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부모님은 조그만 구멍가게와 식당을 같이 했다. 말이 같이 한 것이지, 그냥 같은 공간에서 과자와 음료를 팔고, 식당도 하고 그랬다. 물론 사는 집도 붙어 있었다. 방은 하나 혹은 두 개 뿐이었다. 아직 가난이 가난인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파는 음식도 다양했다. 붕장어(아나고), 산낙지, 족발, 심지어 개고기까지 어머니가 해보지 않은 음식은 없었다. 기본적인 안주도 물론 다했다. 물론 점심과 저녁에 밥을 주변 공장이나 공사현장에 납품하는 것이 컸지만, 밤에 소주 한잔 하려고 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우리집이 있던 곳은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 서울 강동구와 경계인 곳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아직 소규모 제조업이 살아 있던 시절이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젊은 공장 노동자들과 동네 아저씨들이 주로 손님이었다. 그들은 몇몇이서 오기도 했고, 혼자 오기도 했다. 결혼을 한 사람도 있었고, 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혼자 온 사람들은 주로 ‘누님’ 혹은 ‘누나’로 부르는 우리 어머니와 대화를 했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하기도 했다. 그들은 어머니가 바쁘면 그냥 혼자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다 취하면 ‘누님’ 혹은 ‘누나’인 우리 어머니에게 혼이 났다. 보통은 그냥 싫은 소리 몇 마디 듣는 것이었지만, 가끔은 정말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호되게 야단을 치기도 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그리 혼나고도 또 오는 그들이었다. 어린 나에게 자기돈 내고 욕먹어가며 다시 찾아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늘 문득 이유 없이 그때가 생각났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누나에게 혼나고 싶어 왔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지에서 서울로 올라와 기댈 곳 없는 낮선 곳에서 이야기 들어주고, 주정하면 혼내는 어머니는 그들에게 정말 누나 같은 그리운 존재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술을 마시던 그들은 지금의 나보다 대부분 어리거나 내 또래 정도였다. 지금은 가난을 알아 그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단호히 거부하겠지만, 문득 그 시절 작은 구멍가게와 함께 있던 식당 풍경이 떠오른다.
덧. 어머니가 이것을 어떻게 기억할지는 알지 못한다. 이것은 그냥 나의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