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하남시 풍산동.
제가 거의 25년간 사는 동네의 이름입니다. 예전에는 경기도 광주군 풍산리였습니다. 서울과 근접해 있지만 개발은 전혀되지 않은 동네로 케이블 티비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 동네를 조만간 떠나야 합니다. 보금자리 아파트가 들어선다는데, 우리 동네가 건립부지에 포함이 됐거든요. 다행히 저희는 '주택 소유자'라서 분양권이 나오기 때문에 다시 이 동네로 돌아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땐 이미 제가 25년을 살던 그 동네는 아니겠죠. 그게 너무 아쉽습니다. 갑자기 이게 아쉬워 지는건 얼마전 가족들끼리 개발이 끝날 때까지 이사가야 할 동네를 결정하는 회의를 했는데, 그제야 이 동네가 사라진다는 걸 조금이나마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난 김에 우리 동네에 관한 제 기억들을 글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기억나는 건 동네의 앞 산입니다. 거북이 등껍질 처럼 생겨서 거북산이라고 불렸는데,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산비탈에서 비료포대를 깔고 눈썰매를 타곤 했습니다. 비탈의 가장 아래에는 짚을 푹신하게 깔아 놓아 안전사고(!?)에 대비하기도 했습니다. 산 정상 쪽에는 방공호 비슷한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최근에 올라가선 찾지를 못했습니다. 분명한 기억이 있는데..). 그 안에는 박쥐들이 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둡고 박쥐까지 나와서인지, 철이 없어 겁도 없던 어린시절에도 그 방공호는 동네의 형, 동생, 친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또 기억나는건 우리가 '산'이라고 불렀던, 저희 집 바로 옆에 있으며 지금은 교회 주차장으로 쓰이는 조그만 구릉입니다. 말이 '산'이지 약간의 경사에 나무 몇 그루만 있었습니다. 지금 주차장으로 쓰일 만큼 꽤 넓은 공간도 있었구요. 때문에 '산'은 평소 우리의 놀이터 였습니다. 망까기, 구슬치기, '와리가리'부터 야구에 이르기까지 각종 놀이는 모두 그 '산'에서 이뤄졌습니다. 그 한쪽에선 잠시 양봉을 하기도 했는데, 야구하던 공이 양봉하는 곳에 굴러가 주으러 갔다가 귀 뒷쪽을 벌에 쏘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희 집 길 건너 골목은 또 다른 놀이의 장소였습니다. 아무래도 '산'은 경사 때문에 축구를 하기엔 좋치 않았거든요. 덕분에 골목은 동네의 축구장으로 한창 시끄러웠습니다. 당연히 골목 양 옆에 있는 집 아주머니들은 우리가 골목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죠. 그나마 축구만 하면 다행인데, 축구를 하다가 주먹야구 같은 걸로 게임이 바뀌면, 공은 담을 넘어 골목가의 집들로 들어가기 쉽상이었거든요. 그 공을 찾아오는 것도 우리에겐 상당히 스릴 넘치는 놀이였지만 말이죠.
그리고 논이 틈틈히 있었는데 그곳도 우리들의 놀이터였습니다. 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논 옆에 경사면 이런 곳도 있었고, 논으로 쓰이지 않는 땅도 있었는데, 비가 와서 그런 땅에 물이 고이면 배랍시고 스트로폼을 띄어놓고 놀던 것, 경사명에 어디서 주운 망가진 삽으로 땅을 파고 '본부'라고 하며 놀았던 것도 아련하게 기억납니다. 여름을 그렇게 보내고 겨울에 논이 비워지면, 우리는 '산'을 떠나 논에서 야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전 예나 지금이나 야구를 잘 못하는데 그때 사촌형이 저에게 준 일루수 글러브 덕에 전 항상 야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기억나는 건 그 시절을 함께 보낸 형, 동생 그리고 친구들입니다. 그 당시 우리동네에는 제 또래의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같이 야구, 농구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났고, 부모님 몰래 나쁜 짓도 많이 했습니다. 중학교 올라가서 첫 번째 '야동'을 본 것도 그들과 함께였고, 당시로는 꽤나 큰 점 30-50짜리 고스톱 치는 일탈을 감행한 것도 그들과 함께였습니다. 중학교 때 통닭(치킨이 아니라 통닭이라 표현해야 함!)이 먹고 싶어 거북산 밑 양계장에서 5000원 주고 방금 죽은 닭 한마리와 산 닭 두 마리를 산 다음, 차마 목을 비틀 수 없어서 비료포대에 넣고 때려서 잡았던 만행을 저지른 것도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함께했던 친구들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 하나 둘 사라졌습니다. 허름하나마 저희는 집을 갖고 있었고, 그들은 당시 집이 없었기 때문이죠. 다행이 부모님들이 열심히 돈을 벌어 집을 사서 이사간 친구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제가 위에 쓴 글만 봐도 우리동네는 부자동네는 아니었거든요. 대부분의 부모님은 동네에 몇 개있던 조그만 공장에 다녔는데, 그 공장들이 이사를 가면서 이사를 갈 수밖에 없던 것도 컸구요. 저희 부모님도 그 공장들에 음식을 해주면서 생계를 유지하셨죠. 아무튼 이러한 변화 속에 야구도 할 수 있었던 또래 친구들은 하나 둘 떠났고, 지금은 저를 포함해 세명 정도만 동네를 지키고 있고, 그나마도 이제 뿔뿔히 흩어져야할 처지 입니다.
우리 동네의 이러한 변화는 그동안의 시대 변화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값 싼 중국제품의 수입으로 인한 제조업의 쇠퇴, 대기업의 싹쓸이로 인한 중소기업의 몰락의 결과가 동네 작은 공장들이 지방으로 옮겨가거나, 망하게하는 결과를 초래했죠. 거기다 교육문제도 컸습니다. 저만해도 주소는 경기도였지만, 당시 하남에 마땅한 학교들이 없어 학군은 서울로 배정되는 특이한 세대여서 서울로 학교를 다녔습니다(비록 지역 우선 배정으로 인해 점점 멀리가긴 했지만). 하지만 저보다 4년 정도 어린 친구들은 하남으로 학군이 배정됐는데, 이것이 서울로 학교를 배정받고 싶어하던 부모님들에게 이 동네를 떠날 구실을 줬죠. 강동구만해도 그렇게 나쁜 학군들은 아니었으니까요. 덕분에 지금까지 10대 중반에서 20대까지의 사람들을 우리동네에서 찾긴 어렵습니다. 서울 바로 옆의 동네가 이러한 형편이니까, 그 20년 사이에 수도권 집중화, 서울 집중화가 얼마나 심해졌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지금 이 동네를 떠나야 하고, 이 글을 쓰는 것도 '보금자리 아파트' 국가 정책 때문이죠. 아! 저는 서민과 신혼부부들에게 '내 집마련의 기회'를 주는 이 정책 자체에는 전혀 반감이 없습니다. 저희도 집을 분양 받으면 집 값이 오를테니말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아쉬운 건 청년들이 없고 침체된 동네이긴 하지만, 몇 십년된, 그래서 정말 이웃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서울 근교에 시골의 풍취를 느낄 수 있었던 꽤 괜찮았던 마을 공동체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이죠. 이곳이 고향인 사람은 없지만, 집 값 오르지 않아도 이 동네를 떠나지 않고 싶어하는 분들도 많거든요. 아무튼 몇 십년 간 그린벨트로 묶여서 개발되지 않았고, 그래서 외형적으로나마 세월을 비껴갔던 우리동네도, 이제 그 외형마져 시대의 흐름을 타게 되었습니다. 만나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다는 말을 되세기지만, 25년간 든 정을 때어내기란 쉽지 않을 듯 합니다.
P.S.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데, 기분이 참 묘~ 하네요. 담배를 필줄 알았다면, 한 대 피고 싶은 심정이 이런걸까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거의 25년간 사는 동네의 이름입니다. 예전에는 경기도 광주군 풍산리였습니다. 서울과 근접해 있지만 개발은 전혀되지 않은 동네로 케이블 티비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 동네를 조만간 떠나야 합니다. 보금자리 아파트가 들어선다는데, 우리 동네가 건립부지에 포함이 됐거든요. 다행히 저희는 '주택 소유자'라서 분양권이 나오기 때문에 다시 이 동네로 돌아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땐 이미 제가 25년을 살던 그 동네는 아니겠죠. 그게 너무 아쉽습니다. 갑자기 이게 아쉬워 지는건 얼마전 가족들끼리 개발이 끝날 때까지 이사가야 할 동네를 결정하는 회의를 했는데, 그제야 이 동네가 사라진다는 걸 조금이나마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난 김에 우리 동네에 관한 제 기억들을 글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기억나는 건 동네의 앞 산입니다. 거북이 등껍질 처럼 생겨서 거북산이라고 불렸는데,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산비탈에서 비료포대를 깔고 눈썰매를 타곤 했습니다. 비탈의 가장 아래에는 짚을 푹신하게 깔아 놓아 안전사고(!?)에 대비하기도 했습니다. 산 정상 쪽에는 방공호 비슷한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최근에 올라가선 찾지를 못했습니다. 분명한 기억이 있는데..). 그 안에는 박쥐들이 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둡고 박쥐까지 나와서인지, 철이 없어 겁도 없던 어린시절에도 그 방공호는 동네의 형, 동생, 친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또 기억나는건 우리가 '산'이라고 불렀던, 저희 집 바로 옆에 있으며 지금은 교회 주차장으로 쓰이는 조그만 구릉입니다. 말이 '산'이지 약간의 경사에 나무 몇 그루만 있었습니다. 지금 주차장으로 쓰일 만큼 꽤 넓은 공간도 있었구요. 때문에 '산'은 평소 우리의 놀이터 였습니다. 망까기, 구슬치기, '와리가리'부터 야구에 이르기까지 각종 놀이는 모두 그 '산'에서 이뤄졌습니다. 그 한쪽에선 잠시 양봉을 하기도 했는데, 야구하던 공이 양봉하는 곳에 굴러가 주으러 갔다가 귀 뒷쪽을 벌에 쏘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희 집 길 건너 골목은 또 다른 놀이의 장소였습니다. 아무래도 '산'은 경사 때문에 축구를 하기엔 좋치 않았거든요. 덕분에 골목은 동네의 축구장으로 한창 시끄러웠습니다. 당연히 골목 양 옆에 있는 집 아주머니들은 우리가 골목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죠. 그나마 축구만 하면 다행인데, 축구를 하다가 주먹야구 같은 걸로 게임이 바뀌면, 공은 담을 넘어 골목가의 집들로 들어가기 쉽상이었거든요. 그 공을 찾아오는 것도 우리에겐 상당히 스릴 넘치는 놀이였지만 말이죠.
그리고 논이 틈틈히 있었는데 그곳도 우리들의 놀이터였습니다. 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논 옆에 경사면 이런 곳도 있었고, 논으로 쓰이지 않는 땅도 있었는데, 비가 와서 그런 땅에 물이 고이면 배랍시고 스트로폼을 띄어놓고 놀던 것, 경사명에 어디서 주운 망가진 삽으로 땅을 파고 '본부'라고 하며 놀았던 것도 아련하게 기억납니다. 여름을 그렇게 보내고 겨울에 논이 비워지면, 우리는 '산'을 떠나 논에서 야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전 예나 지금이나 야구를 잘 못하는데 그때 사촌형이 저에게 준 일루수 글러브 덕에 전 항상 야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기억나는 건 그 시절을 함께 보낸 형, 동생 그리고 친구들입니다. 그 당시 우리동네에는 제 또래의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같이 야구, 농구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났고, 부모님 몰래 나쁜 짓도 많이 했습니다. 중학교 올라가서 첫 번째 '야동'을 본 것도 그들과 함께였고, 당시로는 꽤나 큰 점 30-50짜리 고스톱 치는 일탈을 감행한 것도 그들과 함께였습니다. 중학교 때 통닭(치킨이 아니라 통닭이라 표현해야 함!)이 먹고 싶어 거북산 밑 양계장에서 5000원 주고 방금 죽은 닭 한마리와 산 닭 두 마리를 산 다음, 차마 목을 비틀 수 없어서 비료포대에 넣고 때려서 잡았던 만행을 저지른 것도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함께했던 친구들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 하나 둘 사라졌습니다. 허름하나마 저희는 집을 갖고 있었고, 그들은 당시 집이 없었기 때문이죠. 다행이 부모님들이 열심히 돈을 벌어 집을 사서 이사간 친구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제가 위에 쓴 글만 봐도 우리동네는 부자동네는 아니었거든요. 대부분의 부모님은 동네에 몇 개있던 조그만 공장에 다녔는데, 그 공장들이 이사를 가면서 이사를 갈 수밖에 없던 것도 컸구요. 저희 부모님도 그 공장들에 음식을 해주면서 생계를 유지하셨죠. 아무튼 이러한 변화 속에 야구도 할 수 있었던 또래 친구들은 하나 둘 떠났고, 지금은 저를 포함해 세명 정도만 동네를 지키고 있고, 그나마도 이제 뿔뿔히 흩어져야할 처지 입니다.
우리 동네의 이러한 변화는 그동안의 시대 변화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값 싼 중국제품의 수입으로 인한 제조업의 쇠퇴, 대기업의 싹쓸이로 인한 중소기업의 몰락의 결과가 동네 작은 공장들이 지방으로 옮겨가거나, 망하게하는 결과를 초래했죠. 거기다 교육문제도 컸습니다. 저만해도 주소는 경기도였지만, 당시 하남에 마땅한 학교들이 없어 학군은 서울로 배정되는 특이한 세대여서 서울로 학교를 다녔습니다(비록 지역 우선 배정으로 인해 점점 멀리가긴 했지만). 하지만 저보다 4년 정도 어린 친구들은 하남으로 학군이 배정됐는데, 이것이 서울로 학교를 배정받고 싶어하던 부모님들에게 이 동네를 떠날 구실을 줬죠. 강동구만해도 그렇게 나쁜 학군들은 아니었으니까요. 덕분에 지금까지 10대 중반에서 20대까지의 사람들을 우리동네에서 찾긴 어렵습니다. 서울 바로 옆의 동네가 이러한 형편이니까, 그 20년 사이에 수도권 집중화, 서울 집중화가 얼마나 심해졌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지금 이 동네를 떠나야 하고, 이 글을 쓰는 것도 '보금자리 아파트' 국가 정책 때문이죠. 아! 저는 서민과 신혼부부들에게 '내 집마련의 기회'를 주는 이 정책 자체에는 전혀 반감이 없습니다. 저희도 집을 분양 받으면 집 값이 오를테니말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아쉬운 건 청년들이 없고 침체된 동네이긴 하지만, 몇 십년된, 그래서 정말 이웃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서울 근교에 시골의 풍취를 느낄 수 있었던 꽤 괜찮았던 마을 공동체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이죠. 이곳이 고향인 사람은 없지만, 집 값 오르지 않아도 이 동네를 떠나지 않고 싶어하는 분들도 많거든요. 아무튼 몇 십년 간 그린벨트로 묶여서 개발되지 않았고, 그래서 외형적으로나마 세월을 비껴갔던 우리동네도, 이제 그 외형마져 시대의 흐름을 타게 되었습니다. 만나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다는 말을 되세기지만, 25년간 든 정을 때어내기란 쉽지 않을 듯 합니다.
P.S.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데, 기분이 참 묘~ 하네요. 담배를 필줄 알았다면, 한 대 피고 싶은 심정이 이런걸까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