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차 : 강릉-속초
1.
어제 장을 봐온 음식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강문 해변으로 갔다. 어제보다 파도는 더 강해져 있었다. 아침부터 사람들은 부지런하게 해변으로 왔다. 나만 바다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묘한 동질감은 안도감으로 변했다. 우리는 K의 지휘아래 연신 사진을 찍었다. 이런, 저런 포즈를 남들이 보든 말든 취해가며 찍는 모습에서 약간은 어린 시절의 모습이 지나갔다. 20대에 만난 우리 일행은, 같이 여행을 옴으로서 20대의 어느 자락으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강문과 안목 해변을 지나 우리는 속초로 향했다. 가는 길에 본 하늘에는 무지개 같은 해무리가 태양을 감싸고 있었다. 곧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즐거운 여행에 대한 기대가 동시에 들었다.
2.
처음 간 곳은 속초의 동아서점. 1956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는 서점은 이미 명물이 되어 있었다. 내가 서점을 간 것은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 1권 속초 편을 쓴 그곳의 사장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약속은 하지 않았다. 약속을 함으로서 부담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나지 못하면 그것이 인연의 한계라 느꼈다. 서점은 세련됐고, 아늑했다. 서점 여러 곳에서 서점의 역사를 되새기게 하는 문구들을 볼 수 있었다. 운이 좋게 사장님을 만났다. 명함을 받고 정확한 직함이 매니저인 것을 알았다. 생각보다 많이 젊어 놀랐다. 난 50대가 넘는 중후한 서점 주인을 생각했다. 내 상상력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의 대화였지만, 내가 책을 쓰는 것에도 여러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책에 사인을 받고 서점을 조금 더 둘러보고, 기념품을 보고 나왔다. 여행지에서 서점을 간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서점이 한 지역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멋질까라는 생각을 했다. 한 지역을 소개하는 책들이 한 쪽을 차지하는 서점을 상상하면, 그것이 상상이라도 신이 났다.
3.
속초박물관으로 갔다. 발해역사관-실향민가옥-전시실로 이루어진 이곳은 속초라는 곳의 역사성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 보이는 곳이었다. 특히 실향민가옥을 재현해 놓은 것은 이 지역 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라니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이야 사진 찍기 좋은 독특한 곳일 뿐일 수 있지만, 허름한 그 가옥에서의 고단한 삶이 약간은 느껴졌다. 고향이 가까워 오기도 했지만 군과 관련된 일을 하기 위해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 가운데 고향이 같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유래가 됐다고 한다. 실향의 아픔, 먹고 살아야 하는 고단함을 한 눈에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단 구구한 설명에도 발해 역사관은 내용도, 있어야 할 이유도 모두 나를 설득하기에는 좀 부족했다. 날씨가 좋았다면 울산바위가 보였을 전망대는 매우 좋았다.
4.
서피비치라고 불리는 양양 하조대로 갔다. 여느 해변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곳만은 달랐다. 서핑을 하는 사람은 물론, 20대의 젊은 사람들을 주축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파도가 강해 서핑 말고는 할 것이 없었음에도 사람이 많았다. 이국적으로 꾸며놓은 해변 때문일까. 날이 추운대도 이곳에선 그동안 열심히 만들었을 좋은 몸을 뽐내기 위한 사람들이 많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곳에서는 일종의 파티도 열린다고 한다. 젊음과 파티, 잘 꾸며 놓은 장소..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덧 번잡함이 싫어질 나이가 된 우리 일행은 인증샷을 몇 장 찍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곳을 도망치듯 벗어났다.
5.
돌아오는 길에 박이추 커피를 갔다. 1세대 바리스타라고 하는 박이추 선생이 만든 커피가게라고 했다. 꽤 큰 규모라고 생각했지만, 사람이 많아 잠시 대기를 해야 했다. 커피와 케익이 모두 맛있었다. 그곳에서 조금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강릉에 돌아가 고래서점을 갔다. 사람들이 와서 편히 책을 읽을 수 있는 그런 서점이었다. 빵집을 겸하고 있었지만, 굳이 빵을 사지 않아도 책을 볼 수 있었고, 볼 수 있는 공간도 잘 마련되어 있었다. 이런 속초와 강릉, 모두 이런 서점들이 있으므로 나에겐 더욱 매력적인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6.
같이 장을 봐서 돌아와 술을 마셨다. 셋 모두 즐겨본다는 예능 프로그램을 다시 보기로 시청했다. 모두 좋아하기도 했지만, 같이 보니 더욱 즐거웠다. 나에겐 혼자 하는 즐거움도, 같이 하는 즐거움도 모두 필요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나와 C와 K는 꽤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즐겁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추억의 힘이라 생각했다.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라지만,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얼굴에 팩을 하고 잠이 들었다(물론 중간에 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