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도시재생과 마을만들기.
① 도시를 재생할 수 있을까?
재생은 ‘다시 살린다’는 뜻이다. 무언가 죽어야 다시 살릴 수 있다. 도시 재생은 도시가 죽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죽은 도시가 있을까? 죽었다는 공간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다. 그 공간은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지 살아 있다.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왜 그 ‘죽은’ 공간까지 밀려 났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보통은 싸기 때문이고, 싼 곳을 찾아 온 사람들이 그곳에 자기 집을 사서 왔을 리 없다. ‘죽은’ 곳이 ‘재생’되면 집값이 오르고, 집값이 오르면 그곳에서 숨죽이며 살던 사람들은 다시 ‘죽은’ 공간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러면 또 사람들은 그곳을 ‘재생’하자고 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자본의 욕망이다. ‘재생’은 그곳에 집을 소유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던가? 그러면 그냥 그 사람들이 살 수 있게 숨 쉴 공간만 마련해 주면 된다. 약간의 정비로도 충분하다.
어디가 ‘죽었다’고 생각하니,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드는 모양이지만 이 복잡한 도시에 죽은 공간이 어디 있겠는가?
② 마을을 만들 수 있을까?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마을이다. 마을은 예전에도 있고 지금도 있다. 그러니 마을을 만들자는 것은 마을 공동체를 복원하자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공동체가 ‘만들자’하면 만들어 지는 것인가?
조선의 마을 공동체는 직업 공동체이기도 했다. 농업 중심의 사회는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대가족이 필요했음은 물론이고, 모내기, 추수 등의 연간 사업, 저수지 짓기 등의 장기 사업 등은 하나의 가족으로는 불가능했다. 공동체는 필수적이었다. 거기에 당시에는 한 사람이 태어나면 평생 한 마을에서 살다 죽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유대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공동체는 사회의 필요로 자연히 생긴 것이지 억지로 권력이 만든 단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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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은?(도시를 기준으로)
- 직업공동체는 직장에나 존재한다.(대부분의 시간을 마을이 아닌 직장이나 그 근처에서 보낸다)
- 1인~2인 가구가 대부분이다.(가족 공동체 조차 이전 같지 않다)
- 젊은 층은 집을 구매 할 수 없어 2년 단위로 이사를 다녀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마을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은 그 마을의 장기 거주자들, 그 가운데에서도 여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일 수밖에 없다. 나머지 대부분은 소외 된다.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마을공동체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를 보라. 그 외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을공동체 사업을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관심이 있어도 여유가 없다. 이 역시 사회 구조적인 현상이다.
주거가 안정되고, 삶에 여유가 생기면 지역공동체는 자연히 형성된다. 권력이 만들고 싶다고 만들어 지는 것이 공동체라면 권력은 공동체를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인가?
(2017.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