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행을 갔다. 이번엔 둘이서 갔다. 후에 한 명이 합류하기로 했다. 앞은 둘, 뒤에는 셋이 가는 여행이었다. 처음부터 같이 여행을 시작한 C와는 9년 전 여행을 함께 갔다. C는 이후에 자유여행으로 여러 나라를 다녔다고 하니, 나와의 여행이 그 시작이 된 셈이다.
상대적으로 둘이 휴가를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둘 모두 미혼이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일도 적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을 함께 보낼 사람들이 적어진다. 이전의 친구들은 함께 보낼 누군가를 찾았고, 난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시간을 함께 보낼 친구의 존재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반갑다.
이런 반가운 여행이지만, 난 처음부터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출발이 늦어졌다.
2.
경주로 갔다. 정확히는 문무왕릉을 보러갔다. 가는 길은 편했다. C와 번갈아 운전을 해서 편한 것도 있었지만, 말동무가 있어 먼 길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물리적 시간은 필요했다. 4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감포 해변. 변한 것은 없었다. 대왕암이라고 불리는 바위는 그대로 있었다. 그때의 파도도, 그때의 갈매기도 아니었겠지만, 파도와 갈매기도 여전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 파도와 바위에서 난 무엇을 확인하려 했던 것일까?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적에 대한 두려움을 나는 여전히 느낄 수 없었다.
감은사지로 갔다. 그곳에서야 비로소 무엇인가가 보였다. 백제가 신라와 합쳐진 것을 보았고, 감포 땅 너른 벌판이 보였고, 이곳을 지나 경주로 가는 길이 보였다. 탑을 두 개 만드는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가는 신라의 자신감도 조금은 볼 수 있었다. 번듯한 모습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두 탑은 마치 원래부터 이곳의 풍경인 듯 보였다. 불상도, 건물도 모두 잃은 그 터에서 두 개의 탑은 묵묵히 그 긴 세월을 감내했다.
3.
시내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대릉원을 갔다. 마립간, 그 오묘한 칭호로 불리던 왕과 그 일족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 거대한 봉분들은 아직 다 발굴되지 않았지만, 발굴된 무덤에서는 엄청난 부장품들이 나왔다. 반짝반짝 빛나는 화려한 금붙이부터 보통의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토기까지.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부를 수 있는 많은 유물들은 바로 이때의 산물이다. 하지만 대릉원은 이런 화려함은 소박하고 부드러운 곡선 속에 숨겨 둔 곳 같았다. 소나무들은 이곳의 분위기를 더욱 신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곳에 신경이 쓰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순장당한 사람들 때문이다. 지증마립간대에 와서 비로소 순장이 금지 된다. 마립간들의 시대가 끝나가던 시점의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주인’과 죽음을 함께 해야 했던 것이다. 화려한 유물들은 종종 그들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한다.
주인도 알 수 없는 무덤들 속을 거느리며, 공동묘지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공동묘지는 이렇게 친근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곳은 아무도 혐오 시설로 느끼지 않는다. 이곳을 찾는 누구도 이곳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망자들의 복인 것일까? 아니면 살아 있는 사람들은 1,500년쯤 지난 존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유적’이라는 이름이 ‘묘지’라는 존재를 잊게 한 것일까?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4.
황리단길을 갔다. 경리단길에서 유래한 △△길 가운데 가장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곳이다. 곳곳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내가 마지막 경주에 왔을 때는 없던 것이었다. 신라사 연구자로서 내가 얼마나 게으른 사람인지를 이곳에서 느꼈다. 사진을 찍고,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기꺼이 줄을 서는 모습은 낯설지 않았지만, 그곳이 대릉원 옆이라는 것에는 약간의 당혹스러움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신라 시대의 이곳도 이렇게 북적였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소비, 북적거림과 들뜬 분위기야 말로 도심의 저녁과 잘 맞는 것 같았다. 나와 C도 그중 한 곳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커피의 맛도 괜찮았고, 분위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마당에서 뛰어다니는 고양이들의 모습이 나를 즐겁게 했다.
5.
서악동 고분군으로 갔다. 무열왕릉이 있는 그곳이다. 매표소의 안내판은 이미 문이 닫혔을 시간이라고 우리에게 말했지만, 웬일인지 출입문은 열려있었다. 열린 문을 살짝 들어가면 거대한 무덤들이 나를 맞이한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가장 위의 무덤부터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용수, 무열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길을 건너면 무열왕의 또 다른 아들(큰 아들은 법민은 문무왕이 된다), 인문의 묘가 있으니 그럴듯한 주장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서악동의 고분들은 나의 존재를 조상을 통해 확인해야 하는 시대의 산물이다. 거기에 비석까지 세워 다시 집안을 설명하고, 업적을 기록해 놓아야 하는 수고가 지금의 나에게는 일면 유치해보였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엄중한 일이었을까를 생각하면 나의 시대가 그들의 시대보다는 좀 나아졌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6.
동궁과 월지를 보러갔다. 예전에는 안압지로 불리던 곳이다. 안압지는 폐허가 된 이곳 연못에 기러기(雁)와 오리(鴨)가 놀고 있어 훗날 붙은 이름이다. 이름을 찾고, 내부를 정비하고, 조명을 달자 사람들이 찾아왔다. 야경이 예쁘다는 이유였다. 가보니 정말 볼만했다. 나도 사진을 찍었다. 많은 이들에게 동궁 뜻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중요할 필요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장소의 의미가 중요할 필요도, 그것을 강요할 이유도 없다. 그저 이곳에 와서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 이 답답한 시대에는 더 중요할 지도 모른다. 동궁이라면 조금 조용했을 것도 같고,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면 조금 북적였을 것도 같은데,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이 선 듯 머릿속에 떠오르지는 않았다. 다만 황리단길처럼 주령구를 던져가며 놀던 분위기만큼의 흥청거림은 북적이는 이곳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7.
C와 숙소로 갔다. C는 학부를 나와 같이 나오긴 했지만 지금은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오늘의 일정이 만족스러웠는지 살짝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괜찮다고, 자기도 재밌었다고 말했다. 평소에도 배려심이 깊은 C이기에 나를 위해 하는 말일지 모른다 생각은 했지만, 그냥 믿는 것이 나에게도 편했기에, 그렇게 믿기로 했다. 사온 맥주를 같이 마시고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