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아니 지금도 가끔 두렵고 궁금한 질문이 있다. 하나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이다. 이 책의 저자인 룰루 밀러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인생의 의미를 물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들을 답은 뜻밖이었다. “의미는 없어” 그녀의 아버지는 신도, 계획도 내세도 운명도 없으며, 심지어 우주에서 인간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존재임을 역설한다. 그리곤 “그러니 너 좋을 대로 살아”라고 결론을 내린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우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나, 혹은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오늘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우주는 물론 우리 사회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저자는 그럼에도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 과정에서 사랑도 하고 이별도 했다. 그리고 이별의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다 찾아낸 사람이 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학자였다. 저자는 그의 자서전을 발견하고는 그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한다. 그는 스탠퍼드의 초대 학장이었고, 지금까지 알려진 어류의 1/5을 ‘발견한’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연구와 노력이 집약된 연구 샘플이 화재와 지진으로 두 번이나 크게 상실의 위기에 쳐했을 때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실을 표본에 직접 꿰매는 방법을 고안해 내기까지 했다.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그의 자세는 저자에게 큰 감명과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더 알아가는 순간 저자는 다시 혼란에 빠진다. 그는 우생학의 신봉자였다. 단순히 그가 우생학의 신봉자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과학자인 그가, 그가 그토록 신봉하며 따르던 과학의 근거들에 의지하지 않고, ‘믿음’에 근거하여 우생학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더 존귀한 생명체가 있으며, 인간 역시 더 귀한 존재가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믿음은, 그가 과학적으로 의지하던 다윈의 학설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결국 그의 이러한 믿음은 미국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결국 20세기 초반 미국은 다양한 방법으로 임신중절을 강요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러한 법은 지금도 완전히 사장되지 않고 남아 미국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오히려 다시 희망을 발견한다. 그에 의해 만들어진 정책의 희생자가 결국은 이 사회의 일원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리고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놓치는 일’이라는 다윈의 관점을 상기한다. 그러면서 세상의 다양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의미 없는’ 존재일 수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중요한 존재’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저자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사실은 학자로서 큰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후에도 그의 연구를 따라가며 친구인 캐럴 계숙 윤을 통해 또하나의 놀라운 사실과 마주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생물학적으로 볼 때 ‘어류’란 굉장히 모호한 관점이며, 하나로 묶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유럽인들이 아라비아반도,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의 여러 지역, 코카서스지역,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아시아인’으로 묶는 것, 혹은 모든 아프리카 대륙에 사는 사람들을 ‘아프리카인’으로 묶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물론 책에서는 어류와 관련해서 보다 과학적인 설명들을 제시한다). 기존의 분류(즉 비늘이 있고 척추가 있어 물속을 헤엄치는 동물을 어류로 묶는)는 직관의 영역일 수 있지만, 그것은 편리에 의한 것일뿐 과학적 사실은 아니라는 것 역시 이야기한다.
그러면 어류를 포기해서 얻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은 또 다른 세계이다. 어류라는 하나의 단위로 모든 물고기를 묶었을 때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들. 그리고 우리가 ‘물고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또 알지 못하는 것들은 무엇일까라는 지식에 대한 겸손 같은 것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이런 지적 호기심을 채워 주는 것 이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흥미로웠음을 밝힌다. 이 책은 저자인 룰루 밀러의 자서전이기도 하며, 데이비드 스터 조던이라는 사람의 평전이다. 동시에 과학교양서이자, 현재의 배우자와 가족에게 바치는 연애편지이다. 각주를 제외하면 28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에 이 모든 내용을 매우 흥미롭고 밀도 있게 담고 있다는 것은 저자의 놀라운 필력과 구성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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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9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룰루 밀러, 곰출판,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