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우즈베키스탄 – 지리의 중요성-Part3. 사마르칸트

beatles for sale 2020. 2. 2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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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로, 그리고 숙소로

부하라에서 사마르칸트까지 가기위해 이용한 교통편은 고속열차 아프라시압(Afrosiab)이었다. 조금 덜컹되긴 했지만, 한국의 KTX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지평선이 보였다. 땅이 비옥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이 성실하게 농사를 짓는 다는 것은 곳곳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은 기름이 나오지 않지만 가스는 나온다고 하는데, 가스를 추출하는 공간으로 추정되는 곳도 볼 수 있었다. 사마르칸트에 가까워 가자 먼 곳으로 엄청나게 높은 산들도 눈에 들어왔다.

기차역에 도착하니 역시 문 앞에서부터 택시기사들이 영업 중이다. 우리는 조금 더 밖으로 나가 정식 택시를 탔는데, 그 기사는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6개월 정도 한국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머문 기간 치고는 정말 유창한 한국어였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즈벡어와 한국어는 같은 알타이 계로 어순이 같다고 하는데 혹시 그런 영향이 있었을까? 덕분에 심심하지 않게, 그리고 별 걱정 없이 숙소로 왔다. 오늘 길에 본 사마르칸트는 그야 말로 도시였다. 부하라가 유적의 도시라면,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다운 면모를 보였는데, 그것은 수도인 타슈켄트와도 다른 무엇이었다.

숙소는 호텔 레지스톤. 직원은 매우 친절했는데, 숙소 자체는 오래되고 조금 촌스러웠다. 하지만 우즈베키스탄의 모든 것이 그렇듯 그 와중에도 지저분한 모습은 찾을 수 없었고, 정리도 깔끔하게 잘 되어 있었다.

기차에서 본 넓게 펼쳐진 지평선

사마르칸트 소개

사마르칸트는 기원전 4천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으며, 저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도 방문한 도시였다(물론 그는 이곳을 정복했다). 당시의 기록에는 사마르칸트가 아니라 마라칸타라고 나온다. 이는 소그드어 Asmarakand에서 유래한 것이다. Asmara는 돌 혹은 바위, kand는 성채 혹은 도시를 가리키며, 발음이 약간 변하여 오늘날의 사마르칸트가 되었다고 한다. 원래 상업을 업으로 삼던 소그드인들의 도시였고, 교역으로 성장해서, 실크로드의 대표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8세기 초부터 이슬람 왕조 국가들의 지배를 받으며 이슬람 문화가 유입됐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원래 아프라시압 언덕위에 있던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하지만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언덕 밑에 다시 도시가 조성되었고, 티무르에 의해 수도가 되었다. 지금도 타슈켄트에 이어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이다.

 

레기스탄 광장의 야경

짐을 풀고 야경을 보러 나갔다. 역시 택시를 이용했다. 시내의 택시비는 웬만하면 2달러를 넘지 않는 듯했다. 레기스톤 광장의 야경은 화려했다. 레기스탄(Registan)모래(reg)’(stan)’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레기스탄 광장에는 정면에서 봤을 때 왼편에 15세기 초반에 건설된(1417~1420) 울루그벡 메드레세(Ulugbek Madrasa), 왼편에는 17세기 중반(1619~1636)에 건설된 쉐르도르 메드레세(Sherdor Madrasa), 정면에는 17세기 중반(1646~1660)에 건설된 틸라-코리 메드레세(Tillya-Kori Madrasah)가 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입장 시간이 지나 광장 가운데로 들어갈 수는 없었는데, 밖에서는 충분히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조명을 멋지게 켜서 모습을 뽐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부하라가 아직 거의 꾸미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라면, 사마르칸트는 세련되게 자신을 꾸밀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마르칸트 레키스탄 광장의 야경

저녁시간

친구가 가본 맥주 집에 가기로 했다. 맥주 공장 근처에 생긴 맥주집이라고 하는데, 맥주도 맥주지만 소시지가 인상적이었다. , , , 돼지, 혹은 둘을 섞어 만든 소시지를 고를 수 있었고, 그것을 고르면 구워서 가져다주는 시스템이었다. 관광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맛있게 술을 마시는데, 그만 정전이 됐다. 처음에는 약간 당황했는데, 사람들이 차분해서 우리도 당황하지 않고 휴대폰 조명을 비춰가며 술을 마셨다. 문득 5년 전 나폴리가 생각났다. 그때는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정전이 되며 지하철이 멈췄다. 역시 엄청 당황했는데, 아무도 놀라지 않아서 나도 다시 차분해진 기억이 있다. 장소도, 시간도 달랐지만 상황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그리고 이번엔 친구가 함께 있으니 더 놀라지 않았던 것 같다. 전기는 10분이 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맥주를 마시고 다음 장소로 가는데, 내가 클럽을 가보자고 했다. 사실 친구는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시는 것을 바랐다. 하지만 이미 호기심이 폭발한 나는, 꼭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고 결국 20여분을 걸어서 클럽에 갔다. 한국의 나이트클럽 같은 곳이었는데, 앞에서는 고용된 것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사실 호기심이 더 들어 조금 더 보고 싶었지만, 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아플 지경이라 바로 나왔다. 그리고 호텔 근처로 돌아갔는데, 그 주변에는 술집이 없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숙소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흑맥주와 소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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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이드

아침에 일어났다. 오늘은 가이드와 차량을 모두 빌리는 날이었다. 9시에 만나기로 했다. 내가 여권 놓은 곳을 기억 못해 한바탕 소동을 벌이느라 조금 늦게 나왔는데 가이드는 이미 로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여성분이었다. 그래도 30대 중반은 넘을 것 같지 않았다.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차에 싣고 본격적인 관광에 나섰다. 자기소개를 하며 이름을 말해주었는데, 친구도 나도 끝내 이후에 그분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선한 인상을 가지고 있어 신뢰가 갔다. 웃음이 밝은 사람이었다.

※가이드투어

- 구르아미르영묘

처음 간 곳은 구르 아미르 영묘였다. 이 영묘에는 티무르와 그의 두 아들, 그리고 두 손자가 묻혀있다. 상당히 화려한 문을 넘어 들어가면 안쪽으로는 더 화려하게 금박으로 꾸민 방들이 나온다. 여기에 관들이 놓여있다(실제 관은 지상에 놓인 관 지하에 있다고 한다). 티무르는 그야말로 우즈베키스탄의 영웅이었다. 수도에도, 사마르칸트에도, 부하라에도 그의 동상이 있었다. 탁월한 정복군주 이기도 했지만, 잔인한 학살자이기도 했던 그는 제국의 위엄을 사방에 떨쳤지만, 무수히 많은 적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 그였기에 그의 영묘와 무덤도 많은 굴곡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구르 아미르 영묘 외부
구르 아미르 영묘 내부 오른쪽이 티무르의 관이라고 알려져있다. 진짜 관은 같은 위치 지하에 있다. 
화려한 실내 장식

레기스탄 광장

어제 들어가지 못한 레기스톤 광장에 들어갔다. 먼저 간 곳은 울르그벡 메드레세였다. 친구의 말을 빌리면 울루그백은 한국의 세종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재위 기간도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했다. 그는 학문을 융성시키려했는데 그 과정에서 만든 것이 레기스탄 광장에 있는 울루그벡 메드레세였다. 다른 메드레세와 형태는 같았지만 규모는 차이가 많이 났다. 엄청나게 컸다. 일본에서 온 촬영팀은 내·외부에서 무엇인가를 촬영하고 있었다. 안쪽의 활용은 다른 곳과 비슷했다. 상점으로 이용되고 있었는데, 가이드는 우리를 데리고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그 상점이 있던 공간의 본래 역할들을 알려줬다.

다음으로 간 곳은 광장 정면에 위치한 틸라-코리 메드레세. 이곳은 금박으로 된 화려한 내부를 갖고 있었다. 인상 깊은 것은 발굴된 유물들과 예전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쯤 촬영된 사진들에는 완전히 파괴된 사마르칸트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유적들은 엄청나게 공을 들여 복원한 것들이었다. 여기서도 내부에서 기념품들을 팔고 있었다. 사진 속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며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밖으로 나와 쉐르도르 메드레세로 향하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이곳 역시 화려했다. 정면에 태양을 등지고 사슴을 쫓는 사자 두 마리가 대칭으로 그려져 있는데, 쉐르도르라는 말 자체에 사자가 세져진이란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안쪽은 역시 다른 메드레세와 같은 구조였는데, 무엇인가 정돈이 잘 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무엇인가 어수선했다. 우리는 이곳을 잠깐 둘러보고 광장을 나섰다. 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더 무서운 추위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기스탄 광장의 모습. 이미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맨 아래 왼쪽 사진에서는 일본 촬영팀이 보인다.

 

비비하눔 사원과 시압바자르

시압바자르는 우즈베키스탄의 여느 시장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이곳에서 스카프를 싸게 살 수 있다고 해서 어머니를 줄 비단 스카프를 비롯하여 선물로 사용할 몇 개의 스카프를 샀다.뭔가 더 돌아보고 싶었지만 너무 추웠다. 사진을 찍는 손이 시렸다. 옆의 비비하눔 사원으로 향했다.

다음으로 간 곳은 비비하눔 사원이었다. 티무르는 1399년 인도 원정을 다녀와서 새 수도로 지정한 사마르칸트에 건설을 지시했고, 90마리에 코끼리를 사역에 동원했다고 전한다. 그에 걸맞게 규모도 가로, 세로가 167m, 109m에 이른다. 하지만 너무 크게 지은 나머지 지속적으로 붕괴가 이루어졌다. 1974년에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발원하여 복원을 하였다고 전한다. 가이드에 안내에 따라 건물을 보면 새로 지은 부분과 예전의 건물의 차이가 명확하게 보인다. 세 바퀴를 돌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꾸란을 놓는 석돌 책받침이 있어 세 바퀴를 돌며 소원을 빌었다. 그 받침대의 밑으로 지나가면 지나가는 쪽에 따라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하는데(오른쪽은 아들, 왼쪽은 딸), 그 밑을 지나는 커플도 있었다. 엄청나게 큰 건물을 꼼꼼하게 보고 싶었지만 매우 추웠다. 더 둘러보는 것을 포기하고 식당으로 갔다.

 

영상입니다. 내리는 눈보라를 느껴보세요!

점심

점심은 뽈롭이라고 하는 우즈베키스탄 전통 볶음밥과 빵 안에 고기가 들어 있는 솜사라는 음식을 먹었다. 다들 그리 비싼 음식이 아니라서, 저렴하게 점심을 먹었다. 가이드의 음식값도 우리가 냈다. 너무 추워 일정을 변경하기로 했다. 울르그백 천문대, 양탄자 공장, 아프라시압 박물관, 와인 시음 등을 하러 가기로 결정했다. 추워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론이었다.

 

양탄자공장

추워서 바뀐 실내 코스의 처음인 양탄자 공장으로 갔다. 처음에는 그냥 작은 양탄자 공방 정도 되는 줄 알았는데, 가서보니 문재인 대통령도 방문한 곳이었다. 각종 양탄자가 그림같이 걸려 있었다. 작업 공간을 보러 갔다. 생각보다 엄청난 노동이 필요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몇 주에서 몇 년이 걸린다고 했다. 가격도 들어가는 노동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었다. 뭔가 진심으로 하나 사고 싶었는데, 가져가기도 힘들었고 가져간다고 해도 어디 둘 곳이 없었다. 결국 아무 것도 사지 못하고 나왔는데, 그곳에서 노동을 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들 한 명 한 명은 노동자이자, 장인이었다. 그들의 노동하는 장면을 보면 그들이 만든 작품이 탐날 수밖에 없다. 갈 때는 시큰둥했는데 갈 때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양탄자 공장의 모습

 

울르그벡 천문대

우즈베키스탄의 세종이라고 볼 수 있다는 울르그벡 왕이 만든 천문대를 갔다. 사실 천문대는 일부만 남아 있고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천문대의 원래 높이는 40m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천문대에서 관측한 일 년의 길이는 3656시간 108초였는데, 이는 현대의 기술로 측정한 1년의 길이와 1분도 차이 나지 않는다. 이때 계산된 천문력은 회회력(이슬람력)으로 알려져 조선에 전해졌고, 세종 대 이순지 등이 칠정산내외편을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전한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인류는 항상 교류하고 있었고 그 결과는 우리의 삶과 역사에도 영향을 주었다. 새삼스러운 진실이 마음으로 느껴졌다.

울르그벡 천문데의 남은 모습과 그 맞은 편에 있는 박물관의 외관

아프라시압 박물관과 언덕

아프라시압 박물관으로 갔다. 이곳에 있는 벽화가 보고 싶어서 사마르칸트에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곳에 간다고 하니 눈보라에도 설렜다. 도착한 박물관은 생각보다 작았다. 아프라시압 벽화를 가장 마지막에 봤다. 벽화를 빼고 본 나머지 전시실은 사마르칸트 전근대 생활사 박물관 같은 느낌이었다. 깔끔하지만 소박한 느낌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오기 전에 대대적으로 한 번 단장했다고 했다. 벽화를 보기 전에 작은 방으로 가서 영상을 봤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제작한 영상이었고, 여러 언어로 만들어졌다. 길이는 9분 가량. 벽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에 많은 도움이 됐다.

이제 벽화를 보러 갔다. 색은 많이 바랬다. 아니 지금도 바래지고 있다고 했다. 몇 년 전까지 보이던 고구려(혹은 신라) 사신 칼의 고리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왜 궁전에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이것은 여전히 궁금증으로 남았다. 총 44m에 이르는 이 벽화는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그려졌다는 것이 당연한 추정이겠지만, 그것을 궁전 가장 큰 방 가운데 하나에 그릴 필요가 있었을까? 만약 일상적인 추정이 맞다면 왕이 바뀔 때마다, 왜국에서 많은 사신이 올 때마다 다시 그린 것일까? 여러 상념이 머리를 스쳤다. 진짜 고구려인이 온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오지 않았지만 온 것처럼 그렸다는 것이다. 동방의 먼 곳에서도 사신이 왔다고 하면 왕의 권위가 더 높아지기 때문이라는데, 아직 확실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벽화는 확인했지만,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 언덕을 올랐다. 칭기스칸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도시가 있던 곳이었다. 비바람이 몰아쳐 매우 추워서인지, 언덕은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더 멀리 가보고 싶지만 우리를 추위에서 기다리는 가이드를 봐서 기념사진 몇 장만 찍고 언덕을 내려왔다.

박물관의 모습
압프라시압 벽화의 모습 윗족 왼편 뒤쪽 두명의 모습이 고구려 사신으로 추정되는 그림이다.
아프라시압 언덕 위

 

와인시음

와인 시음을 하러 갔다. 가격은 인당 17천원 정도? 실외에 있는 와이너리로 가는 줄 알았는데 다시 사마르칸트 도심으로 왔다. 그중에서도 굉장히 번듯한 건물로 들어갔다. 우리는 거기서 그곳 직원에게 간단한 역사 안내를 듣고(영어로), 본격적으로 와인 시음을 시작했다. 10잔이 나왔는데, 1잔은 화이트 와인, 둘째, 셋째는 드라이 와인, 넷째부터 일곱째까지는 스위트 와인, 여덟 번, 아홉 번째는 꼬냑, 열 번째는 여러 술을 섞은 독한 술이었다. 1~3 번째 와인은 입맛에 맞았지만, 스위트 와인들은 너무 달았다. 직원은 이곳이 햇볕이 좋아 포도가 달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20%의 설탕이 들어갔다는 것을 봐서는 단 와인이 인기가 있는 것 같았다. 10잔은 생각보다 많았고, 꼬냑을 마실 때쯤 이미 술이 좀 올랐다. 종업원이 우리가 마시길 기다려 술을 설명하니, 뭔가 압박감을 가져 빨리 마신 것도 취기가 오르는 것에 한 몫 했다. 나도 친구도 살짝 취해 와이너리를 나왔다.

와인 시음

 

기차역으로

기차역으로 갔다. 약간 시간이 남아 가이드와 커피를 마셨다. 그곳에서 가이드 비용을 냈다. 원래 가이드비 50달러, 차량+기사 35달러였는데, 100달러를 줬다. 우리를 성실히 안내해 주었던 보답이었다. 우리를 기차역까지 안내해주고 나서야 가이드는 돌아갔다. 돌아가고 나서야 우리가 명함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물론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하지만 그 가이드를 소개해 준 사람의 연락처를 알고 있으니 연락을 할 방법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를 탈 때까지도 술기운이 남았고, 친구와 나는 잠이 들었다.