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남도 여행기.
첫째 날
오랜만에 여행이다. 연필도 노트도 없는 여행이다. 새벽녘의 찬바람은 간밤에 설친 잠 때문에 잠기는 눈을 단숨에 번쩍 뜨이게 한다. 새벽의 달은 맑은 날씨 때문인지 무늬조차 뚜렷하다. 주말 새벽에도 버스와 기차역에는 제법 사람이 있다. 기차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다들 어디를 가는 것일까? 기차만큼 빠르게 떠오른 태양에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남도로 가는 창밖 풍경은 넓은 벌판이다.
목포에 도착했다. 두 번째라고 역이 낯익다. 밖으로 나와 동행하기로 한 A를 만났다. 이번 여행은 실로 A의 노력으로 이뤄졌다. 일정을 짜고, 운전을 하고 안내까지 도맡았다.
목포역
가는 길에 보이는 남도의 흙은 예뻤다. ‘예쁘다’는 말을 남도 사투리로 이야기 하면 더 좋았을 것이다. 논밭 풍경은 정겨웠고, 길 끝에 나온 월출산은 웅장했다.
먼저 간 곳은 백운동 정원. 정원의 내원은 산 속 숨겨 놓은 햇살 잘 드는 땅을 기어이 찾아낸 것 같았다. 봄 햇살이 반짝 비추는 매화는 나이든 해설사의 정성 가득한 설명을 다 듣지 않아도 이곳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뽐냈다. A는 옥판봉을 보며 도봉산을 떠올린 다산과 같이 유배 온 듯 떠난 서울을 그리워했다. 다시 이동을 위해 올라가는 길, A는 나를 절경으로 안내했다. 기암괴석이 볕 잘 드는 다소곳한 비탈의 차 밭을 살포시 안고 있는 곳이었다. 누구나 보면 놀랄 경치였지만, 산과 차를 좋아하는 A에게는 남다른 곳이었으리라.
백운동(별서)정원
A가 보여준 절경. 차 밭과 산.
무위사로 갔다. 백운동정원에서 무위사 주차장까지도, 주차장에서 무위사까지도 금방이다. 단청의 화사함이 가시지 않는 건물들을 지나면, 산의 능선과 잘 어울리는 지붕을 갖고 있는 빛바랜 극락보전이 나온다. 단아한 앞모습과 치밀한 옆모습, 그리고 웅장한 건물의 규모는 ‘국보’라는 수식마저 번거로워하는 것 같다. 건물을 지키는 보살님은 다른 억양을 쓰는 이들에게 시주를 받으며 열심히 소원을 받아 적는다. 부처님은 이 모습을 인자롭게 바라보고 있다. 모두 건물과 어울리는 풍경이다. A는 그곳에 앉아 자신만의 의식을 치른다.
무위사극락보전
어느 쪽에서 봐도 좋은 건물이다.
A는 읍내(표현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서울, 부산 등 대도시의 중심지를 ‘시내’라고 하면, 강진, 해남의 중심지는 그것과 구분해서 표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사용한 용어이다.) 구경을 좋아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A야 말로 진정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주차를 하고 식당을 찾았다. 미리 정해 놓은 식당 같은 것은 없었고, 나는 그것이 좋았다. 느낌으로 골라 들어간 식당에서 해물순두부를 먹었다.
백련사로 갔다. 동백나무 군락을 소개하던 A는 꿀을 먹고 날아가는 새와, 떨어지는 꽃을 보던 순간을 이야기하다, 떠올리며 전율한다. 이야기만으로도 아름답고 슬픈 순간이다. 수없이 피고 진 꽃만큼의 사연으로 허공이 다득 찬다.
A는 동백나무 이야기가 끝나자 배롱나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름 배롱나무꽃이 피면 다시 올 거라 약속하듯 말했다. 그것은 동백꽃을 다 못본 아쉬움과 배롱나무꽃을 봐야한다는 인간다운 의무감이었다. 그래서일까? A가 읽어준 시는 텅빈 공간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채울 것에 대한 기대로 들렸다.
배롱나무
등산객들이 모아 둔 동백꽃
다산초당으로 향했다. 가는 길 잠시 들른 대웅보전 앞 가득한 매화향이 잠시 발걸음을 붙잡았다. 가는 길은 예전 우리 집으로 가던 오솔길 같았다. 힘듦보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더 이상 초당이 아닌 초당을 보고야 말았지만, 반가움에 아쉬움은 없었다. A는 언어의 번역, 그것이 갖는 의미에 관한 한 문학평론가의 글을, 다산이 형을 그리워했다는 곳에서 나에게 읽어줬다. 아. 나는 그들의 말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매화향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글이 향기를 전할 수 없음이 안타깝고, 다행스럽다.
다산초당 수로에 떨어진 동백꽃.
백련사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쏟아졌다. 잠시 걱정이 됐지만 이내 즐거웠다. 카메라만 아니었다면 진심으로 더 즐거웠을 것이다. 나이를 먹은 후 갑작스레 내리는 비를 눈치 보지 않고 마음 것 맞을 수 있는 날이 내겐 그리 많지 않았다. 비가 나뭇잎을 때리며,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달리며 만드는 소리가 모두 새로웠다. 비온 뒤 세상은 먼지를 모두 닦아낸 듯 색을 바꿨다.
녹우당으로 향하는 길, A가 옆에 큰 무덤을 발견하고 차를 세운다. 옥천고분군이다. 고대사 전공자인 나보다 먼저 반응했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에 조성됐다고 하는데, A는 이런 고분을 보는 것이 좋다고 했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커다란 반 구 모양의 조형이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녹우당으로 갔다. 해남 윤씨의 고택이라 하는데, 고택보다 화려하고 웅장한 전시관이 눈에 띈다. 안채, 사랑채 모두 사정으로 볼 수 없었는데, 개의치 않고 뒷편의 비자나무숲으로 갔다. 관리 된 듯도 되지 않은 듯 보이는 이 숲은 그 끝 역시 어딘지 알기 어려웠다. A는 끝까지 가기를 바라는 눈치였는데, 아까 비 맞은 나를 배려한 듯, 내려가자는 내 말에 선듯 동의했다. 내려오는 길엔 다시 비가 왔다. 비를 피하기 위해 옥수수 뻥튀기와 모과차를 마셨고, 다 마신 뒤엔 수선화를 봤다.
녹우당에서 숲으로 가는 길.
수선화. A는 나에게 추사가 수선화를 좋아했음도 알려줬다.
A와 함께 해남 읍내를 구경했다. 평범한 저녁을 찾아 들어간 곳은 일식집이었다. 앞서 온 손님이 많아 우리는 꽤나 오래 기다려서야 밥을 먹을 수 있었는데, A는 옆 자리 할아버지와 앞 발 다친 고양이를 대하는 식당 사장님의 자세와, 먹을 만했던 음식 때문에 저녁식사를 마음에 들어 했다. 배불리 먹고도 고구마빵을 먹기 위해 다시 빵집으로 갔다. 원했던 빵은 매진되었지만, 우리는 다른 빵을 다 먹었다.
들어와 반신욕을 하고 잠을 잤다.
둘째 날
운전을 한 A는 피곤했는지 자러 가며 나에게 깨워 줄 것을 부탁했다. 11시도되기 전에 잠든 나는 일찍 일어났고, A를 깨운 후 아침을 먹었다. 짐을 챙겨 나와 해남군청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A가 좋아하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기 위한 소나무라는 뜻의 수성송(守城松)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A는 나무의 생김새와 생명력에 감탄할 줄 알았다.
대흥사로 향했다. 가는 길이 좋았다. 계곡의 물소리가 재잘대며 인사하듯 사람들을 반겼다. 더 위쪽에도 주차장이 있었지만, 걷는 보람이 있는 길이었다. 걸어 들어간 대흥사는 포근한 분지 속에 내려앉은 사찰이었다. 앞뒤로 부드러운 곡선의 산세는 웃는 듯 살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아침의 추위는 어느덧 가셨다. 햇살 잘 드는 곳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차와 산을 좋아하는 A와 초의(艸衣)가 머물렀다는 일지암으로 향했다. 오르는 길을 제법 가파르게 경사진 길이었지만 차분히 걸어갔다. 일지암은 우리 걸음만큼이나 차분한 경치를 가졌다. 그곳에 살던 초의가 끓인 차 맛이 궁금했다(나와 A의 집에는 모두 추사가 초의에게 줬다는 茗禪이라고 쓴 글의 출력물이 걸려있는데, 추사는 글에 초의가 만든 몽정과 로아라는 차를 받았다고 적었다). A는 ‘겨울휴관’을 읽었는데, 일지암에서의 감각은 내용과 시의 내용과 상관없이 겨울휴관이 끝났음을 알렸다. 내려가는 길에 스님과 커피 값을 흥정했다.
대흥사에서 보이는 산 능선
일지암에서 보이는 지붕의 곡선
미황사에 다 와서 애호박찌개를 먹었다. 쇠락한 시골 마을의 식당이라 생각했는데, 안은 손님으로 가득했다.
미황사는 달마산으로 가는 등산객으로 붐볐다. 미황사를 보러 오는 이들보다 등산을 왔다가 사찰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수행 중이라며 조용히 해줄 것을 부탁하는 안내판은, 이곳이 목적지가 아닌 등산객들에겐 소에게 들려주는 염불만 못했다. 대웅보전 뒤로 병풍처럼 펼쳐진 달마산의 풍경이 아니었다면, 그곳에서 바라본 푸른 바다 풍경이 아니었다면 오후의 시작을 망칠 뻔 했지만 풍경은 나의 기억 속의 그것보다 훨씬 좋았다. A는 달마산에 쉬이 오르는 길이 있으나,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자신이 달마산에서 본 풍경을 자랑하듯 설명했다. 문득 달마산 뾰족이 – A는 달마산의 봉우리를 그렇게 불렀다 – 등산을 하고 싶었지만, 언제일지 모르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미황사의 뾰족 봉우리. A는 사진을 보고, "실제만 못하다"고 말했고 나도 적극 동의했다.
멀리 바다가 보인다.
목포로 갔다.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다시 나와 목포대교가 보이는 바다로 갔다. A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A는 언젠가 자신이 목포를 그리워하게 될 때가 오면 이 사진을 꺼내 보겠다며, 주저하던 사진을 찍었다. 다소 수선스런 세간의 이야기는 남의 일인듯 텅빈 조선내화 공장을 지나 달동내를 올랐다. A는 마을의 이름이 다순구미라 했다. 볕이 잘 들어 ‘따순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도 했다. 이름 때문인지 사람들의 마음씨도 따술 것 같았다. 언덕을 넘으니 한 번 가본 곳이 나왔다. 여행을 끝낼 때가 왔다.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러 갔는데, A는 소화도 힘들어했고 카페에서는 계속 눈을 감았다. 쉬어야 할 주말을 나와 함께 보내느라 무리를 한 것은 아닐까 걱정됐다. 그래도 A는 내가 기차 타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야 발걸음을 돌렸다.
A가 어쩌면 그리워 할지도 모른다던 풍경 중 하나.
다순구미
A가 자꾸 눈을 감았던 카페.
사실 이번 여행은 A가 아니면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강진과 해남은 혼자 가기에 너무 멀게 느껴지는 땅이었다. 막상 와본 남녘은 더 이상 좋을 수 없었다. A는 1주 혹은 2주 후에 왔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 아쉬워했지만 오늘은 오늘대로 좋았다. 익숙하지 않은 운전까지 해준 A에게 새삼 고마웠다.
이번 여행은 약간 변덕스런 날씨, 맑은 공기, 나무, 동백꽃, 산 능선과 각색의 봉우리, 수선화, 몇 편의 시, 정겨운 논밭 풍경, 그리고 A에 대한 고마움으로 기억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