역까지의 길은 생각보다 멀기만 했다. 혼자 간다는 생각 때문에 조금 긴장도 되고 설랬는지 더 멀게만 느껴진 것 같다.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집에서 나온 것이 여행의 근본적 시작이라면 여행의 실질적 시작은 공항이었다. 김포공항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설래임과, 도착하는 사람들의 아쉬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가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출발구 앞에는 가족끼리, 연인끼리,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혼자 떠나는, 그래서 이야기 할 사람이 없던 나는 창 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보니 탑승시간이 됐다. 내 좌석은 비상구 좌석이었다. 앞의 공간이 넓은 대신 사고가 나면 승무원을 도와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혼자 가는 남성에게 할 법한 부탁이었다고 생각했고, 넓게 앉을 기대감에 흔쾌히 승락했다. 



<혼자 시간을 때우며 바라본 김포공항 창밖풍경>

※모든 사진은 아이폰5로 촬영하였습니다. 클릭하면 큰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비행기 출발 전 찍은 비상구>




제주에 도착했다. 후배가 마중 나오기로 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내리자 마자 전화를 하고 1번 출구로 나갔다. 그러느라 제주공항에서 챙기려고 했던 제주도 안내지도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하고 바로 나왔다. 나가고 2분(?)쯤 있으니 후배가 도착했다. 후배의 차를 타고 스쿠터를 빌리기로 한 곳으로 갔다. 가기 전에 간단히 차를 마셨다. 이후에 또 약속이 있다고 해서 예정된 짧은 만남이었다.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 맛집 몇 곳과 가볼 만한 곳 몇 군데를 추천 받은 후 아쉬움을 남기고 스쿠터를 빌리러 갔다.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스쿠터였다. 겁이 많이 났다. 간단한 자전거 테스트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스쿠터를 타야했다. 간단한 사용법을 익히고 혼자 주유를 하러 갔다. 큰 차들이 막 옆으로 지나가니 겁이 덜컥났다. 운전을 처음 할 때보다 더 겁이 났던 것 같다. 주유를 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공항에서 챙기지 못한 지도도 챙기고,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들었다. 몇몇 무거운 짐은 안장 밑에 넣고 갈 곳을 지도로 확인하고 출발했다. 


처음 하는 어떤 일이 긴장되지 않을까. 지나면 아무 것도 아닌 일도 처음에는 설래고 두려운 법이다. 초등학교를 처음 진학 할 때도, 중학교를 처음 갈 때도, 대학에 입학 했을 때도, 군대에 입대할 때도 그랬다. 이런 인생의 큰 사건들 말고 짧은 4박 5일의 여정의 첫 걸음부터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을 보면 여행은(비록 그것이 휴가라 해도) 역시 짧은 인생이었다. 


출발 할 시간이다. 부르릉. 시동이 걸렸다. 오토바이 대여점 사장님의 불안 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출발했다. 큰 차들(사실 당시에는 중형차 이상이면 다 '큰 차'로 느껴졌다) 옆으로 천천히 눈치를 보며 간신히 봐둔 길을 찾아가며 운전을 했다. 운전은 어렵지 않았다. 자전거를 잘 탄다면 누구나 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동네 할머니들도 가끔 몰고 다니는 것이 스쿠터였다. 그렇게 조금씩 익숙해지며, '큰 차'들의 추월을 당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드디어 봐둔 해안도로가 나왔다. '큰 차'가 없을 해안도로로 좌해전을 해서 들어갔다. 그리고 바다를 보며 잠시 달리다 잠시 스쿠터를 세우고 쉬기로 했다. 그제야 정신이 좀 차려졌다. 사진도 좀 찍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주도 도착해서 단 한 순간도 카메라를(그래봐야 아아폰) 꺼낸 적이 없었다. 아아폰을 꺼내서 처음 찍은 것은 내가 타고 온, 그리고 앞으로 타고 갈 스쿠터였다. 잘 부탁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당시 처음 찍은 스쿠터 사진>



사실 가기 전에 국립제주박물관을 들릴 생각이 었으나,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것 같이 월요일은 박물관의 휴관일이다. 대신에 '삼양동 유적'이란 곳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 들렸다. 한적한 마을에 위치한 삼양동 유적은 신석기 시대 유적을 전시해 둔 곳 같았는데, 작은 전시관이 있었고, 유적을 보존처리 해서 보게 해 놓은 곳과 당시의 움집을 복원해 둔 야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매표소에 인기척이 없길래 '이곳도 월요일은 쉬나보다'라고 생각을 하고 돌아서려는 찰라 어디선가 직원이 나타났다. 매표를 하고 안에 들어갔는데, 박물관에서 흔히 보는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 복원, 몇 개의 토기들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별할 것은 없었다. 인상에 남는 것은 영상 같은 것은 찾는 사람이 없어서 인지 몰라도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이것은 22일 갈 평화박물관이랑 비교가 됐다). 30분도 안되는 관람을 마치고, 바로 근처 '삼양 검은 모래 해변'을 잠시 바라보다 함덕으로 향했다. 


함덕과 협재는 나의 기억에 '가장 아름다운 제주 해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아직 혼자라는 것과 스쿠터라는 것에 익숙해지지 못한 상황에서 간 함덕은 그냥 잠시 '바다 구경' 하는 곳이었다. 무언지 어색해 오래 머물지 못했고, 스쿠터를 타고 숙소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도 급했다. 잠시 바다를 구경한 후 사진을 몇 장 찍고 다시 스쿠터로 향했다. 


마음이 편하지 못하면 좋은 곳을 와도 좋은 줄 모른다더니 내 신세가 딱 그랬다. 앞으로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도 이러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부시게 맑은 제주의 하늘 아래서, 휴가까지 와서 이런 걱정을 하는 자신이 조금 한심하기도 했지만, 다시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함덕에서 스스로 때문에 저런 자괴감을 느꼈다면, 그 아름다운 경치는 그것을 잠시 잊게해 줬기 때문이다. 


<함덕 해변에서 바라 본 풍경>


<함덕 해변에서 바다를 보던 한 노인>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후배에게 추천을 받은 '소낭'이라는 게스트 하우스였다. 휴대폰의 지도로 내 위치를 확인하면서 왔는데, 스쿠터라 계속 확인 하긴 어려웠다. '이쯤이면 다 왔겠지..'라고 생각하고 길가에 스쿠터를 세우고 위치를 확인하니 바로 목적지 부근이었다. '헉'하고 놀라 왼쪽을 보니 '소낭'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오늘의 긴 여정의 목적지를 찾아온 것이다.


게스트 하우스에 매력을 느낀 것은 2년 전(2012년) 일본에서였다. 제한 된 여비로 당시 엔고의 일본에서 한 달 정도를 머물러야 하는 나에게 값이 싼 게스트 하우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러 명이 같은 공간을 써야하고, 샤워실과 화장실도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곧 혼자 여행하는 사람에게 게스트 하우스는 최고의 답안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 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같이 여행을 왔다는 공통점 하나로 마음을 열고 금방 친해지는 곳이 바로 게스트 하우스였다. 난 게스트 하우스에 묶으면서 일본, 캐나다, 호주, 홍콩의 친구들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 기억은 나에게 강렬했고, 이번 여행에서도 흔쾌히 게스트 하우스를 선택하게 했다.


소낭게스트 하우스의 첫 인상은 약간 산만했다. 스텝이 몇명 있었고, 그들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인지 약간은 퉁명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차할 곳과 쓸 방, 그리고 그곳에서 사용할 침대를 안내 받았다. 휴대폰을 충전하고, 샤워를 했다. 이곳을 소개해 준 후배는 '이곳에서 밤에 하는 바베큐파티에 꼭 참석할 것'을 당부했다. 난 12,000원을 더 내고 참석을 하기로 했다. 7시 반쯤 시작한다고 해서 침대에 누워 오늘의 정신 없던 일정을 되세기며, 그리고 기약 없는 내일을 보람찬 하루로 만들기 위한 궁리도 했다. 


7시 반이 조금 넘어 시작된 소낭의 바베큐 파티는 인상적이었다. 일단 책상을 길게 놓고 남자와 여자가 마주보고 앉는다. 이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촌장이라고 부름)이 간단하게(!?) 소개를 겸한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사람들에게 자기 소개를 하게 했다. 시계 방향으로 소개를 했는데, 잘생긴 순서라고 했다. 난 11시 59분 쯤의 위치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가장 못생긴 순서(즉 마지막!)에 자기 소개를 하게 됐다. 20대 초반에서 40살까지 다양한 나이의 사람들이 각자의 소개를 했다. 밥과 고기, 찌개가 나오고 약간을 돈을 갹출하여 술도 샀다. 낮선 여행지, 저녁이라는 시공간과 술이 만나자 사람들은 금방 긴장과 경계를 풀었다. 각자 여행을 오게된 사연을 이야기 했다. 오늘이 처음인 나와 같은 사람들에 오늘이 마지막인 사람들에게 가볼 만한 여행지를 물어보기도 했다. 


1차(?)가 정리되었다. 눈치게임을 해서 설거지 할 사람을 정했다. 나는 걸리지 않았다(그 수많은 사람 중 2를 외치며 게임에서 벗어났다). 뭐 아무튼, 2차에서 조금 더 술이 들어가자, 한국 특유의 나이대로의 서열이 생겼다. 난 9등급 분류에 따르면 상중중 정도가 되는 나이였다. 이런 서열이 생길 정도가 되면 이제 좀 사적인 이야기들이 진행된다. 애인이 있는가? 학교와 전공 혹은 하는 일을 묻기 시작했다. 사는 곳과 고향도 묻기 시작했다. 난 여기서 고향인 남해 사람을 만났다. 이 자리에 가장 연장자인 40살의 형이었다. 생활권은 분당-건대였던 것 같다. 분위기는 한창 무르익었지만 게스트 하우스 근처에는 술을 더 살 곳이 없었다. 뭐든 약간 아쉬울 때 끝나는 것이 좋다 했다. 그렇게 자리를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정말 아쉬웠나보다. 남자들의 수다는 늦게까지 이어졌다.


<1차(?) 바베큐 파티를 했던 장소>



20일(둘째 날).

아침이 됐다. 이곳의 특징 중 하나는 아침 프로그램이다. 원하는 사람은 이 아침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오름을 가거나 비자림을 가는 것이었다. 날이 너무 더워 날씨가 너무 좋으면 비자림을 간다고 했다. 가기 위 6시에 나와야 했고, 조금 더 일찍 일어나면 일출을 볼 수 있다고 했다(소낭은 제주 북동쪽인 월정리라는 곳에 위치한다). 음주와 수다로 인해 늦게 잤음에도 다들 일찍 일어났다. 나도 일찍 일어났다. 덕분에 일출을 볼 수 있었다. 2006년에서 2007년으로 넘어가던 그날 난 친구들과 일출을 본다고 경포대에 간 적이 있다. 그러나 구름 때문에 일출은 커녕 높이 오른 태양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 때문일까? 졸음에 겨워 본 일출은 형언 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태양은 고개를 내밀자 급격하게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금방 그 모습 전체를 보였고, 곧 바다 위로 떠올랐다. 세상은 금방 밝아졌고, 오름이 아니라 비자림을 가게 될 것이 확실시 되었다. 역시나 갈 곳은 비자림으로 결정됐다. 어제 술자리로 꽤나 친해져, 몇 대의 차에 모든 사람이 나눠타고 비자림으로 향했다.


<소낭게스트하우스 앞에서 본 일출>



비자림. 비자나무가 모여있는 자연림이다. 새벽의 숲속은 그냥 그대로 신비롭지만, 비자나무 숲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는 더 신비로웠다. 비자나무는 신비롭게 자랐다. 좌우로 큰 가지들이 뻗기도 하고 두 나무가 합쳐진 모습의 나무, 나아가 몇 개의 나무가 합쳐진 것 같이 보이는 나무도 있었다. 우거진 숲은 강렬한 아침 햇살도 잘 뚫고 들어오지 못할 정도 였다. 새벽의 나무 숲을 걸으면서 난 비로소 '휴가' 온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모든 걱정도 신비한 경관 앞에서 다 잊었다. 멍하니 감탄하며 걷다보니 어느 덧 한 시간이 금방 지났다. 7시를 넘어서자 햇살은 더욱 강렬해졌다. 우거진 숲 사이로도 햇살이 들어오기 시자했다. 그것은 강렬한 빛내림으로 나타났다. 강렬한 빛내림이 만들어 낸 풍광이 더욱 이 비자림을 떠나는 것을 아쉽게 했다. 하지만 가야 했다. 밥도 먹어야 했다.


<비자림의 빛내림>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오기 전에 해안도로를 들렸다. 바다를 구경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차에서 내리자 엄청난 햇살과 더위가 우리를 맞이했다. '오늘 하루도 고생하겠군'이란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같이 간 스텝이 커피집 한 곳이 이른 시간임에도 냉커피를 팔기로 했다고 말했다. 너무 더웠기에 모두 그 커피집으로 갔지만 어쩐 일인지 사장님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그 커피집 앞에서 20분 여를 서성이다 숙소로 돌아왔다. 


아침을 먹었다. 간단한 한식이었다. 어제 밤과 함께 간 비자림 덕분인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밥을 먹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게스트 하우스는 만남도 흔하지만 헤어짐도 흔하다. 회자정리. 이 인생의 간단한 원리는 이곳도 예외일 수 없었다. 헤어짐을 아쉬워 하기보단 만났던 기억을 가슴 한켠에 담고 각자의 길을 가야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떠났다. 뭔가 조금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나도 같은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다. 


처음 간 곳은 아까 들어가지 못한 커피집이었다. 그곳에서 아까 마시지 못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첫 날의 이야기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긴 이야기였다. 그렇게 정리하고 있는데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아까 게스트 하우스에서 헤어진 친구였다. 그 친구는 내가 '절물 자연휴양림'을 간다고 들었다며, 목적지가 같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그리고 보니 게스트 하우스에서 쉬기 좋은 곳 중에 한 곳으로 사람들이 그곳을 추천했고, 내가 그곳에 가겠다고 한 말이 기억났다. 본래 김영갑 갤러리를 먼저 간 후, 절물 자연 휴양림을 갈 예정이었고 그것이 동선에도 맞지만, 이것도 인연이라 조금 돌아가더라도 같이 가기로 했다. 


그러고 있는데 많은 게스트 하우스 친구들이 이 커피집으로 왔다. 모두들 아까 마시지 못한 커피가 아쉬워서 였을까.


<위에서 말한 커피집-이름은 잘 기억이 안남>




여기서 다시 짧은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됐다. 서로가 서로의 즐거운 여행을 기원했다. 난 같이 가기로 한 친구와 함께 길을 나섰다. 아! 그 친구도 이동 수단은 스쿠터였다. 둘이 앞뒤로 스쿠터를 타고 이동하니 어제 스쿠터를 혼자 타면서 왔던 불안감은 찾을 수 없었다. 정말 즐거운 스쿠터 드라이브였다. 하지만 절물은 높은 곳에 있었고, 멀리 있었다. 한참을 달려 절물 자연휴양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절 옆에 물이 나오는 곳이라 절물이라 이름한 이곳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가족단위의 사람들과 놀러온 유치원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입장권을 끊고 안내 판플릿을 받아 살펴보니 족욕을 하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 가기로 했다. 나무 숲길을 지나 연못을 잠시 본 후 족욕 하는 곳에 도착했다. 물은 매우 시원했지만, 깨끗하진 않았다. 아니 더럽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거기에 단체로 온 유치원생들이 그곳을 휘젓기 시작했다. 결국 10분 정도를 머문 후에 자리를 옮겼다. 이 자연 휴양림에는 곳곳에 평상이 놓여져 있었는데, 우린 그늘진 곳을 찾아 거기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비자림과 더불어 휴식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충분히 쉬고 약수를 가기로 했다. 제주도 먹는 물 1호로 지정되었다고 하는, 그리고 이곳의 이름이기도 한 '물'을 안 마시고 간다면 섭섭할 것 같다는 것에 생각이 일치했다. 그리고 이것은 좋은 선택이었음을 곳 알 수 있었다. 이곳의 물은 돈을 내고 사온 '삼다수'보다 훨씬 맛이 있었다. 이렇게 확연하게 '맹물'의 맛이 차이가 나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시원했다. 당연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물을 담아갔다. 우리도 사온 물을 모두 버리고 이곳의 물을 담았다. 시간은 12시가 넘었고 이제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절물 자연 휴양림의 바로 그 '절물'>



밥을 먹으러 갔다. 이곳에 오면서 봐 둔 음식점이 많은 동네로 갔는데, 그곳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린 곳으로 들어갔다. 칼국수 집이었고 '닭 칼국수'가 유명한 듯했다. 둘이 모두 닭 칼국수를 시켰다. 닭이 상당히 많이 들어있었고, 진한 국물도 좋았다. 칼국수가 줄어 들수록 헤어짐도 가까워 왔다. 난 아쉬운 만남을 조금 더 이어가기 위해 '밥을 내가 살테니 커피를 네가 사라'고 제안 했다. 그렇게 칼국수를 다 먹고, 주변에 조용한 커피집 가서 잠시 커피를 마시고 25살 화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인 이번 여행의 짧은 동반자와의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었다. 김영갑은 제주를 필름에 담은 사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지금도 그 원인과 치료 방법을 알 수 없는 '루게릭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그대로 남아 이곳에 전시되고 있다. 사진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래서 동선이 좀 꼬였어도 난 그곳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좀 멀게 느껴졌는데, 역시 혼자 길을 찾아가는 것이 힘들어 마음이 불안한 것이 더 그런 느낌을 강하게 한 듯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많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것을 이렇게 강렬하게 실감하게 해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두모악은 두 파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곳은 오름만 여러 각도 여려 시간에서 찍은 곳이었고, 다른 한 곳은 제주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곳이었다. 작게는 그의 작업실도 전시되어 있었다. 왜인지 몰라도 그 사진들을 보면서 비로서 무엇을 봐야한다거나, 어디를 가야한다는 압박이 사라졌다. 사진들은 제주의 모습을 정말 아름답고 있는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곳 무인 카페에 꼭 가보라는 후배의 당부도 있고 해서 무인 카페를 갔는데, 두 명이나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람이 몰리는 시기라고 해도 이려면 안되는 것이 아닌가!? 이곳에서 유일하게 실망했던 순간이었다. 이곳에서도 우연히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났던 친구들을 마주쳤다.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다. 또 짧은 만남과 헤어짐이 이어졌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입구>



다음 목적지는 두 번째 숙소가 있는 서귀포. 동쪽 끝에서 남쪽 한 가운데까지 가야하는 긴 여정이었다. 가방을 최대한 가볍게 하고, 헷멧을 단단히 조이고 스쿠터에 올랐다. 역시 내가 택한 길은 차가 적고 경치가 좋은 해안도로였다. 해안도로를 가면서 어제 저녁에 한 친구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전 해안도로가 이제 별로에요. 몇일 다니니 거기가 거기고 감흥이 사라졌어요. 길이 커브가 많아 운전하기만 힘들고..' 이 말의 의미를 그제에 좀 알 듯했다. 어디를 가도 아름다우니, 나중엔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았다. 꼬불꼬불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 경치가 좋으면 서서 사진 찍기를 반복했다. 그러니 시간은 계속 더뎌졌다. 그늘이 많이 드리운 곳에서는 지도를 펴 놓고 갈 곳을 정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한 곳은 이중섭 미술관! 옷도 몇 벌 안 가져갔기 때문에, 빨래를 해야해서 숙소를 일찍 가야했지만 이중섭 미술관은 왠지 꼭 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서귀포는 멀었고, 경치는 너무 좋았다. 난 계속해서 멈춰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멈춰 사진 찍은 것 중 한 곳>



이중섭 미술관은 서귀포 시내에 있었다. 이중섭은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 1년간 머물렀다고 한다. 단 일년을 머문 인연으로 서귀포시는 이곳에 이중섭 거리를 조성하고 이중섭 미술관을 만들었다. 이중섭 거리와 미술관이 위치한 곳은 이중섭이 머물던 집이 있는 곳이었다. 집은 복원되어 있었고 복원한 집을 거쳐 올라가면 이중섭 미술관이 나왔다. 


미술관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층은 이중섭의 작품들이, 2층은 이중섭을 기리는 사람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작품은 간단한 드로잉 등을 비롯하여 부인인 이남덕 여사가 이중섭에게 쓴 편지 등이 었다. 이중섭이 서양화가 이고 불행하게 인생을 마쳤다는 것 말고는 알지 못했다. 작품 중에는 황소 그림(?)을 유일하게 알았다. 다만 하는 일이 일인 관계로 한 사람의 작품을 어떤식으로 기억하고 추모하는 지 알고 싶었다. 최고의 미술관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일년 간의 인연으로 만든 박물관치고는 상당히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나중에 알고보니 이중섭은 이곳에서 꽤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했다고 한다). 박물관에서 바라보는 풍경 역시 나쁘지 않았다. 이곳에 왜 이중섭이 살았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복원된 이중섭 생가>


이중섭 미술관과 이중섭 거리의 관람이 끝나고, 난 게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바다 근처에 위치한 현 게스트 하우스는 바다와 가까웠지만 찾아가는 것인 쉽지 않았다. 조용한 시골마을에 위치하여서 골목골목 찾아가야 했다. 한참을 헤멘 후에에 찾아갈 수 있었다.


첫날 소낭과 달리 현은 작은 규모의 게스트 하우스였다. 남녀 방에 각각 3개씩의 2층 침대가 있는 듯했다(여자방은 알 수 없으니..). 각 방마다 샤워실과 화장실이 딸려있는 깔끔한 게스트 하우스였다. 도착해서 짐을 풀고 빨래를 부탁했다. 쉬고 있는데, 스텝 한 분이 와서 저녁에 바닷가 용천수 나오는 곳이 있는데 그곳으로 수영을 한다고 했다. 난 일단 가야 이곳 사람들과 친해질 것 같아서 수영을 잘 못함에도 가겠다고 했다. 조금 더 쉬고 있자니 한 게스트가 맥주를 사왔다. 그제야 맥주를 따로 사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도 먹어야 했기에 식당과 편의점 위치를 물어 밖으로 나갔다. 


식당에선 '뚝배기'를 시켰다. 해물 뚝배기인 듯했는데 오분자기가 5개나 들어있는 푸짐한 것이었다. 맛있게 먹고 500미리 캔 맥주를 세 개나 사서 숙소로 들어갔다. 맥주를 냉장고에 넣고 있는데, 또 사람들이 왔다. 이번엔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와서 씻고 잠시 쉬었다. 마침내 바다를 나가자고 했다. 


바다에 나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물은 깊었고 파도는 거샜다. 원래 수영도 잘 못하는 나는 안경을 잃어버릴까 겁이 났고, 결국 수영은 못하고 바닷물에 물을 담그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까지 물에 몸을 담궈봤다. 동네 아이들에겐 이날이 축제였다. 마침 보름이라 물이 많이 찼고, 아이들은 정신없이 다이빙을 했다. 같이 갔던 사람들 중 스텝2, 남녀 게스트 각1명씩만 물에서 수영을 했다. 


수영하는 곳 옆에는 조명이 밝게 비추고 있었고, 마을 어른들은 그곳에서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스텝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곳은 모기가 없어 사람들이 자주 나와 고기를 구워 먹는 곳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역시 술이 들어가니 각자의 이야기들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여자 게스트 1명은 혼자 왔고, 휴가차 왔다고 했다. 남자 게스트 가운데 자전거를 탄 둘은 천안에 살며 예전에 자전거로 제주를 완주한 기억이 있어, 이번에도 자전거를 타고 왔다고 했다. 하지만 서른이 된 지금은 전과 같지 않다고 했다. 나머지 남자 게스트 둘과 나도 각자의 이야기를 했다. 술도 떨어지고 11시 30분쯤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왔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현 게스트 하우스>



21일(셋째 날).

아침이 밝았다. 오랫만에 푹 잤다는 기분이 들었다. 몸이 피곤해서였는지, 어제 마신 술 때문인지, 그나마라도 바닷물에 몸을 담궈서 인지, 아님 위의 이유들이 복합되서 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아침은 토스트였다. 달걀 프라이도 해먹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일을 분담하여 간단한 아침상을 차렸다. 아침을 먹고나니 역시나 헤어질 시간이다. 만남과 헤어짐이 공존하는 곳이 게스트하우스임을 새삼 다시 느낀다. 오늘은 내가 가장 먼저 나왔다. 역시 '먼저 갑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라는 말과 함께. 자전거 타던 친구들 중 한 명이 '비가 오면 저희를 생각해 주세요'라고 답했다. 난 '너무 더워도 생각해 줄께요'라고 답했다. 유쾌한 이별이었다. 


중문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그곳 강정마을을 들렸다. 계획 없는 즐거운 여행이었지만 이곳 강정만은 계획하고 왔고, 즐거운 마음으로 볼 수도 없었다. 제주 남부의 평화로운 마을을 누가 그리 찢어 놓았는가? 국가의 이익이 개인의 행복보다 우선할 수 있는가? 도대체 제주의 역사를 얼마나 알고, 그 역사를 거쳐 온 사람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하긴 하였는가? 이런 물음들이 계속해서 머리 속을 맴돌았다. 


제주는 아름다운 섬으로 널리 홍보되고 실제로 너무 아름다워 많은 관관객들이 오는 섬이다. 하지만 그 역사는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본토를 사수한다는 명목 하에 제주도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100군데가 넘는 오름에 지하 땅굴을 파게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죽고 고통당했다. 해방이 되었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념투쟁의 불똥은 평범한 제주도민에게 옮겨 붙었고, 타올랐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남편이 없으면 아내를 대신 죽이기도 했고, 70노인과 7살 어린이도 빨갱이라는 명목으로 살해당했다. 최소 2~3만명 이상의 주민이 이렇게 죽었다. 당시 제주도의 인구가 30만 정도였다고 하니 10% 가까운 사람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런 섬에 또 전쟁을 대비한 해군기지라니.. 전략적 요충지라는 미명하에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남의 일',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이유가 얼마나 무관심하고 잔인한 말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강정마을 공사 현장 앞에 걸린 각종 현수막>



다음으로 간 곳은 아프리카 박물관이었다. 이곳은 사진가 김중만의 작품이 많이 전시된 것과, 젠네 대사원을 본따 만든 특이한 외형으로 유명한 곳 이다. 갈까 말까 망설였는데, 지난 밤 어떤 블로그의 글을 읽고 마음을 먹고 갔다. 그 블로그는 1층은 조금 실망스럽지만 2, 3층은 꽤나 볼만하고, 하루에 세 번 있는 공연은 입장료가 아깝지 않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아프카의 동물들을 '인형'으로 재현해 놓은 1층과 지하1층은 실망스럽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각종 가면과 조각을 모와 둔, 그리고 아프리카의 역사를 설명해 놓고, 김중만의 사진이 있는 2층과 3층은 꽤나 진지하게 둘러볼 만하다. 


인상 깊은 것은 가면이었다. 아프리카의 가면문화는 상당히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듯했는데, 단순히 가면만 전시되어 있지 않고, 가면을 쓴 사람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의 사진은 공포, 몽환, 권위 등이 잘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공연이다. 11시30분, 14시30분, 17시30분 하루 세 번에 걸쳐 한다는 공연(목요일은 쉰다고 한다)은 세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세네갈 공연팀에 의해 약 30분 간 이어진다. 신나는 아프리카의 민속 리듬을 즐길 수 있는 이 공연은 관객도 같이 작은 악기로 연주에 참여 할 수 있기도 하다. 아프리카 박물관의 입장료는 8,000원으로 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공연 하나 만으로도 아깝지 않았다. 혹 아프리카 박물관을 갈 기회가 된다면 공연은 꼭 보기를 추천한다. 


아프리카 박물관을 나와 중문 해변까지는 금방이었다. 5분 정도? 중문은 제주의 가장 유명한 관광단지 답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만 파도가 제법 높아 오전에는 바다에 들어 갈 수 없었던 것 같고, 오후가 되어도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처음으로 파도에 발 좀 담가보려고 해수욕장을 갔는데, 해수욕장을 혼자 서성이는 사람이 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좀 많이 쓸쓸해 졌다.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못할 것 중 하나가 '해수욕장 가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 관광지 답게 중국 단체 관광객이 많았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역시 중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서핑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파도가 평소에도 높은 곳이라 서핑이 가능한 듯 했다. 한국 사람들은 물론, 많은 외국인도 서핑을 즐기러 왔다. 서핑은 해수욕장에서 약 200~300m 떨어진 바다에서 이뤄졌는데, 제법 그럴 듯한 파도가 오기도 하고, 그것을 그럴듯하게 타는 사람도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무더운 날씨에 바다도 못들어가고 혼자 바닷가의 풍광을 즐기는 것인 역시나 한계가 있었다. 결국 45분정도 머물다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다음 목적지는 삼방산 근처의 용머리 해안이었다. 


용머리 해안과 삼방산은 어제 저녁 게스트 하우스에서 추천 받은 곳이었다. 준비 없이 급히 혼자 떠나온 여행자에게 게스트 하우스는 친구도 만들어주고, 여행정보도 알려주는 고마운 곳이다. 삼방산과 용머리 해안은 추천을 해줄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한 곳이었다. 남해로 탁트인 바다. 용의 머리모양으로 바다로 뻗은 해안.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제주도의 육지 풍경까지. 그 어느 한 곳 허투로 볼 수 있는 경치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택시를 한 대 빌려 관광을 하는 한 커플을 봤는데, 택시 기사님이 가이드도 겸하는 것 같았다. 만약 부모님과 같은 어른들만 효도 여행을 보내드린다면, 택시 여행은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머리 해안에서 바라본 경치>





용머리해안은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밖에서 계속 경치를 감상하기엔 너무 무더운 날씨였다. 나는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 협제 쪽으로 향했다. 협제 해변은 제주도를 왔을 때 느꼈던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 한 곳이었다. 그래서 물놀이 할 생각에 그 근처에 이틀이나 숙소를 잡았던 것이다(물 놀이가 얼마나 허망한 생각이었던 지는 뒤에). 아무튼 그렇게 길을 떠나는데, 협제로 향하는 해변도로의 경치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길을 가다보니 도로변에 마을 쉼터라고 되어 있는 곳이 있었는데, 가보니 경치가 좋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늘도 지고, 바람도 불고, 돗자리도 깔려있었다. 오토바이를 세우고 그곳에 누워 약 30분 정도 잤던 것 같다. '근래 가장 달콤한 30분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꿀맛같은 시간이었다.


<위에서 말한 마을 휴게소, 그리고 그곳에서 바라본 삼방산>





꿀맛 같은 휴식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햇살이 너무 강했다. 반바지와 반소매 옷을 입었는데, 팔이야 어차피 자주 노출되는 곳이라 좀 타도 아프지 않았지만, 다리는 그야 말로 쓰라렸다. 참다 못해 가다 보이는 마트에 서서 토시를 구입했는데, 정작 필요한 긴 바지는 구하지 못했다. 결국 임시 방편으로 햇살에 직접 노출된 왼쪽 다리에 수건을 묶고 스쿠터를 탔다. 그래도, 그래도 너무 더운 날씨였다. '운전을 잘 못해도 차를 빌릴껄'이라는 생각이 나를 태우고 가는 스쿠터에게는 미안했지만 처음 들었다. 그만큼 더웠다. 


그렇게 가는 동안 무인카페가 보였다. 김영갑 갤러리에 종업원이 있는 '무인카페'가 떠올라 그냥 지나갈까 했지만, 너무 더운 날씨와 왠지 모를 기대감에 카페에 들렸다. 카페에는 주인이 계셨다. '아.. 역시 무인 카페는 없는건가?'가 라고 생각할 찰라, 주인은 그냥 정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자리를 잡고 헬멧을 벋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주변을 둘려봤다. 아이스커피를 냉장고에서 꺼내 한잔 마시고 나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이때 한 명이 더 들어왔다. 20대 초 중반으로 추정되는 자전거 여행자였다. 먼저 인사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받아준다. '안녕하세요?' 그 사람은 제주도 온 첫날이고 자전거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헐.. 제주 공항에서 여기까지는 짧은 거리가 아닌데..' 많은 자전거 여행객이 그렇듯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다고 했다. 많이 힘들어 보였지만, 아직도 힘이 남은, 결기에 찬 얼굴이었다. 먼저 인사를 건네고 2,000원을 모금함(?)에 넣고 길을 나섰다. '좋은 여행 하세요~'. 그도 인사를 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또 이렇게 짧은 만남과 헤어짐이 이뤄졌다.


<위의 무인 카페. 자전거 여행자가 타고온 자전거가 눈에 보인다>



길을 나서서 계속 협제로 가는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는 참 아름다운 곳이다.'라는.. 사진을 찍을지 말지 고민할 정도로 계속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졌는데, 마침 해안을 배경으로 서 있는 말이 보였다. '제주에 와서 말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정도는 남겨야지'라는 생각에 스쿠터를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인물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이란 말이 있다. 제주에서 그냥 아무렇게나 찍어도 사진이 잘 나오는 것은 풍경 때문일 것이다.


<길가다 아무렇게나 멈춰 찍은 제주의 풍경, 밑에는 위에서 말한 말과 바다를 배경으로 한 사진>




이렇게 제주의 풍경을 맘것 즐기며 스쿠터를 운전하다보니 어느덧 협제 해안에 도착했다. 시간은 4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제주 어느 해변보다 사람이 많은 곳 같았다. 몸매를 뽑내는 남녀, 단체로 놀러와 게임을 하는 사람들, 처음 바다를 보는 듯한 아기를 데리고 온 가족, 그리고 혼자 온 나 같은 사람까지. 협제는 사람으로 붐볐다.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혼자 해수욕이라니.. 얼마나 멍청한 생각인가..'라고. 일단 혼자 할 만한게 없었다. 튜브를 타고 파도 타기 하기도, 그렇다고 혼자 수영을 하기도 어색했다. 생각해보니 둘다 혼자 즐길 만큼 내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짐을 맞겨 놓을 만한 곳이 없었다. 내가 못찾았을 수는 있지만 사물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고, 그냥 해변에 놓고 바다에 들어가자니 영 불안했다. 결국 '오늘 게스트 하우스 사람들과 친해져, 내일 다시 오겠다'라는 뭔가 스스로도 불가능하다는 다짐만을 마음에 품고 게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내가 이틀을 묵게 된 게스트 하우스는 '올레코지 게스트 하우스'였다. 부부가 운영하는 이 게스트 하우스는 인터넷 업체에 숙박권을 싸게 팔아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 같았다. 도착해서 짐을 풀고 일단 씻었다. 씻고 빨래를 하고 저녁을 먹으려고 주인을 찾았는데, 근처에 식당이 없다는 이야기와, 빨래 하는데 1000원을 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따로 저녁을 팔지도 않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게스트 하우스에서 빨래하는데 돈을 낸 적이 없고, 싸게 온 사람들과 다르게 나는 돈 다 내고 왔는데 조금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암튼 빨래를 부탁하고 주인에게 식당을 물어봤더니 한림항으로 가야한다는 말을 들었다.(다만 주인 부부는 너무 친절했다)


<올레코지게스트 하우스>




씻고 오토바이를 타고 한림항으로 향했다. 한림항 쪽에는 많은 식당이 있었다.뭘 좀 먹으려 했는데 딱히 먹을 만한 것이 없었고, 마음 먹고 간 식당에선 1인분으로 먹을만한 것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옆에 식당에서 옥돔구이정식을 먹었다. 조림 등의 음식은 대부분 2인분 기준으로 되어 있는데, 별로 합리적이지 않을 것 같다. 뭐 좀 '오버' 같을 수도 있지만 한국에서 아직 혼자 오는 여행객은 극소수인데, 이런 식당들의 2인분 기준 음식 판매 사례도 한국이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나라임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마저 들었다. 


밥을 먹을 때 즈음에 한림항에는 눈부신 석양이 지고 있었다. 일출이 은은한 빛으로 어둠을 밝히며 떠오른다면, 일몰은 눈부시게 마지막 빛으로 세상을 물들며 사라진다. 게스트 하우스에서의 섭섭함도, 식당에서의 서운함도 일몰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


<섭섭함을 모두 잊게해 준 한림항의 일몰>



숙소로 돌아오니 20살 쌍둥이 청년들이 게스트 하우스에 와 있었다. '아는 누나들'과 2박 3일을 짧은 여행을 왔다고 했다. 조금 있다가 음식점을 하는 동갑내기 사업가도 게스트 하우스에 왔다. 나는 그 동갑내기 사업가와 같이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사장님도 합석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친구는 한라산을 다녀왔다고 했는데, 사장님의 말을 빌리면 가장 힘든 코스(관음사로 올라가 성판악으로 내려오는)로 갔다고 했다. 바쁜 일상 살아오며 문득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라는 생각에 제주도에 왔다는 그 친구는 쾌활하고 거침 없는 성격이었다.


20살 쌍둥이 청년 일행과, 또 다른 새로운 팀도 옆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여느 게스트 하우스와 달리 합석을 하거나 같이 마시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새로운 팀은 내일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야했고, 다른 한팀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재미보다는, 자신들끼리 노는 즐거움이 더 큰 것 같았다. 나는 사장님께 그 자리에서 '노꼬메 오름'이라는 곳과 곽지해수욕장의 용천수 탕을 추천 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22일(넷째 날).

아침이 됐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제공하는 토스트와 커피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어제 추천받은 노꼬메 오름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멀었다. 제주는 한라산 때문이라도 중심부로 갈 수록 높아지는데, 노꼬메 오름은 해변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스쿠터가 힘들어했다. 그만큼 시간도 오래 걸렸다. 가는 도중 갑자기 비가 엄청나게 내렸는데, 위험하기도 하고, 비에 맞아 좋을 것도 없어 잠시 아무도 없는 버스정류장에 스쿠터를 세우고 비를 피했다. 내리는 비를 그렇게 넋 놓고 구경한 것도 오랫만이었다. 


비가 그치고 곧 노꼬메 오름에 도착했다. 주자장도 횡하고, 안내판도 보이지 않았다. 오름을 오르려는 연인이 보였고, 오름도 보였는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아 보였다. '아.. 내가 물도 없구나..' 그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오는 동안 편의점도 못본 상황이었다. 돌아가기도 그렇고 오름을 포기하기도 어려웠다. 오름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안내판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50m 정로 헛걸음을 했다. 


제대로된 시작점을 향하는데 그 시작점이 말 목장 안 이었다. 길은 온통 말 똥으로 뒤덥혀 있어서 그 똥을 피해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사람이 지나가는 길은 말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저쪽에서 푸른 벌판을 뛰어오는 말도 있었다. 실제로 말을 보면 상당히 커서 위압감을 느끼게 되는데,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 저 말을 어떻게 피해가나..'이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 다행이 말들은 사람이 다가 오자 귀찮은 듯 길에서만 살짝 비켜줬다. 목장 지역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말과 말똥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문득 뒤에 오는 연인들에게, 이 오름은 로맨틱한 데이트 코스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름지역에 접어서자 노루로 추정되는 동물이 팔짝 뛰어 숲으로 사라졌다. 오름은 완만하게 시작됐는데, 등산로는 고무로 깔려있어 상당히 편하게 올랐다(하지만 내려올 때는 고생을..). 그렇게 완만하게 오르기를 25분 평상이 나타났다. 아까 온 비로 젖어 있는 평상은 등산객의 휴식을 위해 있는 것이 분명했는데, 완만하게 올라온 나는 이 평상의 존재 이유에 의구심을 갖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쉬지 않고 오름을 올랐는데, 오른지 5분만에 평상의 존재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경사가 급해지기 시작했고, 고무바닥을 대신해 높은 곳을 오를 때 유용한 나무 혹은 돌로 된 계단이 나타났다. 총 2.32Km의 등산로 가운데 1.3km정도를 25분만에 올랐지만 나머지 1km를 오르는데 무려 40분이 넘게 소요됐다. 다만 귀죽은 듯 조용한, 사람도 다니지 않는 등산로의 침묵은 힘든 나를 재촉했다. 갈증도 심해졌다. 물 한모금이 간절했다. 정상에 거의 다 왔을 때, 처음으로 내려오는 등산객을 만났다. 너무 목이 말라 '실례지만 물이 있으면 조금 얻어 먹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보니, '난 내려가는 길이니 필요없어요'하면서 반통 남은 삼다수를 주셨다.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하고 물을 받아 마셨다.


<노꼬메오름 등산로, 등산 중 본 엄청큰 달팽이, 그리고 등산 안내지 표지판>

 


그렇게 간신히 정상에 오른 노꼬메오름의 정상 경치는 장관이었다. 보통 내가 산에 오르며 느끼는 감정은 이렇다. 


오르기전     : 산은 좋은 곳이고 오르면 상쾌하다. 산에 가야겠다. 

오르기시작  : 역시 산은 좋은 곳이야. 공기도 좋고. 

오르면서     : 내가 산에 왜 왔지? 내려갈까? 아니야 그래도 여까지 온거.. 이번에 내려가면 다시는 안 온다.

정상에서     : 좋은 경치에 오르면서 느낀 감정을 모두 다 잊음.


위의 과정은 이번에도 반복됐다. 오름 정상에서 본 풍경에 오르며 느낀 힘든 감정은 내가 붕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졌고, 풍경에 푹 빠져서 연신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한 10분쯤 쉬었을까? 20여분을 더 쉴 계획이었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와서 아까부터 일정에 차질이 생겼지만, 내가 온 이 시기는 제주가 90년 만에 가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비를 원망할 수 없었다. 정상에는 나무 한그루 없어 비를 피할 곳도 없었고, 결국 15분만에 내려갈 결심을 했다. 힘들게 오른 이곳에서 15분만 머물고 내려가려니 마음이 아팠지만, 비를 쫄딱 맞고 있을 수도 없었다. 막 내려가려는데, 아까 시작 지점에서 만난 연인이 막 정상 진입지점(내 마음데로 만든 말인데, 나무가 없어지는 지점을 의미)에 들어서고 있었다. 남자가 우산을 가방에 꽂고 오른 이 커플은 비가 와도 우산 아래 비를 피할 수 있었으니 걱정은 접어두고 가기로 했다. 내려 오는 내내 고무를 고정해 놓은 쇠 말뚝에 미끌어져서 꽤 고생을 했지만, 역시 내려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30분 만에 내려올 수 있었다.


<노꼬메 오름 정상에서의 풍경, 첫 번째 사진은 위에서 말한 '정상진입점'>

※ 다시 한번 이야기 하지만 모든 사진은 클릭하면 확대해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진은 아이폰5







산을 다 내려오니 비가 거새졌다. 숲 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다. 비는 세차게 내렸고 정상에서 못보낸 20분을 산 밑에서 비를 피하며 보냈다. 내려오며 동네 구멍가게에 들려 시원한 물을 사서 원샷을 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다시 협재였다. 그 사이 잠시 쉬기 위해 게스트 하우스를 들렸는데, 주인 부부가 다른 곳에 가야해서 게스트 하우스에서 쉴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다시 스쿠터를 타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돈까스 정식이었는데 정말 배부르게 먹고 곽지 해수욕장 용천수탕(!?)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민물로 잠시 샤워를 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아저씨에 따르면 이곳 용천수는 엄청 시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했는데, 과연 시원하다 못해 얼음물 같이 난 물이 나왔다. 들어가 보니 관광객은 없고 동네 주민들과 아이들 차지였다. 간단히 몸을 씻고 나가려하니 다시 비가 왔다. 비를 잠시 피하고 협재로 향했다.


<곽지해수욕장에있는 용천수 나오는 노천탕?>



협제에는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도 어제만큼 사람이 있었다. 오늘은 혼자라도 들어가 볼까 생각을 하고 아예 수영복 바지를 입고 왔다(아까 곽지 해수욕장에서). 그런데 다 준비하고 물에 들어가볼까 생각을 해보니 왠지 스쿠터 열쇠를  조끼에 넣고 스쿠터 문을 닫은 것 같아다. 멘탈 붕괴가 왔다. 가방을 아무리 찾아도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사태를 수습하려 스쿠터로 갔는데, 다행이(?) 열쇠는 키박스에 꽂혀있었다. 열쇠를 챙기고 다시 물에 들어가려니 열쇠를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깨닭았다. 가방에 두자니, 가방을 잃어버림 끝이었고, 몸에 지니자니 지퍼가 없는 수영복이라 열쇠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결국 해수욕 따위 포기했다. 그리고 급히 새로운 여행 장소를 물색해봤다. 그래서 찾은 곳이 '평화박물관'이었다. 


'전쟁역사평화박물관' 이름부터 마음에 들었다. 해안에서 따지면 노꼬메 오름 정도의 위치와 거리에 있었다. 1시간 가까이 스쿠터를 타고 이동했다. 가면서 비가 오면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 하면서 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박물관은 조금 외졌다 생각할 정도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제주도민들을 징발해서 100여개가 넘는 오름에 땅굴을 팠는데, 가마오름름 땅굴이 그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평화 박물관은 바로 그 가마오름에 위치하고 있었다. 원래는 그 땅굴 견학이 박물관 탐방에 포함되는데, 문화재청에서 하는 수리 관계로 땅굴을 볼 수 없다고 했고, 대신 6000원인 입장료를 3000원으로 깎아주었다. 


박물관 관람은 영상을 보는 것부터 시작된다. 박물관이 생긴 연혁을 설명하는 영상이었다. 혼자간 나를 위해 큰 상영관에 나만을 위해 영상을 틀어줬다. 앞 팀이 볼 때 같이 볼 수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봐야 한다며 그렇게 해주었다. 이 박물관은 제주에서 사업해 성공한 사람의 집념으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 때 바로 이 가마오름을 파기위해 동원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한을 가슴에 품고 사업을 해 돈을 벌었고, 번 돈을 이곳 박물관 건립에 쏟아부었다. 박물관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사실 박물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 이 박물관의 전시 형태 같은 것은 아쉬운 점이 많았다. 조금만 더 세련되게 꾸몄으면, 하는 바람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곳 직원들의 태도에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영상을 다 보고 난 나를 위해 전시관을 안내해주고, 전시관을 다 보고 나오자, 오름의 땅굴들을 혼자 온 나를 위해 따라다니면서 안내해줬다. 비록 땅굴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그 직원의 친절한 안내는 정말 잊을 수 없다. 그 직원의 친절한 안내로 땅굴 견학을 마치고(밖에서), 오름 정상까지 올라갔다. 가마 오름은 높지 않지만 정상에서는 주변이 모두 다 보이는 소위 '감재고지'라고 한다. 특히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들이 통과하는 길목이라고도 한다. 실제 가마오름 정상에서는 일제가 건설한 '알뜨르 비행장'이 환하게 보였다. 


비록 아쉬운점이 없진 않았지만, 한 사람의 집념이 맺은 결실이라는 점., 직원들의 친절함은 잊을 수 없을 듯하다. 특히 '전쟁을 기념'하는 공간을 서울 한 복판에 만드는 나라에서 개인이 만든 박물관에서 '평화'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 아날까? 혹 여유가 있으면 한번 가보라고 추천도 하고 싶다. 


<전쟁역사평화박물관-정문>



전쟁역사평화박물관 관람을 마치니 5시가 넘었다. 다시 스쿠터를 타고 한참을 달려 협제 해변에 도착했다. 해수욕이 목적이 아니라 저녁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복죽을 먹었다. 다시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하니 새로운 손님들이 있었다. 39살 먹은 여행객으로 이 둘은 친구였다. 이분들은 게스트 하우스에서 바베큐를 해먹을 작정으로 흑돼지, 갑(각?)새우, 전복, 조개, 고등어회 갈치회 등 다양한 음식을 사왔다. 마침 나에게도 같이 먹자고 했는데, 혼자 먹을 수 없던 회와 '구운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합석했다. 여행지라는 공간과 휴가라는 시간에 술이 더해지자 금방 친해졌고, 이 두분과 나는 금방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한 분은 사업을 크게 하는 사업가였고, 다른 한분은 새로 사업을 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새로 사업을 하는 친구를 위해 도움을 주기 위해, 그리고 그 친구가 새 사업을 시작하기 전 잠시 휴식을 갖기 위해 이 둘은 제주에 왔다고 했다. 게스트 하우스의 다른 손님, 지나가는 다른 민박집의 손님들이 이 술자리에 합석하면서 술자리는 무르익었다. 하지만 모처럼 무르익은 술자리는 갑작스레 내린 비로 마무리 되었다. 약간의 아쉬움은 서울에서 다시 만나 풀기로 했다. 이런 술자리는 어쩌면 이렇게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고 끝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지도 모른다.



23일(다섯째 날:마지막 날).

마지막날이 밝았다. 어제 먹다 남은 음식들(전복, 새우, 고기)을 넣고 형님들이 라면을 끓여줬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제공하는 토스트도 아침으로 나쁘지 않았지만, 이런 호화판 라면에 비교할 수 없었다. 거기다 술 마신 다음날이니! 그렇게 라면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짐을 챙겼다. 형님들은 서울에서 꼭 연락하자는 약속을 하고 먼저 떠났다. 나도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다. 제주시내로 가야했다. 


제주시내로 가는 길은 큰 도로를 타고 가야했다. 목표는 '넥슨 컴퓨터 박물관' 이곳은 세계에 몇 대 남지 않은 애플1 컴퓨터가 전시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트럭과 쌩쌩 달리는 차들이 다니는 큰 도로를 무사히 거쳐서 박물관에 도착했다. 10부터 개관이었는데, 난 개관하자마자 들어갔다. 입장료 8000원은 약간 부담되었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다. 1층은 컴퓨터의 역사를 전시한 곳이었다. 애플1부터 지금까지의 컴퓨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볼거리도 많았다. 지하 1층은 아케이드게임,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락실 게임을 맘것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것도 무료로!! 


난 게임을 못한다. 초등학교(내가 다닐 땐 국민학교) 시절, 나는 용돈을 따로 받지 않았다. 등교할 때 어머니에게 딱 차비만 받았다. 필요할 때는 준비물 살 돈 정도를 받았지만, 군것질 할 돈은 전혀 주시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 당시 버스비는 60원이었는데, 어머니는 나에게 50원짜리 두 개, 10원짜리 두 개를 손에 꼭 쥐어주곤 했다. 하루는 친구들 다 하는 뽑기가 하고 싶어 50원으로 뽑기를 하고 집까지 걸어간 적이 있는데, 평소보다 늦게 온 나를 추궁했고, 엄청나게 혼났던 기억이 있다. 이런 나에게 오락실은 꿈 같은 공간이었다. 중학교 들어오며 준비물 살 돈을 부풀려 용돈 마련하는 요령을 배웠지만 원채 운동신경도 없어 결국 오락실은 나에게 돈 버리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나에게 오락실은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런 나에게 돈 버리지 않고 오락을 할 수 있는 이곳은 정말 환상의 공간이었다. 


2층과 3층 역시 오락과 체험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다. 2층은 게임의 역사가 전시되었는데 초창기 게임부터 현재 동작인식 게임까지 다양한 게임이 전시되어 있었고, 그중 대부분은 체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3층은 기초적인 로봇과 3D프린터 등이 있어 간단한 체험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즐겁게 시간을 보낸 후 드디어 4박 5일 동안 나를 태우고 다닌 스쿠터를 반납하러 갔다.


<넥슨 컴퓨터 박물관 입장권>



스쿠터를 반납하러 가는 길은 험난했다. 비록 큰 차들이 다녀도 한적한 도로를 다닐 때는 그닥 위험하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차가 많은 시내는 길도 복잡하고, 차도 많은데다 초행길이어서 운전이 힘들었다. 심지어 스쿠터는 네비게이션을 보면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소소하게 교통흐름을 방해한 이후에 스쿠터를 반납할 수 있었다. 처음 스쿠터를 빌려갈 때 걱정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대여점 사장님은, 내가 무사히 돌아오자 뭔가 안도의 눈빛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거기서 스쿠터에 있던 짐을 가방에 넣고 공항으로 향했다. 버스를 15분 이상 기다려야 했는데, 가방도 무겁고 더워서 결국 택시를 탔다.


14시 10분 비행기였는데 공항에는 12시가 조금 넘어 도착했다. 직장 상사가 제주도 갔으니 사오라고 한 감귤 초콜릿과 어머니께 선물할 물건을 사기 위해 조금 일찍 갔다. 가서 먼저 초콜릿을 사고 어머니 선물을 골랐다. 남들 다 좋다고 하는 홍삼진액을 샀다. 그리고 느긋하게 비행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가서 보니 내가 타기로 한 비행기가 김포에서 벼락을 맞았단다. 이상은 없지만 규정상 전자계통을 전부 검사해야 한다고 했다. 그 비행기 대신 인천에서 대기 중인 비행기를 김포로 보내 승무원을 태우고 제주로 와야 한다 했는데, 그 시간이 약 18시라고 했다. 황당하고 화가 났다. 다음날 장 내시경을 받기로 예약을 했는데, 도착시간이 늦어지면 제시간에 약을 먹을 수 없었고, 검사를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화를 내고 있었는데, 항공사는 별 방법이 없는 듯했다. 결국 내시경을 취소하고 5000원짜리 식권을 받고 더이상 문제삼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보니 몇 년 전 동기들과 제주도 엠티를 갔을 때도 강풍으로 하루 비행기가 연기된 적이 있었다. 제주도는 내가 떠나는 것이 싫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첫 날 만난 후배에게 사정을 문자로 보냈다. 후배에게 바로 전화가 왔다. 잠깐 보자고. 시간도 남았고 그러겠다고 했다. 후배는 나에게 먹고 싶은 것을 물어봤다. 딱히 먹고 싶은 것은 없었지만 몸국과 물회를 못먹어 봤다고 하니, 택시타고 올 곳을 알려줬다. 30분 정로를 가서 후배를 만났다. 


오랫만에 둘이 소주를 한잔했다. 몸국에, 전복물회에 한라산 소주. 유쾌하고 즐거운 술자리였다. 화나고 예고치 않은 연착이었지만 뜻밖에 술자리와 오랫만에 유쾌한 만남을 가져다 주었다. 인생에 꼭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 


비행기에서 잠이 들었다. 아까 마신 소주의 영향이었는지 30분을 푹 잔 것 같다. 김포에 도착할 때가 되어가니 창 밖으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내 휴가가 끝나는 것을 상징하는 것과 같은 일몰이었다. 전자제품 사용금지 신호가 나오기 전에 얼른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김포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찍은 석양>



이제 모든 여행의 최종 목적지 집으로 가는 여정이 남았다. 김포에서 2시간은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갈아타고,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반겨주는 어머니 얼굴을 보니 휴가가 끝났다는 허탈함과, 집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벌써 지난 여행이 꿈 같이 느껴졌다. 전화가 왔다. 마지막 밤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형이었다. '네가 없으니 심심해'라고 말하며.. 남는 것 없는 여행이 아니었음을 느꼈다. 돌이켜보니 한달은 쉬고 온 느낌이었다. 왜 직장인에게 휴가가 필요한가를 새삼 느껴지는 나의 혼자가는 첫 제주 스쿠터 여행이었다. 



에필로그

여행이 끝나고 몇일이 지났다.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정신 없이 살고 있는데, 카톡이 왔다. '현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났던 사람인데요..' 반가운 마음에 연락을 주고 받았다. 서울에서 한 번 만나자고 제안을 했고, 나도 흔쾌히 동의했다. 마지막날 만났던 형들과는 계속 연락 중이다. 비록 집으로 돌아왔지만 여행은 많은 것을 남겼다. 



---------------------------------

기본 비용

왕복 항공료 : 177,000원

숙박비 : 4박*20,000원 = 80,000원+소낭 게스트 하우스 바비큐 : 12,000원

스쿠터 : 5일*30,000원=150,000원,  보험료 : 7,500원*5=37,500원 = 총 185,000원

주유비 : 17,000원

아프리카 박물관 : 8,000원

넥슨컴퓨터박물관 : 8,000원

절물자연휴양림 : 1,000원

김영갑갤러리두모악: : 3,000원

평화박물관 : 3,000원(원래는 6,000원)


총 : 492,000원(밥 값, 차 값은 포함하지 않았음)

Posted by beatles for sal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