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이 어디 출산하면 집주고, 돈 좀 주면 해결되는 문제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왜 결혼을 하지 않는가?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결혼을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집과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하다. 그게 최소한이다. 그런데 집 값은 천정부지로 오른다. 이미 빚을 내어 집을 산 사람의 숫자가 어마어마하다. 이런 상황에서 집 값은 떨어져도 안 되고, 더 올라도 안된다. 지방과 농촌은 집 값이 싸다고 하는데, 그곳에는 일자리도 생활 인프라도 없다.
더욱이 좋은 일자리도 없다. 대기업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수는 극소수다. 대기업에 들어가도 그 월급만 갖고 수도권에 집을 사는 것은 수 십년이 걸린다. 한국처럼 대기업, 중소기업의 임금격차가 큰 나라에서 중소기업에 들어간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젊은이들이 주식과 코인에 빠지는 이유이다.
집을 살 수도 없고, 좋은 직장도 드물다. 결혼을 할 수가 없다.
미래는 더욱 암울하다. 한국은 대학의 간판이 많은 것을 결정한다. 그런데 이미 소위 명문대 학생들의 대부분은 상류층의 자녀들이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계급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것이 '공부'였는데 그것도 이미 가진자들의 특권이 되어버렸다.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게 되는 이유이다. 나야 기왕 태어났으니 미래가 암울해도 살 수밖에 없지만. (그나마도 포기하고 자살하는 사람 비율도 한국이 1위다), 이 암울한 미래를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는 것이다. 심지어 교육비는 어마어마하게 들고, 그 교육을 위해서 부모들은 자신의 현재를 포기하게 된다. 부모가 행복하지 않은데 자식이 행복할 수 없다.
좋은 미래를 물려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아이를 낳지 않게 된다.
이런 사회 구조는 제조업 중심의 경제구조가 깨지면서 필연적이다. 선진국 경제의 중심은 금융, 첨단제조업, 콘텐츠 산업 등이고 우리나라도 점차 그렇게 가고 있다. 이런 경제 구조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전문성을 갖춘 인력들이다. 이런 인력은 대학 혹은 그 이상의 교육을 받아야 배출 가능하다. 예전 제조업 중심 사회에서는 중등교육만 받은 사람도 충분히 현장에 투입 되었지만 이제는 불가능하다. 아니 투입 되더라도 임금의 격차는 클 수밖에 없다.
경제구조는 계속 변화하는데, 우리는 기존 사회 질서를 바꾸는 것에 소극적이다. 20세기 자본주의의 황금기에는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의 격차가 줄어들었지만, 이제 다시 그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자본수익이 훨씬 더 이익이 크다. 이것은 소득격차가 점차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 격차가 커지만 사회의 불안이 가중된다는 것이다. 그 격차가 어느 임계점을 넘으면 항상 커다란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것은 사회의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다.
환경문제는 어떤가. 기상 이변은 벌써 일어나고 있다. 이제 40년을 조금 넘게 산 나도 기후의 변화를 체감 중이다. 다행이 나는 선진국 대열의 나라에 태어나 좋은 의료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날로 변화하는 지구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19 와 같은 팬대믹도 내 세대가 겪는 극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이다.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그런데 이 사회는 젊은이들의 이런 실패를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쉽게 돌려 버린다. 그러니 역대 최강의 스펙을 쌓은 젊은이들은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부족을 자책하고,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개인의 노력도 성공의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좌절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회의 실패다. 결국 저출산 문제는 한국 사회의 실패다.
이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많은 대안들이 제시되었다. 소득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기본소득 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젊은 세대일 수록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위에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불평등한 젠더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페미니즘이 21세기 초반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물론 이중 그 무엇도 쉽게 받아드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강한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고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그것들이 다 옳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다만 논의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다른 대안들이 등장하지는 않을까?
2022년 7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